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to releasing the cyber threat intelligence report, 'Operation MIDAS' based on this information.
This report describes the TAs, infrastructure, and schemes involved in the largest fake trading system scam campaign currently taking place in S.Korea.
https://t.co/vffgwE9cxJ
전광판의 숫자가 화려하게 명멸한다. 코스피 9000. 이 경이롭고 웅장한 지수 앞에서 이재명과 좌파 권력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신들의 경제적 치적이라 포장하기 바쁘다. 그러나 그 눈부신 숫자의 껍데기를 건조하게 쪼개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대한민국 경제의 서늘하고 참혹한 시체가 웅크리고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다루는 자들은 기만술의 천재들이다. 코스피 상승을 이끈 것은 오직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단 두 개의 거인뿐이다. 지수가 9000을 목전에 둔 폭등장 속에서도 무려 589개의 종목이 하락했다. 상승 종목은 그 절반인 291개에 불과했다. 이것은 국가 경제의 성장이 아니다. 글로벌 AI 열풍이라는 외부의 거대한 해일 위에 올라탄 두 반도체 기업이, 뇌사 상태에 빠진 대한민국 경제 전체의 멱살을 틀어쥐고 간신히 매달려 있는 아슬아슬한 구조 현장이다.
좌파들이 틈만 나면 개혁과 해체, 적폐 청산을 외치며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던 그 반도체 재벌 대기업들이, 역설적이게도 이재명 체제의 경제 성적표를 분식(粉飾)해 주는 유일한 산소호흡기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산업과 평범한 국민의 일상은 어떠한가.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에너지 정책과 반시장적 노동 규제로 인해 제조업과 내수 서비스업은 완전히 질식했다. 뉴욕타임스가 정확히 짚어낸 이른바 'K자형 양극화'. 극소수의 첨단 산업만 하늘로 치솟고, 나머지 99%의 실물 경제와 평범한 노동자들은 심해로 곤두박질치는 끔찍한 절망의 생태계다.
가장 서늘한 비극은 이 파산한 경제 구조가 청년들의 영혼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30 세대의 뇌수를 잠식한 거대한 포모(소외 불안) 증후군을 보라. 물가는 폭주하고 자산 격차는 은하수처럼 벌어지는데, 월급을 모아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바보들의 동화가 되어버렸다. 청년들은 노동의 가치를 조롱하며 영끌과 빚투로 주식 호가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국가가 땀 흘려 일하는 자들의 내일을 지켜주지 못하고, "노동이 무슨 소용이냐"는 절망감만 펌프질하는 사회. 자산 형성의 사다리를 모조리 걷어차 놓고, 전 국민을 도박꾼 아니면 배급표를 기다리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이재명식 포퓰리즘이 완성해 낸 '투기 공화국'의 민낯이다.
구체적인 숫자로 장부를 까보자. 지난 5월과 6월, 단 두 달 동안에만 매매를 강제 정지시키는 사이드카가 무려 28차례나 터졌다. 5월에 6번 울리더니, 6월에는 아예 거의 매일같이 사이렌이 울려 퍼진 셈이다. 시장 전체의 전원을 강제로 뽑아버리는 서킷브레이커 역시 6월 8일과 23일, 연달아 두 번이나 발동됐다. 특히 23일엔 하루 만에 코스피 지수가 910포인트, 10% 가까이 증발하며 증시가 완벽한 셧다운을 맞았다. 여기에 매일같이 수십, 수백 개의 종목이 상하 30% 가격제한폭의 천장과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옴짝달싹 못 하며 비명을 지르는 엽기적인 발작이 숨 쉬듯 반복되고 있다.
이 차가운 팩트가 증명하는 본질은 명확하다. 지금의 코스피는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의 정상적인 자본 시장이 아니다. 그저 끝을 모르고 돌아가는, 코인판보다 더한 '초대형 사설 도박장'으로 완벽하게 전락했다. 노동의 가치를 짓밟고, 징벌적 세금과 규제로 부동산과 실물 경제를 질식시킨 좌파 정권이, 벼랑 끝에 몰린 전 국민의 멱살을 쥐고 '영끌 빚투'라는 룰렛 테이블 앞으로 강제로 끌어들인 결과다.
상황이 이토록 참담한데도, 어제 국회에는 기본소득당, 사회 무슨당 같은 좌파들이 모여 반도체 기업의 초과 세수를 뜯어내 '국부펀드'를 만들고 기본소득을 나눠주겠다는 몽상을 얘기한다.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두 거인의 등골에 빨대를 꽂아 피를 빨아먹으면서, 그 핏빛으로 자신들의 볼이 발그레해졌다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기생 생물들의 왈츠다.
코스피 9000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무능한 권력이 빚어낸 극단적 불평등을 가려주는 거대하고 위태로운 홀로그램이다. 글로벌 AI 사이클이 식고 반도체의 착시가 걷히는 날, 우리는 모래로 쌓아 올린 이재명 체제의 경제가 얼마나 끔찍한 소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이다. 신기루가 화려할수록, 사막의 갈증은 더욱 잔인한 법이다.
오는 7월, 이른바 '가짜뉴스 처벌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본격 시행된다. 이에 발맞춰 네이버와 카카오가 참여하는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가 허위조작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자율규제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인공지능 딥페이크를 막고 악의적인 허위 정보를 도려내겠다는 명분은 제법 매끄럽고 윤이 난다. 사적 검열 논란을 피하겠다며 카카오톡이나 메일 같은 개인 메신저를 규제망에서 슬쩍 뺀 조치도 영악하다.
그러나 이 포장지를 뜯어내고 그 안에 담긴 작동 원리를 건조하게 해체해 보면, 참으로 기괴하고 위험한 통제 사회의 밑그림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자율'이라는 단어 뒤에 은폐된 거대한 권력의 기만을 읽어야 한다.
우선 딥페이크와 디지털 범죄를 막겠다며 슬그머니 끼워 넣은 '대형 커뮤니티 이미지 검열'의 논리 구조부터 부숴보자. 말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단번에 헛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진짜 범죄자들이 불법 조작물이나 딥페이크를 수백만 명이 오가는 대형 공개 커뮤니티에 올리는 바보짓을 하겠는가. 그들은 이미 철저한 추적 회피를 위해 텔레그램 같은 해외의 폐쇄형 메신저나, 그들만의 은밀한 소규모 점조직 커뮤니티로 숨어든 지 오래다.
경찰의 수사망도 피하는 진짜 범죄자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면서, 왜 굳이 대형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돋보기를 들이대는가. 목적은 명확하다. 범죄 예방은 허울 좋은 핑계일 뿐, 실제로는 광장에 모인 평범한 시민들이 생산해 내는 권력에 대한 풍자 밈(Meme)과 날것의 여론을 사전에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빈대 잡는 흉내를 내면서, 사실은 시민들의 일상을 훔쳐보는 감시 카메라를 광장 한가운데 박아 넣으려는 서늘한 수작이다.
이들이 제시한 허위조작정보의 텍스트 검열 기준은 한술 더 뜬다. '부당한 이익을 얻을 목적', '타인의 인격권 침해', 그리고 '공공의 이익 침해'다. 이토록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언어의 늪에서 진실과 거짓을 무 자르듯 가려낼 심판관은 도대체 누구인가. 법원도, 수사기관도 아니다. 사익을 추구하는 일개 민간 기업인 포털 플랫폼사들이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 독재 프레임에 걸리니, 거대 플랫폼의 '이용 약관'이라는 사적 계약의 형태를 빌려 검열의 칼자루를 쥐여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좌파 권력이 고안해 낸 가장 세련된 21세기형 '검열의 외주화'다.
자율을 빙자한 이 제도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는 뻔하다. 국회 다수당을 차지하고 수시로 기업 총수들을 청문회에 불러내 조리돌림하는 거대 여당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플랫폼은 없다. 만약 우파 유튜버나 시민이 이재명의 비리 의혹을 제기하면 플랫폼은 이를 '타인의 인격권 침해'나 '허위조작정보'로 묶어 즉각 삭제하거나 노출을 제한할 것이다. 반면, 좌파 스피커들이 쏟아내는 우파를 향한 악마화나 날조는 '표현의 자유'나 '풍자'라는 이름으로 너그럽게 방치될 것이다. 정부는 뒷짐지고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적 없고 게시물 삭제는 기업의 '자율'결정"이라 미루려는 꼼수. 기준이 모호할수록, 칼자루를 쥔 기업은 권력을 향해 기울기 마련이다.
역사적 맥락을 복기해 보면 실소조차 아깝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짜뉴스 엄단'을 가장 소리 높여 외치는 자들이 누구인가. 광우병 괴담으로 뇌송송 구멍탁을 외치고, 세월호 고의 침몰설로 장사를 하며, 첼리스트 술자리부터 최근의 '연어 술파티'까지 숨 쉬듯 거대한 거짓의 산성을 쌓아 올린 자들이다. 가짜뉴스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서 권력의 싹을 틔운 자들이, 이제 와서 자신들의 치부를 찌르는 1인 미디어와 광장의 상식적인 스피커들을 통제하려 든다. 권력을 잡은 파시스트가 가장 먼저 하는 짓은, 자신이 지나온 혁명의 길목에 검문소를 세우고 타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범죄 예방과 가짜뉴스 근절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이 얄팍한 통제망은, 조지 오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의 완벽한 강림이다. 사기업의 약관을 무기 삼아 진실을 독점하려 드는 이 합법적 입틀막이 완성되는 순간, 대한민국의 인터넷 공론장은 이재명과 좌파 권력이 허락한 텍스트만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무균실이자 감옥으로 전락할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은 언제나, '당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가장 다정한 속삭임을 하며 다가온다.
식중독으로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쥐고 과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청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넷플릭스의 디스토피아 스릴러나 삼류 병영 부조리극의 한 장면이 아니다. 2026년 6월,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의 예비군 훈련장에서 국가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차갑고도 기괴한 실제 상황이다.
사건의 전말을 건조하게 쪼개어 보자. 훈련 첫날 점심으로 제공된 제육볶음 도시락을 먹은 예비군 89명이 집단으로 복통과 설사 증세를 호소했다. 상식적인 국가라면 즉각 급식을 중단하고 환자들을 격리해 치료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재명 체제의 군대는 달랐다. 그들은 식중독에 걸린 청년들에게 지사제 몇 알을 쥐여주며 "위에서 그냥 하는 게 좋겠다고 하니 훈련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다음 날에도 '업체와의 계약'을 핑계로 똑같은 도시락을 또다시 배식했다.
우리는 이 그로테스크한 텍스트 이면에 흐르는 군에 대한 자세를 읽는다. 그것은 국가가 청년의 목숨과 건강을 대하는 지독한 경멸이다. 계약이라는 행정 편의주의와 상부의 지시라는 맹목성 앞에서, 개인이 겪는 육체적 고통은 그저 무시해도 좋은 사소한 결함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군대의 기강 해이나 행정 착오가 아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개인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나 소모품으로 다루는, 가장 노골적이고 완벽한 전체주의적 폭력의 현장이다.
현역또한 마찬가지지만, 애초에 예비군은 민간인의 희생을 담보로하는 곳이다. 도대체 무슨 깡다구인건가?
좌파의 서늘한 이중잣대와 예측가능한 내로남불을 잠시 상상해보자. 만약 대기업 공장 식당에서 89명의 노동자가 쉰내 나는 고기를 먹고 집단 식중독에 걸렸는데, 사측이 "계약 때문이니 오늘도 똑같은 밥을 먹고, 지사제를 삼키며 기계를 돌리라"고 강요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재명과 민주당, 그리고 민노총은 당장 '자본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라며 핏대를 세우고 광장으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었을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악덕 기업이라며 국회 청문회를 열고 기업 총수를 불러내 조리돌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체가 자본가가 아니라 '국가'가 될 때, 그리고 그 피해자가 강제로 징집된 '2030 청년'들이 될 때, 인권과 생명을 그토록 신성시하던 좌파 카르텔은 쥐죽은 듯 침묵한다. 이재명 치하의 군대에서 청년의 인권은 촛불이 든 종이컵보다도 가볍다. 국가의 부름에 응하다 쓰러져간 예비군 소식이 불과 한달도 안지났다. 군인이, 예비군이 무슨 비품인가? 이게 바로 그들이 떠들어대는 인권의 진짜 해상도다.
이재명은 틈만 나면 전 국민에게 25만 원을 뿌리며 '기본사회'라는 달콤한 환상을 팔아먹는다. 그러나 그 배급표를 쥐여주는 그 손의 뒷면을 보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달려온 청년들에게 안전하고 온전한 5천 원짜리 밥 한 끼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것이 이 정권의 진짜 실력이다. 배식을 독점한 국가가 썩은 고기를 먹이고, 병든 몸을 강제로 굴리며, 계약을 이유로 항의하는 입을 틀어막는다.
이것만봐도 배급을 핑계로 국민을 사육하고 통제하려 드는 이재명식 '기본사회'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파시즘의 결과를 '미리보기' 한 셈이다.
썩은 제육볶음을 씹어 삼키며, 복통을 참은 채 사격장의 표적지를 겨누어야 했던 89명의 청년들은 그날 화약 냄새 진동하는 훈련장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민낯을 가장 아프게 체득했을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희생을 헐값에 착취하면서도, 최소한의 존엄조차 지켜주지 않는다는 그 잔인한 진실을 말이다. 이 참담한 야만에 분노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영혼을 먹혀버린 것이다.
A Japanese engineer invented something you scan almost every day, then gave it away for free.
In 1994, Masahiro Hara and his small team at Denso, an auto-parts company in Japan, built the QR code. The idea came from the black and white stones of a Go board.
Here is the part most people don't know: Denso held the patent. They could have charged the world for every single scan.
They chose not to. They kept the standard open, for free, forever.
That one decision is why QR codes are now on menus, tickets, and payments on every continent.
A gift from Japan that we all use and never paid for.
빵과 투표함, 역사라는 가장 서늘하고 잔혹한 채점관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은 종종 인간의 투쟁을 거창한 이념의 언어로 낭만화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의 군중들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숭고한 깃발을 흔들었지만, 그들을 광장으로 내몬 진짜 동력은 텅 빈 국고와 폭등하는 빵값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역시 마르크스의 난해한 자본론이 아니라, 당장 굶어 죽어가는 농민들의 텅 빈 위장이 빚어낸 핏빛 폭발이었다.
인간은 거창한 도덕과 이념의 구호를 내걸고 혁명을 완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거대한 체제 붕괴의 밑바닥을 흐르는 가장 본질적인 마그마는 언제나 '경제적 고통'이었다.
우리의 현대사도 이 차갑고 정직한 인과율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좌파 진영은 늘 1960년의 4.19 혁명이나 1979년의 부마항쟁을 오직 '민주주의를 향한 순결한 열망의 승리'로만 독점하고 포장하려 든다. 하지만 그 감성의 거품을 걷어내 보라.
4.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3.15 부정선거였으나, 그 불길이 온 나라를 맹렬하게 집어삼킬 수 있었던 기저에는 전후의 극심한 경제 불황과 대중의 절대적 빈곤이 깔려 있었다. 부마항쟁 역시 겉으로는 유신 체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었으나, 그 실질적 트리거는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 폭등과 지역 경제의 붕괴가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의 토대가 무너져 내리는 경제적 공포, 그리고 내 밥그릇을 비워버린 주제에 주권마저 도둑질하려는 권력을 향한 민중의 항의. 그것이 대중의 인내심을 끊어버리는 역사의 가장 일관된 방정식이다.
지금 이재명 정권이 마주한 대한민국의 풍경이, 바로 이 뼈아픈 붕괴의 역사적 데칼코마니다.
1,550원 선마저 맥없이 뚫려버린 환율의 붕괴,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증시의 폭락. 과거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급의 공포가 도래했음에도, 권력은 이를 두고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나 '중동발 대외 변수' 탓을 하며 변명하기 바쁘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은 얄팍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진실은 한없이 차갑고 명확하다. 이 거대한 경제적 발작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직 표를 사기 위해 국가의 곳간을 헐어버린 이재명의 얄팍한 포퓰리즘이 빚어낸 완벽하고도 필연적인 인재(人災)다.
치솟는 환율을 방어하고 통화 가치를 지켜내는 경제학의 교과서적 해법은 단순하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좁히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고, 시중에 풀리는 유동성(M2)의 수도꼭지를 단단히 틀어막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는 금리를 올릴 수 없는 치명적인 딜레마에 갇혀 있다. 공식 통계로만 1,900조 원, 전세보증금까지 합치면 3,000조 원에 육박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 뇌관 때문이다. 금리를 올리는 순간 한계 상황에 내몰린 서민과 영끌족, 자영업자들이 연쇄 도산한다는 것이 경제 관료들이 내세우는 처절한 방어 논리다.
백번 양보해 그 고육지책을 인정한다 치자. 통화 정책의 손발이 묶여 있다면, 상식적인 정부가 취해야 할 최후의 방어선은 빚을 내서 허공에 무지성으로 돈을 살포하는 '재정 중독'만큼은 결사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반대의 길로 폭주했다. '기본소득', '민생 회복 지원금', '고유가 피해 지원금'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얄팍한 간판을 내걸고, 수십조 원이 넘는 현금을 윤전기로 찍어내 대중의 입에 쑤셔 넣었다. 금리는 묶어둔 채 화폐의 공급량만 미친 듯이 늘려대니, 원화의 가치가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고 환율이 1,550원을 뚫고 하늘로 솟구치는 것은 초등학생의 산수 실력으로도 예측 가능한 인과율이었다. 그 결과 국가채무는 1,415.2조 원을 가볍게 돌파했고, GDP 대비 채무비율 50%라는 마지노선마저 무너지며 미래 세대의 등에 거대한 폭탄을 지워버렸다.
여기에 이 나라의 숨통을 진짜로 끊어놓을 가장 서늘한 뇌관은 따로 있다. 바로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와 텅 비어버린 '국가 전략 비축유'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고조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고, 전면전 발발 시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핏빛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원유 수입의 72%를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이는 사망 선고와 같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순수입량의 90일 치 이상을 비축하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은 단기적인 국내 유가 불만을 덮고 선거용 인심을 쓰겠다며, 국가 생존의 최후 보루인 이 '전략 비축유'를 찔끔찔끔 빼 쓰며 아슬아슬한 최저치로 추락해 버렸다. 비상시 국가를 지탱할 비축 일수는 아슬아슬한 최저치로 추락했다.
자국의 상선에 이란의 대함 미사일이 꽂혀도 "고의성을 모르겠다"며 비굴하게 엎드리는 아마추어적 굴종 외교는, 국제 사회의 에너지 안보 공조망에서 대한민국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껍데기뿐인 반미 자주 외교를 떠들며 레드팀에 윙크를 보내는 사이, 국가 경제의 혈관인 원유 수급망을 스스로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완벽한 안보적 자해극이다.
1,550원의 환율,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국인 자본, 1,200조 원의 국가채무, 아슬아슬한 원유 비축량, 신선식품 물가도 불안하다.
이것이 그들이 맹신하는 "일 잘하는 이재명"이 남긴 건조하고도 완벽한 팩트다. 그는 결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존과 권력 연장을 위해 국가의 자본을 탕진하고, 비상용 비축유마저 헐어 쓰며, 미래 세대에 천문학적인 빚을 떠넘기는 '파괴의 기술'에 능할 뿐이다.
가난한 자를 돕겠다며 쥐여준 그 알량한 지폐 몇 장은, 결국 잔혹한 인플레이션과 고환율로 돌아와 서민의 밥상 물가를 폭등시키고 지갑을 털어가는 가장 악랄한 '빈자의 세금'으로 돌아왔다. 모니터 속 붉게 물든 증시와 1,550원이라는 환율 전광판이, 이 나라의 경제가 지금 얼마나 서늘한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는지를 차갑게 경고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의 수출 실적 뒤에 숨어 유능한 행정가 행세를 하지만, 실물 경제의 지표를 들이대는 순간 그 얄팍한 환상은 이토록 손쉽게 산산조각이 난다.
'우연히도' 선거가 끝나자 고삐풀린듯 올라가는 환율에 우파 텃밭에서만 핀셋으로 집어낸 듯 증발해버린 투표용지, 권력의 눈치를 보며 헌법을 찢어버린 선관위. 6.3 지방선거에서 벌어진 이 사상 초유의 참정권 압살 사태는, 과거 3.15 부정선거의 가장 기괴하고도 세련된 21세기적 변종이다.
저들은 잠실 투표소 앞의 시위대를 경찰의 방패로 밀어내고 개표를 강행하면, 이 소란이 며칠 뒤 유야무야 가라앉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팍팍한 밥상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짓밟힌 주권에 대한 모멸감이 융합되었을 때, 그 거대한 파도가 권력의 숨통을 어떻게 끊어놓는지 저들은 역사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 이 사태는 결코 경찰의 군홧발로 덮을 수 있는 얕은 불씨가 아니다.
더욱 서늘한 것은, 이재명 정권을 향해 날아들 진정한 악몽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적 억압은 견뎌도, 텅 빈 지갑과 빼앗긴 표의 교집합만큼은 결코 참지 않는 것이 대중의 차가운 속성이다.
바닥난 금고, 증발한 비축유, 다가오는 미국의 301조, 그리고 투표함. 권력의 무덤을 파는 가장 완벽한 원소들이 지금 이재명의 발밑에 차곡차곡 쌓였다. 경찰의 몽둥이 따위로 이 거대한 역사의 인과율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만을 넘어선 가련한 무지다. 바스티유의 횃불과 마산의 함성이 그러했듯 말이다.
침묵하는 SNS가 폭로한 얄팍한 심연, 그 빈곤한 물웅덩이에 빠진 나라
최근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짧은 글 하나가 내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글쓴이의 통찰은 날카롭고도 정확했다.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선관위의 투표용지 사태를 두고 ‘격노하며 질타했다’는 기사는 철저히 계산된 쇼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그 완벽한 증거로, 글쓴이는 ‘이재명의 텅 빈 개인 SNS’를 지목했다.
정치인의 진짜 속내를 읽어내는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시험지는, 참모들이 정제해 내놓는 공식 브리핑이 아니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과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배설되는 개인의 SNS다. 특히 이재명이라는 인물에게 SNS는 단순한 소통 창구가 아니다. 일개 커피 프랜차이즈의 마케팅 문구 하나를 두고 극우의 암호라며 린치의 좌표를 찍고,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같은 사안에 가짜뉴스를 퍼 나르며 반서방 선동을 일삼던 공간이다. 반대파의 사소한 허물 하나만 보여도 꼭두새벽부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날 선 분노를 쏟아내던 곳. 즉, 이재명의 SNS는 그가 ‘진심으로 간절하거나, 진짜로 분노했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영혼의 반사신경 그 자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민주주의의 심장인 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라 주권자가 발길을 돌리고, 참정권을 빼앗겨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는 사상 초유의 헌정 유린 사태가 터졌다. 상식적인 국가의 지도자라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참모들이 써준 대본에 따라 국무회의에서는 ‘가짜 격노’를 연기했으면서도, 정작 진짜 억울하고 화가 날 때만 불을 뿜던 그의 개인 SNS는 묘비처럼 고요하다. 그 흔한 유감 표명도 없다.
이 소름 돋는 침묵이 증명하는 진실은 단 하나다. 그는 지금 속으로 단 1그램의 분노도 느끼지 않고 있다.
대낮의 투표소에서 "난 상관없으니까"라며 헌법을 짓밟는 자신의 기행 앞에서는 서윗하게 룰을 찢어주고, 반대파의 텃밭에서는 행정 마비를 핑계로 표를 말려 죽인 이 기특한 헌법기관을 향해 그가 왜 진짜 화를 내겠는가. 오히려 자신이 꽂아 넣었던 ‘정원오’라는 꼬리가 선거에서 잘려 나간 마당에, 이참에 도마뱀 꼬리 자르듯 실패한 아바타를 조용히 폐기 처분하고 이 골치 아픈 부정선거 논란에서 영리하게 거리를 두려는 계산된 침묵일 뿐이다.
살면서 숱한 부류의 인간 군상을 마주해 왔지만, 이 얄팍한 촌극을 지켜보며 나는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는 내가 보아온 인간 중 가장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며, 그 깊이마저 일천하기 짝이 없는 가장 얄팍한 사내다.
그의 행동 양식에는 고뇌나 철학, 염치라는 거추장스러운 단계가 아예 생략되어 있다. 불리하면 아랫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위기에 몰리면 뜬금없이 태평양 심해의 핵잠수함을 부르짖는다. 자국 기업의 평범한 마케팅에는 독심술사처럼 핏대를 세우면서, 이란의 대함 미사일 앞에서는 고의성을 모르겠다며 납작 엎드린다. 대중을 속이는 기술조차 너무도 조악하고 투명해서, 차라리 모른 척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이 더 힘들 지경이다. 거대한 악당의 카리스마는커녕, 동네 골목길에서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이리저리 곁눈질을 살피는 시정잡배의 빈곤한 멘탈리티가 그 알량한 내면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참담한 비극은, 이토록 바닥이 훤히 비치는 얄팍한 인간이 기어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을 거머쥐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것은 단지 한 정치꾼의 얄궂은 성공담이 아니다. 저토록 일천한 지적 밑천과 뻔뻔한 이기주의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서도, 그에게 맹목적으로 환호하며 권력의 왕관을 씌워준 이 나라의 집단 지성이 완벽하게 파산했음을 웅변하는 증명서다. 도덕과 이성이 붕괴된 시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분노와 선동만으로 뭉친 군중이 결국 어떤 수준의 괴물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빚어내는지 보여주는 처참한 결론인 셈이다.
거대한 심연 앞에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발목조차 적시지 못할 만큼 얄팍하게 찰랑거리는 저 빈곤한 권력의 물웅덩이 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시스템과 우리의 일상이 옴짝달싹 못한 채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침묵하는 SNS가 폭로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가장 완벽하고도 뼈아픈 블랙코미디다.
자유민주주의?
아니, 이것은 참혹하게 고장 난 ‘유사 민주주의’로의 추락이다.
잠실 투표소 앞 아스팔트 위에서 벌어진 사태를 똑똑히 직시해 보라. 경찰의 방패에 밀려 짐짝처럼 끌려가는 저 시민들이 도대체 무슨 폭력을 행사했단 말인가.
그들이 무슨 좌파 진영의 맹신도들처럼 일개 행사 문구를 두고 상상 속의 ‘탱크데이’를 창조해 내며 인민재판을 벌인건가?. 그도 아니면 완벽한 사과 앞에서도 “맨입으로 하냐”며 천박한 청구서를 들이미는 식의 억지 생떼라도 부린 것인가?
그저 국가의 행정 파산으로 인해 헌법이 보장한 자신의 신성한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한 데 대해, 주권자로서 지극히 이성적이고 건강한 항의를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사태의 주범인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떻게 했어야 마땅한가. 최소한 책임자가 현장에 나와 고개를 숙이고, 잃어버린 표를 구제할 방법이라도 협상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국가 기관으로서의 얄팍한 염치라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과도 대화도 포기한 채 공권력의 등 뒤로 비겁하게 숨어버렸다. 주권자의 정당한 항의를 불법 시위로 규정하고, 대답 대신 수갑과 몽둥이를 내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야만적인 진압이 웅변하는 가장 섬뜩한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선관위가 도망친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행정부의 직할을 받는 ‘경찰’의 물리력이었다.
이 끔찍한 풍경은 좌파 진영이 그토록 핏대를 세우며 검찰 해체에 목을 맸던 진짜 이유를 소름 돋게 증명해 준다. 권력의 부패를 수사하고 행정부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 최후의 사법 기관인 검찰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시대. 그 뒤에 남는 것은 오직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 맹종하는 경찰의 방패뿐이다. 견제 장치가 통째로 뽑혀나간 텅 빈 공화국에서, 물리력을 독점한 행정부는 이제 시민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언제든 주권자의 목줄을 죄는 잔혹한 사병(私兵)으로 전락할 것임이 벌써부터 훤히 보인다.
그런데도 이 기괴한 국가 폭력 앞에서 좌파 카르텔은 기분 좋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무능한 행정을 꾸짖던 이태원과 세월호의 그 거룩한 분노는 온데간데없다. 끌려가는 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진영의 유권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스팔트 위의 절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서늘한 조소로 묵인하고 있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헌법적 권리를 요구하는 시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저 괴물 같은 공권력이, 영원히 당신들만의 든든한 호위무사가 되어줄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공권력에 짓밟히는 저들의 참정권이 지금은 그저 남의 일 같지?
명심해라. 다음은 니들 차례다.
폭력에 관대한 25일, 주권자에 잔혹한 33시간: 공권력의 이중잣대
6월 3일 밤 10시. 선관위의 투표용지 수급 실패로 헌법적 주권을 거세당한 잠실의 시민들이 아스팔트 위로 나섰다. 내 표를 행사하게 해달라는, 주권자로서 너무도 당연하고 이성적인 항의였다. 그리고 6월 5일 아침, 국가는 대규모 경찰 기동대를 투입해 이들을 짐짝처럼 끌어내며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시민들이 잃어버린 참정권을 돌려달라며 절규한 지 불과 33시간 만에 벌어진, 참으로 신속하고도 무자비한 진압 작전이었다.
이 서늘한 방패의 속도전을 지켜보며, 나는 불과 얼마 전 대한민국을 멈춰 세웠던 또 다른 시위의 현장을 겹쳐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월, 민주노총 산하 화물연대가 편의점 CU 물류센터를 무단 점거했던 사태.
당시 민주노총은 무려 '25일간'이나 물류의 혈관을 인질로 잡고 몽니를 부렸다. 대체 차량의 출차를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과정에서 트럭에 사람이 치이는 참혹한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격앙된 노조원들이 대형 차량을 몰고 경찰 바리케이드를 향해 돌진해 공권력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것은 시위가 아니라 명백한 폭동이었고, 타인의 막대한 재산권을 유린하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 공권력은 어떻게 작동했던가. 25일이라는 그 길고 끔찍한 무법의 시간 동안, 경찰은 돌진하는 트럭 앞에서도 극도로 몸을 사리며 방관자로 일관했다. 강제 해산은커녕 노동부 장관이 직접 심야 교섭장에 납셔 중재자를 자처했고, 결국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기업의 팔을 비틀어 폭력 주동자들에게 '민형사상 면책'이라는 완벽한 전리품을 쥐여주었다.
자, 이제 두 개의 몽둥이를 차갑게 교차 비교해 보자.
'진보'라는 붉은 완장을 찬 권력의 핵심 카르텔이 무려 25일간이나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경찰을 들이받을 때, 이 나라는 한없이 너그럽고 서윗한 협상가였다. 그러나 헌법기관의 파산으로 신성한 투표권을 도둑맞은 빽 없는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자, 국가는 불과 33시간 만에 잔혹한 폭력 기구로 돌변해 기동대의 방패로 시민의 입술을 짓이겨버렸다.
폭력과 흉기를 든 자들에게는 25일의 치외법권을 허락하고, 맨손으로 헌법을 요구하는 주권자들의 절규는 단 하루 반나절 만에 수갑을 채워버리는 이 지독한 이중잣대. 이것은 치안 유지가 아니라 권력의 노골적인 사유화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법과 원칙이라는 보편적 저울이 박살 난 자리에,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내 편의 불법은 비호하고 남의 편의 정당한 권리는 진압하는 비루한 사병(私兵)으로 전락했다.
민주노총 앞에서는 비굴하게 무릎 꿇던 천사가, 만만한 주권자 앞에서는 곤봉을 든 괴물로 돌변하는 이 서늘한 광장. 내 편의 25일짜리 폭력은 눈감아주고, 남의 편의 33시간짜리 정당한 저항은 압살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호흡을 멈췄다. 강제 해산된 잠실의 텅 빈 아침 아스팔트 위로, 우리가 그토록 경멸했던 파시즘의 그림자가 길고 짙게 드리우고 있다.
공권력을 이렇게 제 멋대로 행사하는 권력이 있었던가?
기표소의 커튼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엄격하고 서늘한 결계다. 한 번 기표 용구를 손에 쥐고 그 결계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들고 있는 투표지는 더 이상 신성한 한 표가 아니라 '공직선거법 위반'의 명백한 증거물이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가 사전투표 첫날 벌인 기괴한 촌극을 보라. 이재명은 기표소 안에서 도장을 찍다 말고 투표용지를 버젓이 들고 밖으로 기어 나와, "도장이 반만 찍혔는데 무효표가 아니냐"며 선관위 직원에게 흔들어 댔다. 그리고는 버젓이 다시 기표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것은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다. 투표지를 들고 기표소를 들락거리는 행위는 '비밀투표 원칙 침해'는 물론, 투표지 훼손이나 인증샷 촬영 등 부정선거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적 위법 행위다. 만약 평범한 일반 국민이 이런 짓을 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당장 현장 요원들이 달려들어 투표용지 노출을 이유로 가차 없이 무효표 처리를 하고, 선거소란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현행범으로 경찰에 인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불법의 현장 앞에서 대한민국 선관위의 대응은 눈물겹도록 '서윗(Sweet)'했다. 투표지가 노출되든 기표소를 다시 들어가든, 그저 권력자의 심기가 상할까 굽신거리며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고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특급 의전. 이쯤 되면 국가의 선거를 엄정하게 관리해야 할 선관위가 아니라, 권력자의 범죄를 눈감아주는 완벽한 '찢관위'이자 이재명 개인의 선거 도우미로 전락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서늘한 블랙코미디에서 가장 실소가 터지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이재명 본인의 지독한 '선거법 위반 DNA'다.
그는 과거 숱한 선거법 위반 재판으로 정치적 사선을 넘나들며 법정을 제집 드나들듯 했던 인물이다. 지지자들은 그가 기어이 대통령 완장을 찼으니, 이제 평생 선거법 위반으로 법정에 설 일은 없을 것이라며 안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다. 대통령이 되어서 치르는 첫 투표 현장에서조차, 보란 듯이 기표소 밖으로 투표지를 들고나와 공직선거법을 천연덕스럽게 짓밟아버리는 저 경이로운 습관성 헛발질을 보라.
평생을 편법과 위법 속에서 살아온 그 '법치 경시의 DNA'만큼은 권력으로도 절대 세탁할 수 없음을 그가 스스로 증명해 주었다. 참으로 투명하고도 완벽한 엑스맨이 아닐 수 없다.
공익은 사익에 앞선다(Gemeinnutz geht vor Eigennutz). 1920년대 나치 독일을 지배했던 핵심 슬로건이다. 국가의 이익과 공공복리라는 거창하고 모호한 명분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합법적으로 짓밟는 것은, 전체주의가 권력을 장악할 때 쓰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 섬뜩한 나치식 화법은, 그들이 지금 스스로 쳐놓은 덫에 걸려 얼마나 끔찍한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이재명 정권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만지작거리는 세 가지 카드를 나란히 놓아보자.
첫째, 파업으로 기업에 조 단위의 손해를 끼쳐도 책임을 묻지 못하게 막아주는 노란봉투법.
둘째,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이윤을 국가가 뜯어내어 대중에게 뿌리겠다는 초과세수 국민배당금.
셋째, 정작 노조가 국가의 밥줄인 반도체 라인을 멈춰 세우려 하자, 국가 경제가 망할 것 같다며 헌법을 핑계로 파업권을 강제 박탈하겠다는 긴급조정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이 세 가지 정책은 결코 한 국가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기괴한 혼종이다.
노조에게는 무소불위의 몽둥이를 쥐여주고, 기업의 금고는 권력이 털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래 놓고 정작 괴물이 된 노조가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하자, 당황한 권력이 황급히 독재 시대의 강압적인 진압봉을 꺼내 든 꼴이다. 방화범이 시장에 불을 질러놓고 불길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지자, 공공복리라는 헌법 조항 뒤에 숨어 소방관 코스프레를 하는 완벽한 자가당착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무한대로 보장하겠다며 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킬 때는 공공복리와 국가 경제의 붕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 말인가. 표를 얻기 위해 자유 시장 경제의 룰을 파괴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니 국가가 전지전능한 통제관으로 나서서 자본과 노동을 모두 억누르겠다고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20세기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애용했던 전형적인 국가협동조합주의이자, 파시즘의 경제 모델이다.
자신들의 얄팍한 정책 실패를 수습하겠다고, 평시에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운운하며 전체주의적 폭력을 정당화하려 들지 마라. 삼성전자의 파업을 막고 공공복리를 지키는 진짜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필연적으로 폭력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긴급조정권으로 노동권을 억누르며 나치식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파국의 원흉인 노란봉투법부터 쓰레기통에 폐기하는 것이 상식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엑스 공식 계정을 통해 짧은 정정(Correct) 게시물을 올렸다. "한국의 고위 정책 입안자가 AI 이익에서 나온 '초과 세수'를 이용해 시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며 청와대의 핑계를 일단 문자 그대로 고쳐주었다. 청와대는 자신들의 항의가 통했다며 안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블룸버그의 진짜 무서운 문장은 쉼표 뒤에 곧바로 이어졌다. "이는 호황으로 얻은 이익을 재분배하라는 압박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underscoring growing pressure to redistribute gains from the boom).
정확하고도 서늘한 확인 사살이다. 블룸버그는 사과한 것이 아니다. "알겠다, 너희가 쓴 단어가 직접적인 '이익'이 아니라 '세수'라는 점은 정정해 주마. 하지만 너희가 권력을 동원해 기업의 이익을 강제로 뺏어 뿌리려 한다는 본질은 변함없는 팩트다"라고 전 세계 금융 시장에 다시 한번 대못을 박아준 것이다. 단어 하나 수정해달라고 떼를 쓰다가, 도리어 글로벌 언론에게 국가 권력의 약탈적 본질만 한 번 더 박제당한 처참한 굴욕이다.
이 사태는 이재명 정권 특유의 얄팍한 국정 운영 방식, 이른바 '슈뢰딩거의 화법'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일단 자극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툭 던진다. 대중이 환호하면 자신들의 위대한 치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번처럼 외국인 자본이 이탈하며 주식 시장이 박살 나면, 즉각 태세를 전환해 "기레기들의 가짜뉴스다", "내 말의 진짜 맥락을 봐라"라며 비겁하게 발을 빼는 것이다.
상자 안의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열어보기 전엔 모르는 것처럼, 이 정권이 뱉은 말의 진짜 의미는 언제나 시장의 반응을 확인한 후에야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팩트로 확인 사살을 날린 블룸버그 앞에서도 끝까지 맥락 타령을 하며 우기는 그 눈물겨운 찌질함에 기립 박수를 보내야 할 지경이다. 생각해보면 이재명이 야당 시절부터 도대체 몇 번이나 이 지긋지긋한 맥락 타령을 변명거리로 써먹었는지, 언제 날을 잡고 그 횟수라도 한번 세어봐야 할 판이다.
정치인, 특히 한 국가의 정부와 수반이 국민의 밥줄과 직결된 거시 경제 정책을 발표할 때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오해와 오독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하고 확고한 문장으로 설명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권력의 기본 책임이자 실력이다.
그런데 매번 뱉어놓은 말이 논란이 될 때마다 대중과 언론, 심지어 외신마저 그 알량한 맥락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이해해 주어야 한다면 묻고 싶다. 그것이 맥락을 못 읽는 국민의 문제인가, 아니면 제대로 된 정책 문장 하나 구사할 지적 능력이 없는 화자의 문제인가. 국정을 도박판의 배팅처럼 던져놓고 매번 남 탓으로 수습하려 드는 건 너무 비루한 생존술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훨씬 더 본질적인 인사이트가 하나 있다. 지금 청와대가 삿대질을 해대는 대상, 블룸버그의 정체성이다.
블룸버그는 극우나 보수 매체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 내에서는 기후 변화 대응, 총기 규제 등 민주당의 어젠다에 친화적인 진보 성향의 언론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자칭 진보를 표방하는 이재명 정권이, 다름 아닌 그 글로벌 진보 언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기괴한 불협화음이 증명하는 진실은 명확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집권 세력은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볼 때 결코 합리적인 진보라 부를 수 없는 기형적인 집단이라는 방증이다.
세계의 진보 진영은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룰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분배와 혁신을 논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 권력은 80년대 운동권의 낡은 계급투쟁론에 갇혀, 글로벌 경쟁에서 피 흘리는 자국 대기업의 금고를 털어 유권자의 표를 사는 것을 진보적 시대정신이라 착각한다. 그러니 합리적인 미국 진보 언론의 눈에는, 이들의 정책이 혁신적인 분배가 아니라 시장을 짓밟고 주주의 이익을 강탈하려는 후진적인 포퓰리즘의 억지 압력(Pressure)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천박한 경제 관념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지 않자, 억울하다며 외신의 '맥락 탓'을 하고 번역 탓을 하며 섀도복싱을 하는 권력. 글로벌 진보 매체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이 반시장적이고 낡은 갈라파고스 정권의 촌극 앞에서, 대한민국 경제의 시계는 오늘도 속절없이 뒤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