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보다 네 편 내 편을 더 중시해 무능한 사람을 지휘관으로 선발하면 결과는 뻔하다.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엉터리 인사는 감시와 견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참사 앞에서 이재명이 소셜미디어에 남긴 장엄한 훈계다. 자신이 임명한 UN대사에 대해 자백하는 글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더라. 이 텍스트를 활자로 읽어 내리며, 인간의 언어가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가당착의 현장을 목격한다. 타인의 실패를 딛고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하려 던진 저 날카로운 문장들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재명 본인의 국정 운영을 겨냥하는 가장 뼈아픈 자백이자 부메랑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이번 월드컵을 보며 분노를 넘어 아득한 불쾌감을 느끼는 지점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거대한 무대에서 실패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4년 전 파울루 벤투 감독 시절을 복기해 보라. 그때도 비판과 우려는 존재했다. 하지만 당시의 불만은 "과연 한국 축구가 전통적인 역습을 버리고 주도적인 점유율 축구를 구사할 수 있느냐"는 철학적 방법론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다. 방향성에 대한 이견이었을 뿐, 벤치에는 분명한 지향점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홍명보를 향한 대중의 탄식은 그 궤가 완전히 달랐다.
"도대체 그라운드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철학도, 전술적 뼈대도 텅 비어버린 맹목의 벤치. 역대 최고의 조 편성, 최상의 환경, 유럽 무대를 호령하는 황금 세대의 선수들을 쥐고도 이토록 철저히 붕괴한 이유는 단 하나다. 지휘관의 뇌리에 든 절대적인 '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여기서 이성의 메스를 들이대어 묻고 싶다. 방향키를 잃고 표류하는 벤치를 바라보며 느끼는 그 절망감은, 지금 대한민국 여의도와 청와대를 바라보는 대중의 무력감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겹쳐진다.
내가 정의하는 좋은 리더란 본질적으로 ‘가능성을 높이는 자’다.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할 가능성, 청년이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 평범한 시민이 노동을 통해 내 집을 마련하고 노후의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이 국가의 운전대를 쥔 자의 유일한 책무다.
그러나 이재명 체제의 계기판을 건조하게 들여다보라. 그는 과연 우리 삶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가.
불법 파업에 면죄부를 쥐여주는 노란봉투법으로 기업을 목조이고 물리학과 지리의 원리를 무시한 채, 오직 표밭 관리를 위해 전력도 용수도 없는 호남 모래사막에 반도체 공장을 쑤셔 넣으려 한다. 국민연금의 투자 내역 비공개를 확대해 5천만 국민의 노후 자금을 권력의 깜깜이 쌈짓돈으로 굴릴 위험한 틈새를 열어젖혔다. 낡은 부동산 규제로 중산층의 자산 형성 사다리를 모조리 걷어찼으며, 군사분계선 80미터 앞까지 적의 철조망을 끌어들여 국가 존립의 가능성마저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재명의 국정 어디에도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최소한의 철학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직 빚을 내어 푼돈을 쥐여주고, 제도를 뜯어고쳐 자신의 안위와 권력을 연장하려는 얄팍한 전술만이 난무할 뿐이다. "도대체 이 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우리가 느끼는 이 참담한 질식감의 기저에는, 무능한 자들이 완장을 차고 시스템을 망가뜨리는데 제1야당인 국민의힘조차 식물인간처럼 쓰러져 아무런 견제를 하지 못한다는 깊은 절망이 자리하고 있다.
타인의 무능을 질타하며 체육행정 개혁을 운운하기 전에, 이재명은 자신의 빈곤한 궤적부터 돌아보아야 마땅하다. 그라운드의 꼰대나 권력의 파시스트나, 완장 찬 무능이 빚어내는 야만의 속성은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겠지만 철학을 잃어버린 축구는 괴롭지만 그저 운동경기일 뿐이라 폄하할 수 있고, 참가하는 토너먼트마다 '중국'처럼 짐을 싸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성을 상실한 국가의 대가는 세대 전체의 가혹한 빈곤으로 지불된다. 철학이 증발한 리더십이 지배하는 사회,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 허물어지는 문명의 기둥을 다시 세워야 하는가. 무거운 탄식만이 폐허 위를 떠돈다.
무능한 자가 무능한 자를 향해 대놓고 무능하다 삿대질을 한다. 그 지독하게 무능한 권력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력한 민주주의의 한계 속에서, 이 모든 청구서를 떠안을 청년들에게 미안함만 커진다.
전광판의 숫자가 화려하게 명멸한다. 코스피 9000. 이 경이롭고 웅장한 지수 앞에서 이재명과 좌파 권력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신들의 경제적 치적이라 포장하기 바쁘다. 그러나 그 눈부신 숫자의 껍데기를 건조하게 쪼개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대한민국 경제의 서늘하고 참혹한 시체가 웅크리고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다루는 자들은 기만술의 천재들이다. 코스피 상승을 이끈 것은 오직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단 두 개의 거인뿐이다. 지수가 9000을 목전에 둔 폭등장 속에서도 무려 589개의 종목이 하락했다. 상승 종목은 그 절반인 291개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가 경제의 성장이 아니다. 글로벌 AI 열풍이라는 외부의 거대한 해일 위에 올라탄 두 반도체 기업이, 뇌사 상태에 빠진 대한민국 경제 전체의 멱살을 틀어쥐고 간신히 매달려 있는 아슬아슬한 구조 현장이다.
좌파들이 틈만 나면 개혁과 해체, 적폐 청산을 외치며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던 그 반도체 재벌 대기업들이, 역설적이게도 이재명 체제의 경제 성적표를 분식(粉飾)해 주는 유일한 산소호흡기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산업과 평범한 국민의 일상은 어떠한가.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에너지 정책과 반시장적 노동 규제로 인해 제조업과 내수 서비스업은 완전히 질식했다. 뉴욕타임스가 정확히 짚어낸 이른바 'K자형 양극화'. 극소수의 첨단 산업만 하늘로 치솟고, 나머지 99%의 실물 경제와 평범한 노동자들은 심해로 곤두박질치는 끔찍한 절망의 생태계다.
가장 서늘한 비극은 이 파산한 경제 구조가 청년들의 영혼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30 세대의 뇌수를 잠식한 거대한 포모(소외 불안) 증후군을 보라. 물가는 폭주하고 자산 격차는 은하수처럼 벌어지는데, 월급을 모아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바보들의 동화가 되어버렸다. 청년들은 노동의 가치를 조롱하며 영끌과 빚투로 주식 호가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국가가 땀 흘려 일하는 자들의 내일을 지켜주지 못하고, "노동이 무슨 소용이냐"는 절망감만 펌프질하는 사회. 자산 형성의 사다리를 모조리 걷어차 놓고, 전 국민을 도박꾼 아니면 배급표를 기다리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이재명식 포퓰리즘이 완성해 낸 '투기 공화국'의 민낯이다.
구체적인 숫자로 장부를 까보자. 지난 5월과 6월, 단 두 달 동안에만 매매를 강제 정지시키는 사이드카가 무려 28차례나 터졌다. 5월에 6번 울리더니, 6월에는 아예 거의 매일같이 사이렌이 울려 퍼진 셈이다. 시장 전체의 전원을 강제로 뽑아버리는 서킷브레이커 역시 6월 8일과 23일, 연달아 두 번이나 발동됐다. 특히 23일엔 하루 만에 코스피 지수가 910포인트, 10% 가까이 증발하며 증시가 완벽한 셧다운을 맞았다. 여기에 매일같이 수십, 수백 개의 종목이 상하 30% 가격제한폭의 천장과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옴짝달싹 못 하며 비명을 지르는 엽기적인 발작이 숨 쉬듯 반복되고 있다.
이 차가운 팩트가 증명하는 본질은 명확하다. 지금의 코스피는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의 정상적인 자본 시장이 아니다. 그저 끝을 모르고 돌아가는, 코인판보다 더한 '초대형 사설 도박장'으로 완벽하게 전락했다. 노동의 가치를 짓밟고, 징벌적 세금과 규제로 부동산과 실물 경제를 질식시킨 좌파 정권이, 벼랑 끝에 몰린 전 국민의 멱살을 쥐고 '영끌 빚투'라는 룰렛 테이블 앞으로 강제로 끌어들인 결과다.
상황이 이토록 참담한데도, 어제 국회에는 기본소득당, 사회 무슨당 같은 좌파들이 모여 반도체 기업의 초과 세수를 뜯어내 '국부펀드'를 만들고 기본소득을 나눠주겠다는 몽상을 얘기한다.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두 거인의 등골에 빨대를 꽂아 피를 빨아먹으면서, 그 핏빛으로 자신들의 볼이 발그레해졌다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기생 생물들의 왈츠다.
코스피 9000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무능한 권력이 빚어낸 극단적 불평등을 가려주는 거대하고 위태로운 홀로그램이다. 글로벌 AI 사이클이 식고 반도체의 착시가 걷히는 날, 우리는 모래로 쌓아 올린 이재명 체제의 경제가 얼마나 끔찍한 소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이다. 신기루가 화려할수록, 사막의 갈증은 더욱 잔인한 법이다.
과거 보수 정권 시절, 환율이 1,300원을 넘보자 당장 나라가 절단 날 것처럼 곡(哭)을 하던 자. 종말론적 공포를 팔아먹던 그 방송사가, 이재명 치하에서 1,540원이라는 참담한 지표가 찍히자 돌연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낭만적인 시인으로 탈바꿈했다. 메인 뉴스의 타이틀이 무려 "속상해요", 그리고 "시간이 해결"이란다.
오른쪽으로 기울면 국가 부도의 전조이고, 왼쪽으로 기울면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속상한 감정의 문제인가. 이토록 노골적인 선택적 관대함 앞에서는 분노를 넘어 차라리 경이로움마저 느껴진다. 국가의 경제적 뼈대가 무너져 내리는 끔찍한 위기를 한낱 개인의 투정쯤으로 축소해 버리는 마술. 이것은 보도가 아니다.
최근 며칠간 트럼프 대통령을 다루는 기괴한 행태는 역겨워 굳이 논평조차 하지 않았다. 다자외교의 장에서 한개의 정상회담도 못 한 정권의 초라한 현실을 방어해 주려 저널리즘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품과 자존심마저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꼴이란. 공공의 전파가 사이비 광신도 집단의 사보로 완벽히 전락한 순간이다.
물론 어떤 매체건 일말의 정치적 편향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팩트라는 최후의 보루마저 허물고 권력의 애완견을 자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1,540원이라는 피 마르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두고 "속상하다"며 칭얼대는 집단에게 언론이라는 이름표는 너무도 과분한 사치다.
그러니 훗날 상식을 되찾은 사회가 이 낡고 부패한 선전 기구의 문을 닫게 만들거나 책임을 물을 때, 부디 거리로 기어 나와 '언론 탄압'이라며 거창한 순교자 코스프레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진실을 말할 의무를 버리고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 것은 다름 아닌 MBC, 너희 자신이다.
기억하라. 언론의 본질을 스스로 폐기한 자들의 최후는 탄압이 아니다. 그것은 무허가 불법 건축물의 '철거'요, 수명을 다한 유해 '폐기물의 처리'에 불과하다.
다만, 너희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 기꺼이 '속상한 척' 정도는 해주마.
광장에는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 심지어 바다 건너 유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연일 울려 퍼지고 있다. 가장 어리고 힘없는 자들이 기어이 걸어 나와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이 벅찬 풍경 뒤로, 참으로 기괴한 적막이 흐른다. 평소 같았으면 이 광장의 헤드라이너를 장식하며 마이크를 쥐고 흔들었을 그 요란한 이름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는가.
가장 먼저, 지성의 전당이라 불리는 상아탑의 찌질한 풍경이다.
과거 우파 정권의 사소한 흠결만 보여도 앞다투어 붓을 꺾는 비련의 지식인 흉내를 내며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얹어대던 그 고고한 대학교수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가. 교복 입은 어린 제자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의 압살을 탄식하며 피를 토하고 있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자들은 연구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단체로 시력을 잃었다.
헌정 질서가 짓밟히든 말든, 행여 이재명 정권과 좌파 지자체·교육감들이 내려주는 짭짤한 연구비와 용역 프로젝트가 끊길까 두려워 차마 입을 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건 제발 아니길 바란다.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계산기만 두드리는 지식 소매상들을 어찌 학자라 부르겠는가.
더 나아가 종교계와 법조계의 낡은 완장들은 한층 더 엽기적인 코미디를 선사한다.
광우병과 촛불 정국마다 가장 먼저 광장에 제단을 차리고 핏대를 세우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은 지금 어느 성당 지하에 웅크리고 계신가. 헌법기관이 주권자의 표를 훔치고 증거를 불태운 이 거대한 불의 앞에서는 갑자기 성수(聖水)가 말라버리기라도 했는가. 아군이 저지른 민주주의 파괴에는 철저히 눈을 감는 그 비루한 선택적 분노. 이쯤 되면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라 ‘정의구라사제단’, 혹은 ‘선택적 정의구현사제단’으로 정직하게 개명하시라. 진영의 유불리에 따라 묵언수행을 하는 사제복이라면, 그것은 종교인의 제의가 아니라 정치 브로커의 작업복이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던 ‘민변’의 행태는 얄팍함의 극치다. 시민의 참정권이 박살 나고 입술이 꿰매지는 현장을 목도하고도 권력을 규탄하는 그 흔한 성명서 한 장 내놓지 않는다. 일각에선 민변이 선관위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했다며 변명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역겹고 눈물겨운 '알리바이용 면피'다. 정권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할 성명서 배포는 없고, 훗날 "우리도 가만있진 않았다"고 변명하기 위해 가장 안전하고 무기력한 행정 서류 한 장 달랑 던져놓고 꼬리를 만 것이다. 그들도 이참에 ‘민주당을 위한 변호사모임’이나 ‘유사(類似) 민주사회를 위한 서류대행 모임’으로 간판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
권력의 감시자를 자처하던 ‘참여연대’는 정작 주권이 강탈당한 아스팔트 위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이재명의 눈치만 살피는 '방관연대', '침묵연대'로 쪼그라들었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때 비장한 텍스트를 남기며 분노를 뽐내던 ‘소셜테이너’ 연예인들 역시, 권력과 팬덤이 쥐여주는 '대본'이 없으니 단체로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고 꿀잠에 빠졌다.
‘정의’, ‘민주’, ‘참여’, ‘지성’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단어들을 이마에 박아놓고서, 정작 그 가치가 썩어빠진 선관위와 권력에 의해 능멸당할 때는 쥐구멍을 찾는 어른들. 말뿐이 아닌 진정한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꼿꼿한 시국선언문 앞에서, 잔뜩 몸을 사린 채 눈치나 살피는 꼴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을 담아야 한다. 얄팍한 정치색을 도덕과 지성으로 위장해 온 그 사기극의 유통기한은 끝난 듯 보인다. 부디 아스팔트에 선 어린 제자들과 학생들 앞에서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덜고 싶다면, 내일부터는 그 가증스러운 간판들부터 시원하게 내다 버리기를 건조하게 권한다.
21세기 천만 메가시티의 선거에서 기표할 투표용지가 모자라 주권자가 발길을 돌렸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나 실수라는 가벼운 단어로 퉁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자재 수급조차 실패하여 국민의 신성한 참정권을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 명백한 행정적 파산이자 헌법에 대한 테러다.
상상해 보라. 만약 보수 정권하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선거가 중단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당장 광화문 광장에는 '이게 나라냐'는 핏발 선 현수막이 내걸리고, 분노를 가장한 어중이떠중이 전문 시위꾼들이 드글거리며 거대한 굿판을 벌였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압살당했다며 광광 울부짖는 군중들 틈바구니에서, 김민웅 부류의 낡은 선동가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후원금 통을 돌리며 뒤로는 흐뭇한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 게 뻔하다. 그러나 선관위의 이 거대한 파행이 좌파 진영의 득실에 부합해서일까. 그 요란하던 광장의 대법관들은 약속이나 한 듯 기괴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2021년 독일 베를린의 사례는 이 사태를 비추는 가장 뼈아픈 타산지석이다. 당시 베를린 주 헌법재판소는 투표용지 부족과 지연 사태를 두고, 전체 유권자의 1% 남짓만 영향권에 있었음에도 주저 없이 ‘선거 전체 무효와 재선거’를 판시했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흠결은 단 1%라도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선관위는 돌아간 유권자가 몇 명인지 파악조차 못한 채 뻔뻔하게 기계의 전원을 켜고 개표를 강행하려 든다. 일단 개표가 완료되고 당선인이 공표되어 버리면, 법원에 효력 정지 가처분조차 구할 수 없게 되는 공직선거법의 맹점을 노린 것이다. 자신들의 치명적인 선거 관리 범죄를 기정사실로 덮어버리려는 비겁하고도 서늘한 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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