어릴 적 아버지가 가족 구성원을 소집해 가훈을 선언한 ���이 있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였는데, 어딘지는 모르지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고 마음 먹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만약 '꼭' 앞에 '서로에게'를 덧붙였다면 나도 가족도 더 다정하고 화목해지지 않았을까.
같은 고민을 선배에게 이야기했더니 무조건 걸으라고 했다 한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무음 상태로 계속 걷다보면 내면의 목소리 같은게 들릴 거라고.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외부의 소리에 의존하다보면 스스로가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남의 평가에 취약해진다는 의미로 이해됐다.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고 집에 혼자 있을 때의 소리의 공백(?), 침묵이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을 일으켜, 유튜브든 숏츠든 팟캐스트 같은걸 하염없이 듣고 있다, 해결책은 없겠는가 하는 친구의 고민에 그건 꼭 너만의 문제라기보다 반쯤은 사회적 질병에 가깝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해 줬다.
그런 의미에서, 나로서는 <뱀에게 피어싱>(카네하라 히토미, 2006)이 좋은 소설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음습하고 가학적인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파괴를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게 됐다. 구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죽음을 미루는 일은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책에서 구원을 받는다거나, 음악이 삶을 정화한다거나, 영화가 인생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희미해질대로 희미해진 나이가 되었지만(정말 나이 탓일까), 그런 믿음이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필요도, 그게 조금씩 마모되는 꿈 같은 거라고 애써 주장할 이유도 없다.
교환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자가 잘못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자는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자다. 그가 하는 희생은 찬미되지만 사람들은 사랑하는 자가 희생을 약간 유보하고 있지 않나를 질투하면서 주목한다. 사랑하는 자는 바로 그 사랑에 의해 불의를 저질렀다는
가끔 들어가 보는 본계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수년간 방치 중임에도 불구하고, 팔로잉과 팔로워가 줄지도 늘지도 않는 평행 상태를 유지 중이다. 물론 팔로잉의 대충 반��� 각종 공식 계정이거나 봇이고, 팔로워의 반 이상은 스팸으로, 숫자 안정의 주요 원인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의 어떤 세계에서 유지되는 수의 평행이라는 건 기괴하다. 반은 (물론 죽겠지만) 영생인 비-인간이나 기계이고, 거기에 또 반은 말을 멈춘 사망자여서, 지금 여기에 영혼과 육체를 모두 가지고 있는 분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AI 세상이 따로 있나. 여기가 로두스다.
우선 세탁기를 돌린다. 첫 번째 물이 채워지기 전에 양치와 세면을 마친다. 커피를 마신다. 아니. 샌드위치 만들어��� 커피와 먹는다. 잠깐 쉰다. 남은 커피 마시면서 일 할 세팅 한다. 세탁물 꺼내서 말린다. 일을 시작한다. 끝낸다. 산책하러 나간다. 이것이 오늘 계획이다. 그러려면 일어나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