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금 김)
첫째. 내가 "뭘 모르는 지 모르는 상태"에서 "뭘 모르는 지 아는 상태"로
둘째. 그리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상태"가 매핑 되었을 때 시작 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미니멀리스트는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빼려면 먼저 뭐가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처음에는 뭐가 있는지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빼기의 전제는 전체 지형의 파악입니다. 지도가 없으면 편집이 불가능합니다.
이걸 정리하면 사분면이 나옵니다. 원래 인식론에서 쓰는 프레임인데, 취향에 그대로 적용해보려고 합니다.
1사분면. 내가 아는 것을 안다 (Known Knowns)"나는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이미 경험했고, 이미 판단이 끝난 영역이죠? 이것이 현재의 취향입니다.
2사분면.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 (Known Unknowns)"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아직 안 마셔봤는데, 산미 계열이라 좋아할 것 같다." 아직 경험하지 않았지만 지도 위에 위치는 알고 있는 영역이죠. 탐색이 가능합니다.
3사분면.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 (Unknown Unknowns)"게이샤 품종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지도에 없는 영역입니다. 여기서는 빼기는커녕 더하기조차 불가능합니다. 선택지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4사분면. 내가 아는 것을 모른다 (Unknown Knowns)"사실 나는 묵직한 바디감을 싫어하는데, 그걸 아직 언어화하지 못했다." 경험은 했지만 아직 패턴으로 인식하지 못한 영역입니다. 감각은 있는데 기준이 없는 상태입니다.
취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3사분면에서 시작해서 1사분면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뭘 모르는지 아는 상태"로, 그리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상태"로. 이 매핑이 완료되어야 비로소 편집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미니멀리스트는 불가능한 겁니다. 3사분면이 거대한 상태에서 빼기를 하면, 그건 취향이 아니라 무지입니다. "나는 이 세 가지만 좋아해"가 아니라 "나는 이 세 가지밖에 몰라"가 되는 거죠.
대부분 사람들이 잘난척하다가 망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버블은 가격이 아니라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실러는 '비이성적 과열', '네러티브 경제학' 책에서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한다.
"시장은 정보에만 반응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이야기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장 크게 키우는 건
언제나 미디어다.
실러가 본 핵심은 단순하다.
언론은 사건만 전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현실을 어떤 틀로 이해할지까지 정해준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무엇이 새로운 시대인지.
즉 미디어는 사실을 전하는 동시에
대중의 사고방식 자체를 프레이밍 하는것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시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격이 왜 오르는지.. 스스로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쉽게 접하는 이야기,
가장 권위 있어 보이는 설명,
가장 많이 반복되는 프레임에 기대어 생각한다.
그 점에서 최근 WSJ의 Zcash 기사는 의미가 크다.
“Crypto Die-Hards Think They’ve Found the Next Bitcoin”
https://t.co/XZloy77X5B
“It’s a More Secret Version of Bitcoin and It’s on a Tear”
https://t.co/tUbTbiDsBG
겉으로는 그냥 기사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보면 다르다.
이건
“Zcash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가”
에 대한 초기 프레임이 되는 것이다.
특히 “Next Bitcoin”이라는 표현은 강하다.
이건 단순 비교가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초기 참여.
역사적 기회.
희소성.
체제 밖 자산.
인생을 바꾸는 투자.
남보다 먼저 봤다는 우월감.
기사 하나가 정보 전달을 넘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한 방향으로 줄세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처음엔 다들 반신반의한다.
“기사 하나 나온 거 아냐?”
“또 과장 아닌가?”
그런데 가격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가격이 오른 다음에야 그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가격이 먼저 움직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뒤늦게 설명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 가장 먼저 붙잡는 게 미디어다.
유튜브.
트위터.
뉴스.
텔레그램.
인플루언서.
이 경로를 벗어날 수가 없다.
즉 가격 상승은 사람을 탐색 상태로 만들고
미디어는 그 탐색 방향을 결정한다.
바로 여기서 사고의 lock-in이 생긴다.
“아, 이게 다음 비트코인인가?”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다.
그런데 가격이 몇 번 더 뛰면
사람들은 그 프레임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투자는 더 이상 투자가 아니다.
정체성이 된다.
'나는 초기 기회를 보는 사람이다.'
'나는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남보다 먼저 본 사람이다.'
'나는 프라이버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이 단계부터 사람은 정보를 소비하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을 방어한다.
그래서 반대 의견은
단순한 반론이 아니라
나 자신을 공격하는 말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시장은 종교가 된다.
흥미로운 건
대부분의 버블이 거짓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진실이 아니다.
문제는
그 진실 위에 욕망과 정체성이 쌓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특히 크립토는
기술 시장이면서 동시에 철학 시장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코인을 사는 게 아니다.
자유를 사고,
반체제를 사고,
미래를 사고,
우월감을 사고,
소속감을 산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커뮤니티는 종교화된다.
그리고 종교의 핵심은 늘 같다.
믿는 사람은 전도한다.
버블은 바로 그 전도 메커니즘으로 커진다.
초기 참여자는 돈을 번다.
수익은 확신을 만든다.
확신은 정체성을 만든다.
정체성은 전도를 만든다.
그리고 미디어는
계속 새로운 신자를 공급한다.
WSJ 같은 메이저 미디어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이야기를
권위 있는 매체를 통해 정당화받고 싶어 한다.
즉 이런 기사는 단순 클릭 장사가 아니다.
이건
“이 프레임을 믿어도 된다”
는 사회적 허가다.
시장 후반부로 갈수록
사람들은 기술보다
누가 말하는지,
얼마나 반복되는지,
얼마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지를 더 중시한다.
그래서 버블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분석보다 밈이 강해지고,
논리보다 정체성이 강해진다.
실러가 중요하게 본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버블은 단순한 가격 급등이 아니다.
버블은
하나의 이야기가 사회 전체를 잠식하는 현상이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는
이야기를 고르고,
감정을 증폭하고,
현실을 프레이밍하고,
군중의 사고 방향을 맞춘다.
특히 크립토에서
“Next Bitcoin”이라는 구호는 강력하다.
그건 단순한 투자 기회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놓치면 안 되는 역사적 순간”
이라는 감정을 건드린다.
인간은 숫자보다 서사에 약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서사에 설득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른다.
마지막 역설은 이거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자기가 독립적으로 생각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이렇게 움직인다.
가격이 먼저 움직이고,
미디어가 이유를 설명하고,
사람들은 그 설명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결국 그 서사를 다시 퍼뜨리는 존재가 된다.
즉 버블은 돈만으로 커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정체성이
서로를 설득하면서 커진다.
그리고 시장이 가장 뜨거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같다.
모두가 말하기 시작할 때다.
“이번엔 진짜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성 육성에 대한 에세이. <월 스트리트 저널>에 미 공화당 전 상원의원이 기고한 글이다. 인공지능의 파괴적 힘에 대응하여 인간만이 가능한 것을 지키고 가꾸자는 익숙한 논지의 글이지만 일독의 가치가 있다.
이 글에서 주장한 핵심 대응 전략은 ‘습관’(habits), ‘공동체’(community), ‘장소’(place)의 부활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 길러주기(여행, 독서, 다세대 공동체 생활, 힘든 노동, 테크 안식일 등)로 돌파해보자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답게 가족의 새로운 기능과 가치를 강조한 것.
이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사랑은 로컬이다’(Loves are local)이란 말. 사랑과 돌봄과 인격 형성은 디지털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너머의 ‘지역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뜻.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말을 나누며 살아가는 세계에서만이 ‘인간성’을 지키고 가꾸어갈 수 있다는 것.
그래, 사랑은 언제나 로컬이고, 피지컬이며, 오프라인이다.
피라미드형
모든 것은 평등하게 퍼지지 않는다.
흐름이 생기면, 반드시 중심이 생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정보와 영향력은 연결될수록 증폭된다.
이때 구조는 자연스럽게 위로 쏠린다.
그래서 피라미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소수가 위에 서는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것을 연결하고,
많은 것을 통제할수록
더 많은 것이 그쪽으로 모인다.
이건 음모론이 아니라
집중의 법칙이다.
대다수는 분산되어 있고,
소수는 연결되어 있다.
분산된 힘은 약하고,
집중된 힘은 방향을 만든다.
그래서 언제나
구조는 위로 좁아진다.
이 패턴은 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별은 중심으로 모여 은하를 만들고,
물질은 중력에 의해 뭉친다.
자연 자체가
이미 집중되는 구조를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