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는 끝났는데, 책임도 끝났을까? >>
D/s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Dom에게 나를 맡겼다.”
맡긴다는 것도 선택이다.
누구에게 권한을 넘길지,
어디까지 허용할지,
어떤 관계를 받아들일지 결정한 건 sub 자신이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모든 책임은 상대에게 있다.”
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선택에는
자신의 몫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의 일부를 맡겼고,
그 권한을 받아 규칙을 만들고,
방향을 정하고,
관계를 이끌어갔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당신이 선택했잖아요.”
라는 한마디로 돌려주는 것이 맞는걸까?
한 팔로워 분이 이런 표현을 했다.
자기 정원에서 놀게 해놓고,
그 안에서 사람이 다쳤는데
“네가 혼자 넘어진 거잖아.”
라고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건 정원 주인으로서
역할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이 비유가 오래 남았다.
정원에 들어간 건
그 사람의 선택이다.
뛰어다닌 것도 그 사람이고,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멈춰야 할 책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타리를 만들고,
길을 정하고,
어디까지 가도 된다고 말하고,
그 공간을 관리한 사람이 따로 있다면,
사람이 다쳤을 때 모든 이야기를
“본인이 선택한 일이잖아요.”
로 끝낼 수는 없다.
D/s에서는 이 문제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는 처음부터
권력의 비대칭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Dom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sub는 그 권한의 일부를 맡긴다.
그런데 관계가 잘못되면
갑자기 아주 평등해지는 경우가 있다.
“성인이니까 각자 책임이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상하다.
권한을 나눌 때는 비대칭이었던 관계가,
책임을 나눌 때만 갑자기 50 대 50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생기면 이런 말을 듣는다.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퇴한다는 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망가진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아니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피해가 사라지지 않고,
직책을 내려놨다고
다친 사람이 낫지 않는다.
D/s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관계가 잘못됐다.
그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
“미안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인정할 수도 있고,
“관계를 끝내겠습니다.”
라고 떠날 수도 있다.
그것도 책임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관계를 끝냈다고 해서
관계가 만들어놓은 결과까지
함께 종료되는 건 아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끝난 관계가 된다.
하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불안이 남고,
두려움이 남고,
다음 사람을 믿지 못하는 습관이 남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계속 되짚어보는 시간이 남는다.
한 사람에게는 지난 일인데,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래서 나는
“책임진다.”
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려워진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는 걸까?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가능하다면,
자신이 만든 결과가 남아 있는 동안
그 회복에 자기 몫을 하는 것까지일까?
모든 상처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에는
수리비를 계산하는 표도 없고,
깨진 만큼 정확히 배상해서
원상복구할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책임이란 어쩌면
결과를 없애는 능력보다
'내가 만든 결과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태도'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도 동의했잖아.”
“당신도 선택했잖아.”
“싫었으면 그만뒀어야지.”
전부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이라고 해서
내가 행사했던 권한의 결과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sub에게는
자신을 맡긴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Dom에게는
맡겨진 권한으로 만들어진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자기가 만든 규칙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결과가 관계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다면
거기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책임이.
권한을 받는 순간에는
“내가 책임질게.”
라는 말이 참 멋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짜 무게는
모든 게 잘 돌아갈 때가 아니라,
무언가 실제로 망가진 뒤에 드러난다.
정원에서 사람이 다쳤다.
정원 주인이
그 사람의 상처를 대신 아파줄 수는 없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네가 뛰다가 넘어진 거잖아.”
라고 문을 닫아버리면,
그 순간 책임까지
정원 밖으로 밀어낸 셈이 된다.
관계는 끝낼 수 있다.
역할도 내려놓을 수 있다.
서로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난 사람에게는 끝난 일이,
남겨진 사람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라면,
우리는 정확히 어디까지 해야
‘책임을 졌다’
고 말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