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광주와 그 정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나?
우리 모두 잠시 1980년 광주가 피 흘려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그들이 목숨걸고 싸웠다는 '독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잠시만 깊히 고민을 해보자.
독재란 단순히 군화를 신고 총칼을 휘두르는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권력이 단일한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규정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의 일상적 기호와 사소한 언어, 생각조차 폭력적으로 교정하려는 획일화 시스템. 그것이 독재의 뼈대이자 억압의 근원이다. 고로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이란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특정 정파의 정치적 승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사상과 양심을 폭력적으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근대 시민사회의 저항에 가깝다.
이제 이 건조한 역사적 잣대를 배재고 야구부의 이른바 '스타벅스 사태'에 대입해 보자. 십 대 소년들이 내뱉은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앳된 응원 구호가 과연 5.18 영령들을 향한 조롱일까.
조금만 어른스러운 시선과 톨레랑스를 갖춘 이성으로 바라보면 진실은 허탈할 정도로 명확해진다.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비극을 아이들이 치밀하게 계산하여 모독했을 거라는 빈곤한 상상력.
얄궂은 '스타벅스' 외침은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악마화하고 획일적인 불매운동을 억지로 강요하는 작금의 숨 막히는 좌파 진영의 사상 검열에 대한, 참으로 재기발랄한 반발에 가깝다고 보는게 훨씬 더 논리적이고 또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당신들 좌파들이야 말로 자신들의 꼰대스러운 억압을 비웃은 십 대들의 건강한 일탈을, 기어코 신성모독으로 과대 해석해 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이 촌극의 진짜 비극은 그 이후다. 좌파 교육 수장은 아이들의 선수 생명을 목줄 삼아 광주 5.18 묘역으로 끌고 가 강제 참배를 시켰다.
이것은 과거 독재정권이 사상범들을 끌고 가 전향서를 쓰게 하고 국기 게양대 앞에서 충성을 강요했던 그 폭력적인 사상 개조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올바른 성장'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를 씌워 독재의 통치 방식을 가장 완벽하게 복제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막힌 블랙코미디에서 진정으로 광주를 모독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커피 타령을 한 철없는 소년들?.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마저 침해하려는 국가 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었던 숭고한 궤적을, 고작 자신들의 이념적 잣대에 동조하지 않는 십 대들을 훈육하는 몽둥이쯤으로 전락시킨 좌파 진영 그 자체다.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고작 진영 논리의 문지기나 불매운동의 행동대장으로 강등시킨 이 눈물겨운 사유화야말로, 묘역에 잠든 이들을 두 번 죽이는 가장 악의적인 훼손이다.
이성은 증발하고 맹목적인 성역 사수만 남은 굿판 앞에서 우리는 묵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십 대 소년의 커피 브랜드 호명 한마디에 온나라가 들썩이고, 낯선 묘비 앞에 억지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야만 안심하는 이 비루한 통제를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진로가 끊길 수 있으니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나란히 서서 굴종의 참배를 하는 게 올바른 성장을 도울거라고?.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그곳에 광주의 저항 정신은 더 남아있지 않다. 오직 역사를 볼모로 잡아 현재의 자유를 옥죄는 위선자들의 알량한 훈육 비즈니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푸른빛의 나치들에게는 늘 새로운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지방선거 패배와 참정권 훼손 논란 앞에서 궁지에 몰린 이들은 또다시 먹잇감을 찾아다닌다. 그들이 바라는 건 사과가 아니라 항상 죽음이다. 누군가 죽어서 그들의 '비극적 자산'이 되어야 논란은 끝을 맺는다. 스타벅스 대표가 잘리고, 어린 학생들이 사죄를 해도 그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치적 연료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당사자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제3자인 그들은 피해자의 가면을 쓰고 여전히 정의로운 분노와 불매를 판매한다. 새로운 자산이 생길 때까지.
Mtt들이 여성온리 공간 침입하고 빼앗고 싶어하는건 뭐 종특이라 이해했는데 쓰까들은 왜 여성들이 잘 놀고 있으면 와서 물 흐리고 지들이 빼앗으려고 하나 잘 생각해 봤는데
그들은 좀 다른 형태의 남미새란걸 깨달음
걔들이 하는 행태가 딱 걸스나잇에 남친데려오는 남미새의 행동과 유사함
남친 데려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남친데려와서 물 흐리고 데려오지 말란 룰 없었잖냐며 되려 화냄 (=젠더론 지지않하는 그룹에 와서 젠더론 지지한다고 하면서 뭐라하면 그런 룰이 어디있나며 지가 씅냄)
자신의 생각이 없고 남자에게 생각을 의탁함 (=버틀러같은 수도 사이언티스트 같은 애들이 떠드는 뇌빠진 내용에 정신을 의탁하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얘기들을 주워섬김)
남자친구가 없는 친구들에게 우월감을 느낌 (= 모두니즘을 하는 나는 대단히 인류애가 있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묘한 믿을 가지고 여혐하며 여성들을 가르치려 듦)
참다참다 못한 친구들이 한마디 하면 버튼 눌린것 마냥 날뛰고 남친까지 등판해 사과하라고 친구들 협박하다 손절당함 (=혐오다!!! 낙인찍고 난리 치다가 결국 mtt들도 등판해서 혐오다!!!! 폭력 행사하겠다 협박함 그리고 결국 정상인들은 떠나고 그들만 남음)
이러면 내가 레즌데 어떻게 남미새냐! 이런 사람들 있을것 같은데 레즈인데 여성보다 mtt인권 챙기는 사람이 남미새지 뭐 달리 남미새인가? 자신안의 남미새를 인정하길
블루디판에 끼고싶어 빼액대는 젠더론 지지자들보고 한 생각 마즘
역사를 가르치는 자의 통찰은 때론 그 어떤 정치 평론보다 서늘하고 예리하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한국사 강사 최태성이 6.3 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1960년 4.19 혁명의 사진을 소환했다.
"백주대낮에 참정권이 침해됐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훼손됐다."
역사학도의 렌즈로 작금의 사태를 투영해 본 결과, 2026년 잠실 투표소 앞의 아스팔트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분노해 일어섰던 그날의 광장이 정확히 겹쳐 보인다는 서늘하고도 묵직한 경고장이다.
그런데 이 명징한 메시지 앞에서, 좌파 성향 네티즌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경이로울 정도로 기괴하다. 그들은 최태성의 글에서 '4.19 혁명'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역사적 메타포를 억지로 도려낸 뒤,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핵심은 4.19를 들고나온 게 아니다. 진상 규명과 대안 제시를 전광석화처럼 하라는 행정적 촉구가 핵심이다. 물타기 하지 마라."
이쯤 되면 단순한 난독증을 넘어선 애처로운 정신 병리 현상이다. 4.19 혁명이 무엇인가. 국가 기관이 선거의 룰을 조작하고 주권자의 표를 도둑질한 '3.15 부정선거'에 맞서 정권을 무너뜨린 피 끓는 항쟁이다. 역사를 업으로 삼는 강사가 투표용지 증발 사태에 하필 4.19의 사진을 덧붙였다면, 그 의도는 초등학생도 읽어낼 만큼 노골적이다. 지금 선관위가 저지른 짓이 과거 3.15 부정선거의 21세기적 변종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좌파 맹신도들은 이 서늘한 진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4.19의 비유를 긍정하는 순간, 주권자의 입을 수갑으로 틀어막은 경찰과 무능한 선관위, 그리고 그 파행의 결과로 선거 승리의 과실을 챙긴 자신들의 진영 전체가 '1960년의 부패한 독재 정권'과 완벽하게 동기화되기 때문이다.
진영의 앙상한 도덕성이 박살 나는 이 인지부조화의 고통을 견딜 수 없으니, 그들은 기어이 글쓴이의 명백한 의도마저 자신의 입맛대로 윤색해 버린다. "우리 편에 불리한 4.19 비유는 못 본 척할 테니, 이것은 그저 선관위의 행정 실수를 빨리 고치라는 점잖은 훈계일 뿐이다"라고 뇌를 세탁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해석하며 스스로 정신적 위안을 얻는 참으로 얄팍하고 지독한 '지적 자위(自慰)'다.
그동안 4.19와 민주주의의 역사를 자신들만의 신성한 전유물인 양 독점해 오던 자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정작 그 역사의 교훈이 자신들의 치부를 겨누는 비수로 날아오자, 그들은 가장 먼저 그 역사의 맥락을 거세하고 텍스트를 왜곡하는 파시스트적 몽매함을 드러냈다.
역사는 진영의 유불리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뷔페가 아니다. 팩트는 차갑고 묵직하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한 역사학자는 작금의 투표용지 증발 사태를 3.15 부정선거에 빗대어 4.19를 소환했다. 글쓴이의 의도마저 제 꼴리는 대로 찢어 발겨 억지 자위를 시전하는 저 맹신도들의 눈물겨운 회피 기동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지금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치명적인 독재의 늪에 빠져 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완벽한 희비극이다.
민주노총이 이재명 정권 출범 1년을 맞아 성적표를 내밀었다. 점수는 무려 70점이다. 겉으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짐짓 훈계를 늘어놓는 척했지만, 이 차갑게 식어버린 경제의 폐허 위에서 70점이라는 후한 낙제 면제점을 쥐여주는 그들만의 눈물겨운 우정 앞에서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양경수 위원장은 정부가 "증시 호황 등 성장 전략에만 몰두하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참으로 기가 막힌 유체이탈 화법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증시가 호황이고 성장 중이라고?
모니터를 켜고 팩트를 건조하게 쳐다보라. 선거 직후 터져버린 환율과 주가의 대붕괴 속에서, 코스피 시장은 매수 사이드카 12번, 매도 사이드카 12번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도합 24번이나 시스템이 강제로 멈춰 서는 비명을 질렀다. 이름 모를 작전 세력이 장난질을 치는 코스닥의 3류 개잡주나 불법 도박판의 스캠 코인도 하루아침에 이렇게 요동치지는 않는다.
국가의 거시 경제 펀더멘털을 대변해야 할 코스피가 1,550원을 넘나드는 환율 공포 속에서 하루살이 잡주로 전락해 헐떡이고 있는데, 민주노총의 눈에는 이것이 '성장에 몰두한 호황'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경제의 기초적인 인과율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맹인이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약탈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 경제가 멀쩡하다는 억지 최면을 걸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성장'이라는 가짜 전제를 깔아둔 진짜 목적은 그다음 대사에서 서늘하게 폭로된다.
"삼성전자 노조가 영업이익의 15%를 요구했는데, 나머지 85%는 어떻게 할 것인지 사회가 함께 논의해야 한다."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의 최전선에서 기업이 피를 말리며 쟁취해 낸 이윤이다. 그 알량한 파이마저 뜯어먹겠다고 15%를 내놓으라 몽니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주주와 기업이 쥐고 있어야 할 나머지 85%의 금고 열쇠마저 '사회적 논의'라는 폭력적인 이름으로 압수하겠다는 선언이다. 리스크는 1그램도 지지 않은 자들이,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 것을 넘어 아예 식당 문서를 통째로 내놓으라 윽박지르고 있다.
이 서늘한 약탈의 논리가 어떻게 이토록 천연덕스럽게 광장에 나올 수 있었는가. 다름 아닌 이재명 정권의 노동부 장관이 앞장서서 "초과이윤을 재분배하자"며 붉은 완장을 차고 멍석을 깔아주었기 때문이다.
정권이 사유재산권의 바리케이드를 허물어주고, 거대 노조가 쇠파이프를 들고 쳐들어가 기업의 금고를 터는 완벽한 2인 3각의 합동 작전. 민주노총이 이재명 정권에게 던진 70점이라는 성적표는, 사실 권력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의 약탈을 합법화해 주어 고맙다"는 레드팀의 영수증이나 다름없다.
국가 경제의 척추인 코스피는 개잡주처럼 널뛰며 발작하고, 글로벌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안방에서는 권력과 노조가 손을 잡고 남은 기업의 살점을 어떻게 발라먹을지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낄낄대고 있다. 이 끔찍한 카르텔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70점짜리 합격점을 받은 정부가, 과연 대한민국의 숨통을 몇 달이나 더 붙어있게 할지 서늘하게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