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성향은 이반이지만, 일반으로 산다 I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귀를 활짝 열고.
온 마음을 다해도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특히 성향자들은
온라인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만난다.
그래서 오해는 더 쉬워지고,
확신은 더 빠르게 만들어진다.
그러니
뜨인 눈조차 의심해야 하고,
열린 귀조차 의심해야 한다.
우리의 성향이 이반일 뿐,
우리의 일상까지 이반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관계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늘 ‘일반’이 아닌 ‘이반’이 호출된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현실에서
이반이 개입될 확률은
생각보다 훨씬 낮다.
그러니
조금 더 천천히 보고,
조금 더 늦게 믿어도 된다.
상대의 거짓이
항상 악의에서 비롯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의 속임이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대가는 결국
당신이 치르게 된다.
마음이 먼저 앞서면
눈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귀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 순간
우리는 리플리들에게
가장 다루기 쉬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남는 건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와
악어 같은 눈물,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설명되지 않은 상처 하나뿐이다.
I 야해지고 싶지, 책임지고 싶진 않지 I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이 찾아온다는 말을
나는 이제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건 대개
아무나 안고 싶다는 사람들의 변명이다.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성향자가 되면 아무나를 들이지 않게 된다고.
지배든 복종이든
관계는 역할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
말의 수위가 아니라 선의 위치에서 결정된다.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를 책임질 수 없고,
자기 욕망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통제를 말할 자격도 없다.
BDSM은
착한 사람이 하는 놀이가 아니다.
욕망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도,
욕망을 포장하는 사람도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
지배를 말하면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
복종을 말하면서 눈빛 하나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
다들
야한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야해지는 책임은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좋은 성향자가 된다는 건 부드러워지는 일이 아니다.
기준이 분명해지는 일이다.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어디서 멈출 수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은 줄어든다.
침대에 앉히기도 전에 말에서 걸러진다.
남는 건
손이 떨리는 순간을 아는 사람,
숨이 흐트러질 때 선을 넘지 않는 사람.
좋은 상대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걸러지고 남는다.
그리고 보통
그건 가장 야한 형태의 절제다.
그게 내가 이해한
BDSM에서의
“좋은 성향자가 되면”이라는 말이다.
I 익명인 듯, 아닌 듯 I
길을 잃었다.
부족한 내 탓이다.
마음을 숨기는 것도,
마음을 꺼내는 것도
여전히 서툴고 어렵다.
나이를 먹으며
내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읽게 된다.
이해는 늘었고 눈치는 습관이 됐다.
어린 나는 더 편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진 않았다.
익명은 누군가에겐 놀이터지만
내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공간이 됐다.
누가 읽을지,
어떻게 읽을지,
어디까지 오해할지.
익명인 듯, 아닌 듯.
이곳에서의 ‘제로’는
자유롭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춘다.
좋은 사람인 척.
좋은 성향자인 척.
짧게 던진 생각들이
기준이 되어 돌아온다.
“넌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무언의 요구처럼.
아직도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아이인가 보다.
아직 멀었다.
좋은 사람도,
좋은 성향자도.
내겐 아직, 많이 멀다.
내게도 편히 물을 수 있는 Ask가 있다면
한번쯤 꺼내 묻고 싶은 궁금함.
01.
몇년을 넘게 만난 상대와 헤어지고,
불과 몇주 만에 다른 사람과 DS를 맺는다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02.
그리고
그 이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나와 DS를 맺자”고 말하는 건
어떤 상태의 마음에서 가능한 일일까.
비난도, 비판도 아닌
그저 순수한 나의 궁금함.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빠르게 정리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런 전환이 가능한 사람들이 따로 있는 건지.
또 그게 아니면
이런 일들이 가능한 세상에서
나만 유독 느리고, 무거웠던 것인지.
모두에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이런 것만은 끝내 불가능했던 사람이
나였던 걸까.
I 그래, 속도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I
마스터를 흉내 내는 것쯤은 쉽지만,
지배는 쉽지 않다.
말 몇 마디, 시선 하나, 달콤한 행동 하나로
서로의 인생을 걸 듯 달려드는 관계를 볼 때마다
나는 오히려 멈춰 서게 된다.
그게 쉬워 보인다면,
아마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아니,
나만 어려운건가.
내가 뭐라고 말이다.
혼자서 이렇게까지 신중한 척을 하는 건가.
욕망보다 책임이 먼저 움직이는 자리다.
상처받을 나보다
상처받을 상대를 먼저 계산하는 순간부터
선택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 느림을
우유부단이라 부르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 부르고,
때로는 비겁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진짜 위험한 건
신중함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는 결단이라는 걸.
누구보다 나이스할 수 있지만,
또 누구보다 개새끼일 수도 있겠지.
누군가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 무릎이 왜 꿇려졌는지까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밤이 길어진다.
침대에 누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새벽을 밀어 올린다.
가보자고 했다가,
아니라고 멈추고,
이건 아니지 싶다가도
그것도 아니라고 되뇌인다.
내 마음의 외침들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그 소란은 여전히 소음이 된다.
나는 아직도 복잡하다.
그건 아직도
누군가의 중심을 쥘 준비를
대충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마스터는
결정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의 무게를 끝까지 안고 가는 사람이다.
조금 소란스러워도 된다.
그 소음 속에서
나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내가 함부로 손을 뻗지 않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상대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또 진심으로
나 역시 행복했으면 좋겠다.
I 허전함의 자리 I
어느 곳보다 마음 편했던 이곳이,
어느 순간부터는 가장 복잡한 곳이 되었다.
잊으려고 찾았고,
잊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혼란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자꾸 들여다보다 보면
또다시 찾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겠지.
이 혼란과 복잡함이 언제까지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올해는 더더욱 그랬다.
그저 갑작스럽게 선택한 이곳에서
또다시,
나도 모를 빈 허전함이 생겼을 뿐이다.
그러니, 괜찮다.
그러니 그냥, 또 그렇게 괜찮으면 되는 거다.
허전함은
외로움보다,
상처보다,
그리움보다
항상 한 발짝 더 안쪽에 남아 있는 감정이라는 걸
나는 매번 뒤늦게 깨닫는다.
결국 나는 아직도 하나도 온전하지 못하다.
I 결정하는 자, 따르는 자 I
슬레이브는 마스터의 명령을 기다린다.
자신의 숨과 시선, 무릎의 위치까지
정해진다는 사실은 불안보다 큰 쾌감이다.
마스터는 슬레이브의 지지를 원한다.
복종으로 돌아오는 눈빛 하나가
자신의 지배를 현실로 굳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DS는 결국,
누가 정하고, 누가 따른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를 잊지 않을 때 단단해진다.
단순한 역할놀이가 아니다.
결정과 지지의 균형 위에서 굴러간다.
마스터는 결정으로 관계를 붙잡고,
슬레이브는 지지로 관계를 안정시킨다.
마스터는 방향을 제시하고,
슬레이브는 그 방향에 마음을 얹는다.
두 역할이 정확히 고정될 때,
DS는 더 깊고 음란한 결로 굴러간다.
숨, 시선, 복종의 속도까지
모두 마스터의 손 안에서 움직인다.
이 두 역할이 선명할 때
DS는 비로소 제 자리에서 움직인다.
아주 단순한 이 원리가
DS를 DS답게 만든다.
I 끼어들기의 과잉 I
온라인이라는 공간에는
자기 인생은 하나도 못 챙기면서
남의 일엔 귀신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꼭 있다.
기회라도 난 듯 소란을 보탠다.
쉽게 적은 한두 줄로 사람의 마음을 찢어 데 주저함이 없다.
남의 상처 위에 새치혀 하나 올려놓는 일을
자기 표현이라고 착각한다.
정작 그게 본인의 결핍인지도 모른 채
누군가의 서사 위에 자기 불편함을 던질 뿐이다.
상처를 크게 만드는 건 늘 주변에서 끼어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불필요한 소음에 마음을 너무 쓰지 않아도 괜찮다.
흔들린 건 감정이 아니라,
소란을 만든 사람들의 가벼움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저 “과했던 목소리들이었지” 정도로만 남는다.
익명 뒤에 숨어 잠깐 열등을 풀어놓은 것뿐이다.
우뚝 선 곧은 넌,
그저 스스로의 길을 다시 걷기만 하면 된다.
예전의 속도로 걷든, 조금 느린 걸음으로 돌아오든,
어느 쪽도 잘못이 아니다.
오지랖과 열등으로 “반응“을 먹고 사는 병자들에게
가장 통쾌한 복수는 무시다.
발단도, 책임도 본인 것이 아닐 때가 있다.
그저 이곳에서 종종 벌어지는
‘끼어들기의 과잉’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것뿐이다.
그러니 흔들릴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
그게 지금 가장 단단한 선택이다.
필요하다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이미 있다.
I 메인터넌스와 엉덩이 I
메인터넌스는 주기적으로 엉덩이 몇 대 때려놓고
“됐지?” 하는 방식이 아니다.
서브가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게 만드는 일상 전체가
메인터넌스다.
관계가 오래 가는 건 주기적인 체벌이 아니라
서브가 자기 역할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구조에 있다.
서브는 자극을 기억하는 게 아니다.
명령이 떨어졌던 순간,
허락을 구하던 습관,
보고가 당연해지는 흐름.
이런 일상들이 서브를 제자리로 고정시킨다.
스팽은 그냥 소음이다.
아프고 지나가면 끝이다.
하지만 위치를 잊지 않게 하는 일상은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든다.
진짜 메인터넌스가 작동하는 관계는
서브가 위로 올라오지 않고, 돔이 내려가지 않는다.
서로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고 흐트러지지 않는다.
돔이 해야 하는 건 서브를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브가 “나는 여기” 라는 걸
매일 스스로 확인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걸 잃는 순간 관계는 무너진다.
그깟 엉덩이 몇 대 후려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브가 설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인터넌스는 그저 때리는 게 아니다.
서브의 일상이 돔에게 맞춰 돌아가는 구조 자체다.
스팽 없이도 유지된다면 그게 진짜고,
스팽 없으면 무너지는 관계는 애초에 구조가 없었던 거다.
메인터넌스는 한 번의 강한 체벌이 아니라
매일의 조용한 통제다.
그게 없는 관계는 조금만 건드려도 금이 간다.
I 결국 끼리끼리 논다 I
이 씬에 오래 있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결국 자기 수준이 닿는 사람끼리 모인다.
말만 화려한 마스터는 금세 드러난다.
단어는 거창하고, 규율처럼 꾸며놓지만
막상 실상은 헐겁고, 책임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 곁에는 꼭
그걸 “진짜 마스터”라고 부르는 섭이 붙는다.
그 둘은 서로를 정확히 비춘다.
허세는 허세를 알아보고,
공허는 공허와 편하게 맞물린다.
리드를 모르는 돔는
리드를 모르는 섭을 곁에 두는 게 편하고,
검증을 두려워하는 섭은
검증하지 않아도 되는 돔을 편하게 여긴다.
서로의 허점을 덮어주는 묘한 합의가 만들어진다.
그들을 잇는 것 성향이 아니라 결핍이다.
그 결핍이 서로를 안전하게 속여주고,
그 안에서는 환상도 불편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만들어주니까.
그들이 나쁜 건 아니다.
그냥 그걸 SM이라고 부르기엔 곤란할 뿐이다.
허세와 환상이 합쳐진다고 해서 관계가 되는 건 아니다.
욕망의 ‘질’이 비슷한 사람끼리 붙는다.
그걸 우리는 ‘끼리끼리’라고 부른다.
허세로 포장한 돔 옆엔
그 허세를 진짜라 믿고 싶어 하는 섭이 붙고,
책임이 싫은 돔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섭을 택한다.
검증이 두려운 섭은 검증할 능력 없는 돔를 찬양한다.
둘은 편한 환상을 택한다.
그게 서로 잘 맞는다.
그래서 그들은 “끼리끼리” 논다.
SM이라고 부르는 건 자유다.
하지만 그게 관계는 아니다.
그냥, “끼리끼리”일 뿐이다.
I 손톱, 그리고 버릇 I
아주 짧게 자른 손톱을 유난히 싫어하다보니
이틀에 한 번은 손톱을 자른다.
근데 어느 날 문득,
길게 자란 손톱을 보고
“아, 나 이제 혼자구나.”를 떠올렸다.
늘 그렇다.
누군가 내 옆에 자리 잡으면,
저녁마다 자연스럽게 손톱을 본다.
혹시 길지는 않을까, 행여 날카롭지는 않을까.
내 아이의 소중한 부분이 다칠까 봐,
내 아의가 입에 넣을 때 혹여 긁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누군가 내 옆에 자리 잡으면,
저녁마다 샤워 시간이 길어진다.
스크럽을 하고, 발의 각질을 벅벅 밀어대고,
손가락, 발가락에 삐죽 나온 털도 슥 잘라낸다.
혼자일 땐 유난스럽게 신경쓰지 않던 것들인데,
내 옆에 누군가 자리 잡았단 이유 하나만으로
나도 모르는 버릇이 되어버린다.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는 모르겠다.
혼자일 때는 신경도 안 쓰면서,
버릇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인데도.
누군가 곁에 생기면,
달나비가 살갗에 내려앉는 것처럼
작은 기척 하나에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내 옆에 있으면
거짓말처럼 손이 먼저 간다.
손톱을 보고, 각질을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게 있나 살핀다.
내 손톱 하나에도 내 아이가 덜 다쳤으면,
입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작은 각질 하나 스치지 않게.
능숙하게 플을 하는 것이 별게 아니다.
기본을 챙기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I 오늘 전기플(?)을 당했습니다 I
피부과에 쥐젖 하나 빼러 갔다.
정말 조그맣게 올라온 그거 하나.
하지만 오늘의 내 귀는 왠일로 팔랑거렸고,
젊은 의사의 말은 달콤했고, 손은 유난히 야무졌다.
한동안 외부 미팅이 없다는 핑계까지 절묘하게 보태서
결국 얼굴 전체를 레이저로 지져버렸다.
레이저가 피부를 스칠 때마다
내 안의 성향모드가 스위치를 켠 듯 켜졌다.
“아, 섭들이 전기플(?) 할 때 이런 느낌이려나.”
아프고, 뜨겁고, 또 묘한 쾌감이 뒤따라온다.
안쓰러움과 욕구가 교차하는 그 짧은 찰나.
“역시 난 변태구나.” 하는 자조까지 자연스럽게 붙는다.
치료가 끝나고 애프터케어가 거의 한 시간.
각종 진정 케어와 마사지, 팩까지.
몸도 가라앉고, 마음도 가라앉는 시간.
그래.
디엣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거다.
때리는 게 아니라, 보듬는 시간.
고통은 금방 지나가지만 케어는 오래 남는다.
그 차이가 관계를 살린다.
성향도 같다.
어떤 디엣이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때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몸과 마음을 다시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애프터가 빠지면 그건 올바른 나우"가 될 수 없다.
그저 사고일 뿐 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성향에 절여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나보다.
뜬금없이 피부과에서 성향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