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의 이유가 길어질수록 내 목소리는 작아졌고 상대는 그 말의 틈새를 파고들어 다시 말을 얹으며 나를 흔들었다. 설명이 부족해서 거절이 실패한다고 믿었던 긴 시간의 끝에서 나는 이제야 겨우 깨닫는다. 거절은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https://t.co/0Eg9zG8WUC
주님!
이번 항해는 참 힘들고 길었습니다.
태풍은 성난 듯 사납고
파도는 삼킬 듯 무서웠습니다.
거친 바다
한 가운데, 쉴 곳 없는 나그네에게
근심의 물결이 숨차게 몰려왔습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붙들고
주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주님은
의지 없는 저에게
믿음을 주셨고
어둔 영혼에 빛을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손으로
주의 뜻을 붙잡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찬송하는 발길로
주의 길을 걷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천국 포구로 나아 갈 때
풍랑 인연하여, 더 빨리
순풍 인연하여, 속히 나왔습니다.
주님!
이제 마지막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닻을 내리고 쉬려합니다.
이제 저의 모든 기도와
간구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소원의 항구에 소망의 항구에
이렇게 닻을 내리게 되었으니까요.
주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사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되며
더 이상 애타하지 않아도 되는
소망 동산이 좋습니다.
주의 동산이 좋습니다.
소망의 항구가 좋습니다.
이제
닻을 내립니다.
마지막 항구에 이르렀으니
주께서 깨워 주실 때까지 평안히
쉬겠습니다.
마음을 다 풀어놓고
깊은 잠을 자겠습니다.
이곳까지 인도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사람은 위기 앞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보다 익숙한 길로 되돌아가곤 한다. 학교 시험에서 난생처음 등수 하락을 맞닥뜨렸을 때, 더 효율적인 공부법을 고민하기보다 굳이 잠을 줄여가며 밤을 새우던 학창 시절의 우리처럼 말이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 먼저 다가가 사과하는 대신 며칠 동안 입을 꾹 닫아 회피했던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위태로운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침묵의 방식을 고수하려 든다.
이는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끊임없이 안내해도 익숙한 길만 고집하는 운전자와 같다. 더 멀고 교통 체증이 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원래 가던 길로 핸들을 꺾는 것이다. 우리 일상 속에도 이와 닮은꼴이 있다. 우리가 매일 쓰는 컴퓨터 자판이다. 글자 입력 효율이 높고 오타가 적은 세벌식 자판이 이미 개발되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굳이 새로운 배열을 익히는 대신 기왕에 손에 익은 두벌식 자판을 국가 표준으로 지정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처럼 10대 시절에 굳어져 버린 오래된 자판 배열 같은 경로가 존재한다. 완벽한 발표에 대한 불안감으로 결국 보건실로 도망쳐버리던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중요한 조별 발표를 앞두고 연락을 끊는 회피형 인간이 된다. 단짝 친구의 관계에 질투를 느껴 말없이 메신저 프로필을 차단하던 아이는 직장에서 서운한 일이 생기면 대화로 푸는 대신 침묵 속에서 눈치만 주는 수동적 공격성을 취한다. 친구들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어차피 저 무리는 나랑 안 맞아”라며 교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냉소하던 버릇도 마찬가지다.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몸에 익힌 생각들이 있다. 먼저 고개를 숙이면 만만해 보여서, 어차피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서 등등 같은 감정의 경직성은 과거 학창 시절의 낡은 방어기제를 당연시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만든 닫힌 교실 벽만 바라보느라, 그 담장 너머에 더 열린 세상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셈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공간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학창 시절의 기억이 불러온 해묵은 불안으로 마음이 경직되는 날이면, 일부러 일상의 모든 감각을 낯설게 재배치했다. 우선 늘 걷던 길의 반대편 보도로 발걸음을 옮기거나 한 블록 뒤의 생소한 골목길로 돌아 걸었고, 매일 무심코 지나치던 간판의 글자를 거꾸로 읽었다. 이어폰으로는 뜻을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이국적인 낯선 외국어 라디오 방송을 틀어 의미 없는 단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카페에 앉아 평소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이름 모를 차를 시켜 놓고 얼음이 혀끝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는 온도의 변화에 집중했다.
의도적으로 낯선 풍경을 시선에 담고, 해석이 불가능한 자극에 뇌를 노출하며, 미각의 해상도를 높이는 동안 무의식의 궤도를 따라 관성적으로 흘러가던 10대 시절의 감정적 습관에 제동이 걸린다. 오감을 다르게 깨우는 행위가 훌륭한 움직이는 명상이 될 수 있듯, 굳어 있던 감각을 새롭게 쓰는 것 자체가 마음의 요가가 되고 명상이 된다. 이 작고 낯선 서툶들이 교실에서부터 고착된 반응 패턴을 깨뜨리고 더 넓은 시각을 열어젖힌다.
성적표를 받고 화가 날 때마다 제자리에 앉아 손톱을 뜯던 아이가 교정 밖으로 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친구의 말 한마디에 슬퍼져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던 아이가 매점으로 걸어가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방법이다. 몸도 마음도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학창 시절의 그 교실에 멈춰 있지 않고 끝없이 변한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과거의 익숙한 상처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반응을 새롭게 선택하는 것뿐이다. 익숙한 오감의 방향을 잠시 내려놓는 작은 시도만으로도 우리의 삶에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소중한 공간이 열리기 시작한다.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었다
그만. 나뭇잎이 나지막이 외쳤다.
나를 믿어.
밤엔 느낄 수 없는 걸 느끼게 해줄게.
햇빛의 속삭임.
이제 진짜 그만 더는 위험해.
나뭇잎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한다.
뭐가 그만이야?
벌써 너의 엽록체는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데.
광합성, 광합성으로 가버렸!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었다. 그만. 나뭇잎이 나지막이 외쳤다. 나를 믿어 밤엔 느낄 수 없는 걸 느끼게 해줄게. 햇빛의 속삭임. 이제 진짜 그만 더는 위험해. 나뭇잎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한다. 뭐가 그만이야? 벌써 너의 엽록체는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데. 광합성, 광합성으로 가버렸!
사토라레, 참 기묘한 운명을 타고났다. 자신의 모든 속마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스피커처럼 생중계된다. 정작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들으며 당황하면서도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모른 척 연기해 준다. 심지어 국가 차원의 특별관리위원회가 조직되어 그의 일상을 비밀리에 보호하기도 한다. 황당한 판타지 같지만 문득 거울을 보거나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 서 있을 때 엄습하는 기분이 있다. 어쩌면 우리도 나만 모르는 사토라레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우리는 완벽한 비밀의 방을 마음속에 품고 산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의 주파수는 생각보다 자주 흘러나간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우리는 모두 서툰 사토라레였다. 교실에서 남몰래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나만 빼고 온 반 아이들이 그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앞을 지나갈 때마다 억지로 밀어 올린 입꼬리와 미세하게 떨리던 눈빛이 내 마음을 생중계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망치고 속상해서 책상에 엎드려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들어도 붉어진 눈시울과 굳어버린 손끝의 움직임은 내 슬픔을 실시간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스마트폰 속 세상으로 넘어가면 내 마음은 더 노골적으로 중계된다. 요즘에는 알고리즘이 현실판 특별관리위원회 역할을 한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고민이나 최근에 부쩍 커진 관심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피드에 추천 영상으로 뜬다. 우리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검색창에 끄적인 단어들과 무의식적으로 머물렀던 흔적들이 온라인 공간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긴 탓이다. 화면을 볼 때마다 내 머릿속을 들킨 것 같아 소름이 돋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완벽히 숨겼다고 믿지만 디지털 세상은 이미 다 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이 부서지지 않고 안전한 이유는 우리 주위에 다정한 특별관리위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툰 진심을 들켰을 때 슬쩍 시선을 돌려주는 친구의 배려가 대표적이다. 학창 시절 시험을 치르고 울적해하는 나를 보고도 왜 그러냐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던 짝꿍의 침묵도 그렇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매점에 뛰어가 초코우유 하나를 내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가던 다정한 친구들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기꺼이 눈감아주는 현실판 사토라레 보호법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의 파편들이 세상에 퍼져나가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서툰 속마음을 눈치껏 읽어낸다. 그리고 다시 눈치껏 그 마음을 덮어주며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서로를 모른 척 안아주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평온하게 살아가는 다정한 사토라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