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폭에 묻은 달 (月染裳) — 제4부: 금단(禁丹)의 화원
천안 삼거리의 진눈깨비 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때로부터 어느덧 일 년.
전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조선 팔도였으나, 한양 운종가(雲從街) 뒤편에 자리 잡은 강정민의 대저택 안채 뜰은 마치 속세와 단절된 별천지 같았다. 만개한 도화(복사꽃) 나무 사이로 분홍빛 꽃비가 흩날렸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연못 위로는 비단잉어들이 게으르게 유영하고 있었다.
그 화려한 뜰 마당을 거니는 인영 하나.
혜수였다.
지난 일 년 동안 정민이 쏟아부은 최상급 백삼(白蔘)과 보약 덕분인지, 뼈마디가 도드라졌던 몸은 탄탄하고 유려한 선을 되찾았고, 핏기 없던 뺨에는 은은한 혈색이 돌았다.
혜수가 걸친 옷은 예전 왜성에서 입었던 낯선 기모노도, 한산도 탐망대의 뻣뻣한 무복도 아니었다. 정민이 개성 상인을 통해 직조해 온 최상급 분홍빛 명주로 지은 남기(男妓)의 도포였다.
사내의 훤칠한 어깨와 곧은 등줄기를 단정하게 감싸면서도, 바람이 불 때마다 치맛자락처럼 살랑이며 흩날리는 옷깃이 묘하게 관능적인 태를 풍겼다. 상투관 대신 분홍빛 댕기로 가볍게 묶어 내린 칠흑 같은 흑발이 뺨을 스쳤다.
혜수의 발걸음이 정원 한가운데 놓인 정자 근처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흑단으로 짠 긴 평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장부(帳簿)를 넘기며 차를 음미하고 있던 스물한 살의 젊은 거상, 강정민이 있었다.
“바람이 아직 쌀쌀한데, 밖으로 나왔느냐.”
정민이 시선을 들어 혜수를 바라보았다.
일 년 전, 눈밭에 버려진 한 줌의 시체 같던 혜수를 거두었을 때 정민의 눈빛에 어렸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과 장사꾼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일 년 동안 제 곁에서 상흔을 지워내며 꽃처럼 피어나는 이 사내를 지켜보는 사이, 정민의 서늘한 눈동자 밑바닥에는 기묘한 소유욕과 갈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혜수는 예를 갖추어 옷자락을 가지런히 모으고 정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려하게 꺾이는 목덜미와 쇄골 사이로 분홍빛 옷깃이 살짝 벌어졌고, 그 틈으로 옅어졌으나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옛 왜검의 흉터들이 은밀하게 엿보였다.
“대행수 나으리.”
혜수의 목소리는 맑고 나지막했다.
“오늘로 꼭 일 년이 되는 날입니다. 천안의 차디찬 눈밭에서 숨이 끊어져 가던 미천한 목숨을 거두어 주시고, 이름 모를 유민에 불과했던 저를 이리 극진히 보살펴 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혜수의 깊고 처연한 눈동자가 정민을 향했다.
정민은 손에 쥐고 있던 장부를 탁자에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각거리는 비단신 소리와 함께 정민이 혜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혜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정민의 건장한 체구가 혜수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혜라.”
정민의 입꼬리가 짓궂고도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정민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혜수의 분홍빛 겉옷깃을 가볍게 쥐어 제 쪽으로 당겼다. 손끝이 혜수의 가슴팍 상처 위를 옷감 너머로 묵직하게 훑고 지나갔다.
“장사치는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는 법이다, 혜수야.”
정민의 숨결이 혜수의 귓바퀴를 스치며 낮게 내려앉았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쏟아부은 은화가 천 냥이 넘고, 네 몸의 상흔을 덮기 위해 들인 명약이 수십 첩이다. 고작 말 한마디의 감사 따위로 털어낼 수 있는 빚이 아니지.”
정민의 다른 한 손이 혜수의 턱을 가볍게 쥐어 올려 제 눈을 똑바로 마주치게 했다.
“너는 내 화원에 핀 가장 값비싸고 요사스러운 꽃이다. 그러니…… 갚아야 할 때가 오면, 네가 가진 가장 귀한 것으로 갚거라.”
정민의 눈빛은 한산도에서 도현이 보냈던 피비린내 나는 연정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도성을 은화로 뒤흔드는 거상 특유의 오만하고도 집요한 ‘소유욕’이었다.
혜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소맷자락 깊은 안쪽, 여전히 제 살갗에 닿아 있는 도현의 낡은 백색 노리개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면서도, 혜수는 이 거상의 손아귀 안에서 또 한 번 살아남기 위한 미소를 가늘게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