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의 음지 (The Shadow of Spotlight)
서각, 서가각.
지독하게 건조한 연필 소리만이 지저분한 화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방에 흩어진 흑연 가루와 유화 물감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재우는 차가운 대리석 단상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과거 파리와 밀라노의 런웨이에서, 수억 원짜리 오트쿠튀르 수트를 입고 수천 명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대한민국 ���정상 탑 모델. 그 시절 재우의 몸은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예술이자 권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입시생들과 취미반 수강생들의 서툰 손끝에서 기계적으로 해체되는 '시급 5만 원짜리 나체 마네킹'일 뿐이었다.
"자, 모델분. 포즈 바꿀게요. 이번엔 조금 더 허리를 비틀어서, 음…… 퇴폐적인 느낌으로 가보죠."
강사의 무심한 목소리에 재우는 붉게 충혈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자존심이 날카롭게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우는 덤덤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매끄럽게 갈라진 등 근육과 완벽한 비율의 골반 라인이 조명 아래 드러나자, 화실 여기저기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한순간의 일탈, 그리고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나락에 처박힌 지 불과 몇 달 만에 재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당장 내일 쫓겨날 월세방과 숨을 조여오는 빚 독촉 앞에서는, 한때 신의 총아라 불렸던 오만함도 무력하게 꺾일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할게요."
두 시간이 마치 이백 년 같았던 타임이 끝나자, 재우는 굳은 몸을 일으켜 커튼 뒤 탈의실로 향했다. 거친 수건으로 몸에 묻은 땀을 닦아내는데, 학원 원장이 문을 두드렸다.
"재우 씨, 잠깐 나 좀 봐요. 엄청난 제안이 들어와서 그래."
원장이 내민 것은 하얀색의 고급 린넨 종이로 된 계약서 봉투였다. ���팍한 종이 케이스 전면에는 기하학적인 로고와 함께 'Atelier'라는 문장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개인 전속 드로잉 모델?"
"어. 어떤 자산가가 재우 씨 프로필을 보고 콕 집었대. 조건이 파격적이야. 지금 학원에서 버는 돈의 수십 배, 아니…… 재우 씨가 가진 빚을 한 번에 청산하고도 남을 액수야."
재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계약 조항을 읽어 내려갔다. 액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그 아래 적힌 특약 사항이 기괴했다.
[특약 사항] 명시된 기간 동안 피고용인은 지정된 밀실 내에서만 포즈를 취해야 하며, 의뢰인이 제공하는 상황과 지시에 절대 복종한다.
"상황과 지시라니요."
"예술가들이 다 그렇지, 뭐. 영감을 얻으려고 독특한 연출을 원하나 봐. 거절하기��� 액수가 너무 크지 않아? 재우 씨 상황에선 밧줄이라도 잡아야지."
원장의 뼈 있는 말에 재우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불쾌하고 음산한 예감이 온몸을 감쌌지만, 당장 오늘 밤 지불해야 하는 이자 문자 알림이 주머니 속에서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