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프다고 저녁약속을 취소하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서 소주를 샀다 뚜껑을 따 한모금 마셨다 헤드폰에서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 촌스럽게도 매력적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막걸리가 가득 찬 냉장고 앞의 양복장이는 20분동안 무슨 막걸리를 살까 불콰한 얼굴로 비틀대고 있다
무기력한 시간이 쌓여갔다
어디로든 발을 내디딜때마다 발바닥엔 무기력하게 쌓인 시간이 질척된다
다시 울었다 질척대는 무기력이 싫었다
눈에 띄게 두꺼워진 무기력한 시간의 두께를 볼 수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기력이 몸을 덮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불우한 악기,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12~13p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너도, 그래 너도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리기를.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22층의 콘크리트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설령 시간당 100mm의 비가 온다 해도 그것은 나와 무관한 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사건일 뿐, 것보다는 이 나이 처먹도록 사랑이니 진심 따위 단어들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내게는 더 끔찍한 일이었다(불우, p145)
삶을 지속케 하는 것은 미련 혹은 의욕이다
유난히 세상 사람들이 일찍 잠든 것 같은 이른 새벽, 22층 옥상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너를 생각한다, 이 도시의 한 쪽에서는 호우경보로 끔찍해지고,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언제나 나와 무관한 일, 밤의 정령조차 덕트의 기계소리가 싫어 접근하지 않는
바람이 양떼처럼 비들을 몰고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깨 걸고 최류탄에 맞서던 80년대의 눈부신 봄날 같기도 했고 속 쓰린 맑은 구토가 쏟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Don't speak to me this way Don't touch me this way* 그 해 여름의 끝 나는 바보 온달을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