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을에 다시 낮이 돌아왔다.
불탄 담장 자리에 새 나무를 세우고 무너진 지붕을 걷어내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을은 그렇게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문 닫았던 방앗간에서도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고, 어디선가 갓 구운 빵 냄새까지 풍겨왔다. 아이들 몇이 골목을 뛰어다니는 소리까지 들리자 치코는 담벼락 아래 나무 그늘에 앉은 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으, 이것도 못 들다니."
치코가 물통 하나를 들다 말고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나가던 리코가 얼른 다가와 대신 받아 들었다.
"아직 무리하지 마세요. 상처 다 안 아물었잖아요."
"용사님도 참, 잔소리가 아줌마 같네."
"그거 칭찬 아니죠?"
치코가 씩 웃고는 다시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며칠 전보다 상처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얼굴과 팔에는 아직 붕대가 남아 있었다.
리코는 낮에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 잔해를 치우고 틈틈이 치코 옆에 앉아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는 걸 도왔다.
"자, 천천히. 무리하지 말고 여기까지만."
"…이 정도로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
"대련 때는 그렇게 씩씩하더니, 지금은 왜 엄살이에요?"
"엄살 아니거든!"
치코가 발끈하며 팔을 쭉 뻗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코가 웃음을 참으며 다시 팔을 붙잡아 각도를 조절해 주었다.
저녁이면 리코는 치코 옆에 앉아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치코는 대개 건성으로 듣는 척하면서도 이야기가 끊기면 먼저 다음 말을 재촉하곤 했다.
"그래서? 그 아저씨 지붕은 다시 세웠어?"
"네! 저는 나무 나르는 것만 도왔는데 다 되고 나니까 완전 새집 같았어요."
"…부럽네. 나도 같이 나를걸."
마을 사람들도 리코를 어려워하지 않게 됐다. 처음엔 용사라는 말에 잔뜩 긴장하던 이들이 이제는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밥을 나눠 주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났던 노인도 매일같이 두 사람을 찾아와 상처에 좋다는 풀을 갈아 발라주고 갔다.
"용사님 아니었으면 우리 마을은 진작에 끝났을 거야. 치코 저 녀석도 그렇고."
"저 혼자 한 거 아니에요. 치코가 먼저 버텨줬으니까요."
노인이 허허 웃으며 치코의 어깨를 툭 쳤다.
"이 녀석, 어릴 때부터 이랬어. 동네 애들 괴롭히는 들짐승 있으면 나뭇가지 하나 들고 뛰쳐나가고. 그때나 지금이나 무기가 그대로네."
"…할아버지, 그건 좀 옛날 얘기잖아요."
치코가 괜히 딴 곳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리코는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왜 치코가 그날 도망치지 않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리코는 우연히 마을 뒤편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치코를 발견했다. 아직 제대로 힘도 못 주면서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힘들어 보이는데요."
"어,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치코가 화들짝 놀라 나뭇가지를 등 뒤로 숨겼다. 리코는 웃으며 그 옆에 다가가 앉았다.
"안 웃을 테니까 계속해 봐요."
"…안 웃는다면서 왜 웃고 있어."
그래도 치코는 다시 나뭇가지를 고쳐 잡았다. 서툰 동작이었지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나중에 진짜 강해지면 이 막대기로도 용사님만큼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지금도 저 못지않게 근성은 있잖아요."
"그건 칭찬 맞지?"
"네, 칭찬이에요."
치코가 씩 웃으며 다시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부우웅-
어둠 속으로 바람 가르는 소리가 퍼졌다.
밤이 되면 두 사람은 종종 지붕 낮은 헛간 위에 나란히 앉아 별을 봤다. 낮의 소란이 잦아든 마을은 유난히 고요했다.
"용사님은 나머지 동료들, 아직도 못 구했어?"
"네. 저 혼자 오느라 공고문도 그대로 두고 왔거든요."
"…나 때문에?"
"치코 씨 때문이 아니라, 제가 결정한 거예요."
치코가 잠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리코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치코를 돌아보았다.
"저기, 치코 씨."
"응?"
"이번엔 제가 직접 추천할게요. 같이 가요."
치코의 눈이 커졌다. 별빛 아래에서도 그게 보일 만큼.
"…뭐?"
"동료로요. 조건 없이. 제가 원해서요."
치코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이 담요 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나, 진짜 괜찮은 거지? 그때처럼 또 실력 부족하다고-"
"그건 그때 심사관님 생각이었고요."
리코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저는요. 목숨 걸고 마을 지킨 사람이 약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래도 길드에서 또 안 된다고 하면-"
"그럼 다시 심사받으면 돼요. 몇 번이든요. 그전에 치코 씨는 이미 제 동료예요."
치코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이번엔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나, 이제 진짜 나뭇가지 하나로 다니는 거다? 후회 없어?"
"네, 이제 제 첫 번째 동료잖아요."
치코가 손등으로 눈가를 슥 문지르다가 문득 자신을 감싸고 있던 담요를 내려다봤다.
"저기, 이거… 이제 돌려줘야지?"
"아니요. 치코 씨가 가지고 있어요."
"뭐? 이거 용사님 엄마가 준 거잖아."
"그래서 주는 거예요. 이번엔 치코 씨한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치코는 잠시 담요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어깨에 둘렀다. 망토처럼 자락을 뒤로 넘기고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 가슴을 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이 담요가 내 망토다! 어때, 좀 그럴듯하지?"
"…약간 커요."
"시끄러, 분위기 깨지 마!"
치코가 발끈하며 담요 자락을 펄럭이다 휘청였고, 리코가 재빨리 팔을 붙잡아 세웠다.
"거 봐요. 아직 무리하지 말라니까."
"…고마워."
작게 중얼거린 그 말에 리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며칠 뒤, 치코가 지팡이 없이도 제법 걸을 수 있게 되자 두 사람은 왕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출발 전날 밤, 마을 사람들이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몸 성히 잘 다녀와, 치코야."
"용사님도 우리 애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애 아니거든요!"
치코가 발끈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리코도 따라 웃으며 그 온기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짐 보따리마다 말린 과일과 육포를 욱여넣어 주었다.
"조심해서 가. 다치면 바로 돌아와야 한다, 알았지?"
노인이 치코의 손에 볶은 콩이 든 작은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됐고, 가다가 배고프면 먹어. 그리고—"
노인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치코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렸다.
"잘했다. 이번엔 정말."
치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 뒤에서 마을 사람들의 배웅이 이어졌다. 며칠 전 혼자 이 길을 돌아왔던 치코는 이번엔 옆에서 나란히 울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근데 용사님, 나 왕도 가면 방 같은 데서 자는 거야? 침대에서?"
"그럼요, 당연하죠."
"…좋아, 그럼 참을 만하네."
첫날 저녁, 두 사람은 길가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밤바람이 차가워지자 치코가 망토처럼 두른 담요를 슬쩍 여몄다.
"야, 이거 나 혼자 다 덮으면 용사님 추운 거 아니야?"
"괜찮아요. 가까이 앉으면 되니까요."
"…뭐야, 그거."
치코가 픽 웃으며 자리를 좁혀 앉았다.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췄다.
"저기, 나 말고 다른 동료들은 어떤 사람들일 것 같아?"
"글쎄요. 씩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치코 씨처럼요."
"…그거 은근히 부담되는 말인데."
치코가 나뭇가지 끝으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불티가 작게 튀어 올랐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는 길은 여전히 멀었지만 걸음은 전보다 가벼웠다. 어느새 둘은 서로의 걸음에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이튿날 해 질 녘, 멀리 왕도의 성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치코가 그 실루엣을 바라보며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투닥거리는 목소리가 초저녁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며칠 전만 해도 혼자 걷던 길이었다는 게 이제는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초저녁 길 위로 나란히 길어졌다. 멀리 왕도의 성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