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오래된 왕조들은 대부분 20세기의 입구에서 사라졌습니다. 청 제국도, 대한제국도, 류큐왕국도 이제 지도 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칙령도 없고 왕궁의 조정도 없으며, 그들을 호위하던 군대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왕조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따라가 보면, 역사가 만들어낸 묘한 장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청 황실의 성씨였던 愛新覺羅는 지금 도쿄 오이마치의 한 안과 간판에 적혀 있습니다. 아이신각로 위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환자들의 백내장과 근시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한때 자금성의 황제들이 사용했던 이름이 이제는 병원 예약표와 진료기록에 적힙니다. 몇백 년 전이라면 황궁 깊숙한 곳에서 들렸을 성씨가 오늘날에는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라는 말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대한제국의 이야기는 더욱 묘합니다.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 이은의 아들인 이구는 2005년 도쿄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의 구관은 원래 그의 가족이 살았던 이왕가 도쿄 저택이었습니다. 이구 자신도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조가 사라지고 저택은 호텔이 되었지만, 그곳에서 태어난 황손은 수십 년을 떠돌아다니다 결국 노년이 되어 다시 그 장소의 객실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죽음 사이에 왕궁이 호텔로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뒤 황실의 제례를 이어갈 사람으로 선택된 것은 더욱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고종의 다른 아들 의친왕 이강의 후손인 이원, 당시 이름 이상협이었습니다. 그는 궁궐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었고 특별한 왕족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현대홈쇼핑에서 아동·레포츠 상품을 담당하는 평범한 40대 회사원이었습니다. 부하 직원들은 그를 그냥 ‘이 부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마지막 황세손의 계자가 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제사와 종묘의 의례를 이어야 한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어제까지 회의실에서 매출과 상품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고종의 제향에서 제주가 되는 기묘한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류큐왕국 역시 비슷합니다. 1879년 일본의 류큐처분으로 왕국이 사라지고 마지막 국왕 상태왕은 도쿄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직계 가계는 계속 이어져 오늘날 제23대 상씨 당주인 상위에게 이릅니다. 류큐의 왕좌를 이어받았을지도 모를 집안의 후손은 전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세이부백화점에 취직했습니다. 한때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외교사절을 맞이하고 명·청 황제의 책봉을 받았던 왕가의 후손이 현대 일본의 백화점 조직 안에서 한 직장인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지금 그는 오키나와가 아니라 일본 신도의 중심지인 이세신궁이 있는 미에현 이세시에 살면서 류큐 왕가의 역사와 제례를 잇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아보면 묘한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자금성의 황족은 도쿄의 안과의사가 되었고, 대한제국의 황실 계승자는 현대홈쇼핑의 부장이 되었으며, 류큐 국왕의 후손은 세이부백화점의 직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몰락한 왕족들의 이야기’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역사가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의 삶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왕조가 존재할 때 그들의 신분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었습니다. 누구는 황제가 되었고 누구는 왕세자가 되었으며 누구는 황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조가 사라지자 그 이름은 더 이상 직업도 권력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하나의 성씨와 가문의 기억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에는 이상한 시간의 겹침이 있습니다. 아이신각로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가 진료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고종의 증손자가 회사에서 상품기획 회의를 하며, 류큐 국왕의 현손이 백화점에 출근합니다. 몇 세기 전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풍경입니다.
그러면서도 역사는 가끔 그들을 다시 찾아옵니다. 미국의 입국심사관이 여권의 Aixinjueluo를 알아보고 “청나라의 후손입니까?”라고 묻고, 평범한 회사원이던 이원에게 어느 날 황실의 제사를 이어달라는 요청이 찾아오며, 이세에 살던 상위가 다시 오키나와의 왕릉으로 돌아가 선조들의 제례를 올립니다.
왕조는 끝났지만 왕조가 만들어낸 시간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왕조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장엄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폐허가 된 궁전이나 마지막 황제의 퇴위식이 아니라, 도쿄 어느 병원의 진료표와 홈쇼핑 회사의 사원명부, 백화점의 오래된 인사기록 같은 곳에 조용히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