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U4T34O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아직은 안 돼. 내 고용주의 목적은 너다. 그는 아직 묻지 못한 말도, 직접 확인해야 할 것도 남았을 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 네가 아니라, 적어도 그 사람을 위해서. ……그래, 지금은 이 이유면 충분하겠군.
@P13U4T34O ……묵은 인연이 겨우 칼끝 반 치에 매장될 만큼 경했다면 나도 편했겠지. 네가 바라는 건 죽음인가, 아니라면 내가 그예 너를 벨 수 있다는 증명인가. 하, 어느 쪽이든 탐욕스럽군. 전자는 도피고 후자는 확인이니까. 그렇게 내 손에서 결론을 받아야겠나? 네가 내게 무엇이었는지, 당장은 무엇인지,
그때마다 무엇 하나쯤은 뒤편에 유기되리라 믿었다. 오래 신은 신에서 진흙 떨어지듯, 묵은 흉터서 딱지 벗겨지듯, 지나온 세계가 제때 나를 토해내리라고. 그러나 버려지는 것은 늘 하찮은 것뿐이었다. 얼굴, 목소리, 그리고 이름……. 정작 떼어내고 싶었던 것들은 기생근처럼 발목뼈를 휘감았다.
시작이란 과거의 소거가 아니라, 관을 다른 방에 옮긴 후 장례가 끝났다고 우기는 일에 가깝다. 문을 넘을 때마다 무언가 따라오고, 따라온 것은 차츰 내 체온을 익힌 뒤 제 것이었던 것처럼 몸 안에 눌러앉는다. 그럼에도 문턱을 넘는다. 멈춰 서면 뒤따라온 것들에 묻혀 그 자리가 무덤이 될 테니까.
하나 그림자는, 기억은, 죄는. 문설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문패를 읽지 않으며, 방 하나 옮겨도 주소를 잃지 않는다. 난 수많은 경계를 지났다. 천공조차 닿지 않던 지하에서 지상으로, 궁정의 질서에서 석분 날리는 폐허로, 기사에서 유랑자로, 끝을 전제로 하던 생에서 종결 자체가 박탈된 시간으로.
그 까닭에, 맹목적인 투신의 연원을 오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달은 나를…… 진정 너의 오랜 친우라 부를 수 있을지 그 자격을 자문하게 되는군. 다만 네게 건넨 작별은 켄리아의 배신자이자 티바트의 위협인 달 사냥꾼을 향한 단죄였을 뿐, 결단코 늦어버린 회한이나 미련이 아니었으니.
@P13U4T34O 그러나 결코 가닿을 수 없는 피안의 거리. 그 경계에 멈춰 섰다.) 망설임이 있다고 했나? 그래, 굳이 부정하진 않아. 오백 년의 지독한 마모 속에서도 끝내 풍화되지 않은 알량한 회억들이, 종종 내 손아귀의 악력을 앗아가곤 하니까. 착각 마, 그건 무른 연민이나 미련 따위가 아니야.
@P13U4T34O 난 이토록 우습고도 허망하게 네 시선 끝에 붙잡힌다. 네가 내뱉은 단 한 번의 부름에 말이야. 그렇게 무거운 사슬에 얽매인 사람처럼 한참을 미동 않던 어깨가 아주 미세히 한 번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짙은 탄식을 삼키며 천천히 뒤를 향해 돌아섰다.) ……. 그래.
@P13U4T34O 내가 틈새를 헤집으며 네 족적을 좇을 때면, 넌 늘 그 노력이 우습다는 듯 아득히 먼 궤도로 날 지나쳐 가버리곤 했지. 그런데 그에 체념할 때면 도리어 우습게도 이토록 쉽게 내 시야에 얽혀드는군. (기실 운명이라 부르기엔 처참한 엇박의 농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