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에는 누군가 내 꿈을 빌어주는 게 아닌, 스스로 염원하며 깊게 빠져들고 싶어요. 의지하는 건 간혹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당신도 그러길 바라요. 하지만 벼랑 끝이라면 주저 없이 손 내밀어 줄 테니 언제든 두드려 주세요. 색이 단풍으로 물들 시기, 선선한 나날이 되기를.
(내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말들은 공기 중에서 한 번 떨리다 이내 소멸했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텅 빈 감각뿐이었다. 날개를 억지로 뽑아 버린 자리에 어떤 형태의 통증이 내려앉을지. 이렇듯 맥락 없는 생각들만 구름 조각처럼 수면 위를 둥둥 떠돌았다. 사납도록 집요하게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닿을 때에야 간헐적으로 현실을 인지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야. 머릿속은 물감을 말끔히 지워 낸 흰 도화지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몸은 내 뜻과 무관하게 움직였다. 마치 조종간을 다른 무엇인가가 빼앗아 간 듯한 낯선 감각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발음이 뭉개진 채 웅얼거리던 중, 문득 집이라는 단어가 방송국을 불러냈다. 맞아, 방송국. 거기에 가야 하는데.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왔더라. 쏟아져 내리는 몽롱함을 가까스로 움켜쥔 채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몸이 별안간 허공으로 들려 올랐다. 누구지. 누구였더라. 아니, 나는 가면 안 되는데. 네 옷깃을 가까스로 움켜쥐고 떨어져 나가려는 듯 힘없는 몸부림을 쳤다.) 가야 돼요···. 방송국 가야 돼. 나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지만 바위덩이처럼 단단했다. 내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탓에, 발끝은 끝내 바닥을 찾지 못했다. 결국 조수석 안으로 밀려 들어가듯 앉혀졌다. 거칠어진 숨이 목울대 언저리에서 부서졌다. 눈썹을 찡그린 채 좌석 시트를 더듬거리면서도 귓가로 흘러든 네 말을 하나라도 붙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흐트러진 의식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라고 했던가. 흐린 시야 너머로 네 형체가 어른거렸다. 나는 닫힌 차 문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확인하듯 더듬다가 끝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의식이 가라앉는 와중에도 잠꼬대는 멈추지 않았다. 방송국과 메추리 씨, 그 단어들만이 부서진 레코드처럼 입술 사이에서 반복되었다. 그리고 잠이 찾아오면 악몽은 늘 약속이라도 한 듯 붙어댔다. 셀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죄인처럼 떨고 있는 나. 던진 달걀이 터져 흘러내린 끈적한 액체가 얼굴과 옷자락을 타고 질질 흘러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나. 돌아갈 수도, 변명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수많은 시선 앞에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파란이 일렁거렸어요. 당신을 보면 잃었던 청춘에 익사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요술을 걸었거든요. 숨이 차오르다 결국 온몸을 팽창하게 만들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렸는데. 기적을 움켜쥐어도 되려나. 밤하늘이 새 노래를 읊조려요. 도달할 수 없는 세계까지 뛰어보고 싶은 마음, 이루어줄래요?
자다가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내게 있어 가장 큰 호상이 아닐까 싶어. 온갖 잡소리가 귓가를 괴롭히는 거. 겪어봤으려나. 늘 밤에만 이래. 머리맡 인형은 예전처럼 나를 지켜주지 못했고 되레 악의 화신이 되어 발목 잡고 끌고 가더라. 매일 땀으로 얼룩진 새벽. 이 고리는 끊을 수 없는 걸까.
많이 분했고 억울했어. 왜 혼자서 숱한 오해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리 소리쳐도 믿지 않을 말을 굳이 기력 소모하며 외쳐야 하는지. 결국 깨달은 건 먼저 고개를 내리자. 사람에게 쏟은 가시는 언젠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법이니.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 잘 빚어야 죄악을 받지 않아요.
밖은 덥잖아요. 그나마 시원한 곳에서 어지러운 게 낫지. 아이들 귀엽겠다. 은호 씨는 아이 좋아해서 그 직업을 선택한 거예요? (네 말에 피식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늘어놓아도 아이들을 특별히 생각하는 게 눈에 훤해서. 눈을 끔뻑. 그림을 새로 그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 정말 액자에 넣어둬야겠네. 손재주도 좋으시고. (종이를 받아 슬며시 감상한다.) 코팅해서 부적으로 갖고 다닐까 봐요.
@xxadmitxxd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는 듯, 따라서 스마일. 더 환한 미소를 걸어본다. 끔뻑거리는 가로등 밑에서 마주하니 기분이 색다르네.) 저기 정자에 앉을까요? 은호 씨랑 먹으려고 카페도 들렸다 왔는데. (디저트가 담긴 종이봉투를 보여주며 눈썹을 들썩인다.) 음, 늘 바빴죠. 프로젝트가
아, 봐주라. 나 일이 너무 바빴어. 또 새 프로젝트 때문에. 그렇다고 네 생각을 허투루 한 건 아니야. 매 순간 매초 머릿속에 담았는데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어. 봤잖아, 나 비틀 거리는 거. 걱정만 끼칠 게 뻔한데 얼굴 보여서 뭐해. ··· 그래도 미안. 부재중 쌓아놓은 거 무시했으니까.
이 아픔에 정의를 내린다면 어떤 단어를 붙여 이어가야 할지. 으스러진 사랑에 구정물을 엎지르고 싶지 않았어. 당신의 최선이었나요. 솔직하지 못해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길이. 나는요, 아직 끝내지 않았어. 온점을 찍을 수 없었어. 칠해놓은 시의 문장은 남겨두지 말았어야지. 왜 미련을 걸어.
본래 내 것이었던 사랑과 우정과 관계와 일 그 밖의 모든 부분을 빼앗긴다는 건 속이 끊어지는 고통과 같다고 해요.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 신발 밑창이 닳을 만큼 살갗에 생채기가 생겨 핏물이 눌어붙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가보는 거죠. 과거 아픔은 기억하되 종극, 움켜쥔 자유에 환호를 휘날리며.
자다가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내게 있어 가장 큰 호상이 아닐까 싶어. 온갖 잡소리가 귓가를 괴롭히는 거. 겪어봤으려나. 늘 밤에만 이래. 머리맡 인형은 예전처럼 나를 지켜주지 못했고 되레 악의 화신이 되어 발목 잡고 끌고 가더라. 매일 땀으로 얼룩진 새벽. 이 고리는 끊을 수 없는 걸까.
버튼은 여기 있고··· 풍량 조절도 이렇게. (네게 하나하나 기능을 알려주면서 담뿍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실내에서 하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 글쎄요, 라고 답한 사람은 은호 씨가 처음이야. (아이처럼 선풍기를 다루는 모습에 푸스스 웃음을.) 아이들이 좋아해서 그리는 거구나. 은호 씨, 너무 따뜻하고 귀엽네. 귀찮을 만도 한데. 꿋꿋이 아이들을 아껴주는 거 보면··· 존경스러워요. (눈을 끔뻑.) 아, 토끼가 저예요? 예상 못했네. 토끼 나 줘요. 간직할래. 서로에게 선물.
(답답했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대체 네가 원하는 길이 뭔데. 그게 뭐길래 나를 이토록 매정하게 버렸냐고. 손끝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진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 확실히 말로 전해줘.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부탁한다. 말없이 사라지는 건 완벽한 끝맺음이 아니잖아. 기대하게 되잖아. 지금처럼.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문다.) 나 눈치 빨라. 빠른데 모른 척해 줬던 거란 거, 잘 알아둬. ······ 어렴풋이 예상은 했어. 네 몸에서 피비린내 풍길 때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험한 일을 하는구나 싶었거든. 그것 때문에 나를 밀어내는 거라면··· 그래. 너는,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됐던 거야. 소중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한 남자애로. (네게 상처가 될 줄 알면서도 속사포로 쏟아낸다. 그냥 화나고 네가 걱정되고. 모든 감정이 혼합 돼, 화살을 쏜 것 같아.) ······ ······ 그래서, 네 결론은, 우린 여기까지다?
“보고 싶었다고.”
우리가 왜 헤어졌어야 했는지. 그 짧은 시간에 몸부림치던 나는 안 보였냐고. 따지며 묻고 싶었지만 막상 얼굴 보니까 보고 싶었단 말만 흘러나왔어. 손으로 받칠 새도 없이 너에게 그리움과 미련을 쏟아냈는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줘.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여전히 내가 밉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