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몰랐지만
전수경, 아를, 2026
청년 여성 노동자 스무 명의 곁으로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기록. 그들의 일터는 최대한의 노동력을 싼값에 뽑아내기 위해 최소한의 청춘, 삭제된 삶을 강요했다. 가난과 질병과 가부장제는 이들을 두 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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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성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서운 점은,
내가 내일 유럽을 가고 싶다하면 유럽을 갈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 워홀을 하고 싶다하면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고,
공부를 한다면 공부를 할 수도 있는 무궁무진한 자율성에서 살아가는데,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병속의 벼룩처럼.
The End of Solitude
(아래 원문 발췌)
현대인의 자아는 무엇을 원하는가?
카메라는 유명인 문화를 만들어냈고, 컴퓨터는 연결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 두 기술이 융합되면서, 즉 광대역 인터넷이 웹을 텍스트 중심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전환시키고,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가 상호 연결의 그물을 점점 더 넓게 펼쳐 나가면서 이 두 문화는 공통된 충동을 드러내고 있다.
유명세와 연결성은 모두 ‘알려지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자아’가 원하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고, 연결되기를 바란다. 즉, 눈에 띄고 싶어 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도 실재하는 존재가 된다. 현대인의 가장 큰 공포는 익명성이다. 라이오넬 트릴링의 말이 옳다면, 낭만주의에서 자아의 토대가 되었던 속성이 ‘진실성sincerity’이었고, 모더니즘에서는 ‘진정성authenticity’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가시성visibility’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며, 그런 삶에서 사라지는 것은 고독이다. 기술은 우리의 사생활과 집중력을 빼앗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도 앗아가고 있다.
가시성은 우리의 자존감을 지탱해 주며, 진정한 유대감을 대신하는, 두 단계나 떨어진 대안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로움을 느끼기는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텔레비전은 할 일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배울 필요성을 없애버림으로써 그 시간을 즐기는 법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상태를 오히려 두려운 것으로 만들고, 그런 예감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지루해지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켠다. (이제 폰으로 바뀌었다.)
지루함은 자극을 갈구하는 시장을 창출한다. 때문에 소비 사회는 우리에 지루함을 조건지우려 한다.
지루함이 TV 세대의 대표적인 감정이라면, 외로움은 웹 세대의 대표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능력, 즉 한가함을 누릴 능력을 잃었다. 그들은 혼자 있는 능력, 즉 고독을 누릴 능력을 잃었다.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한 마음을 믿지 않는다.
소통은 자기 자신이나 친한 지인보다는 세상의 대중을 대상으로, 언어적 표현보다는 시각적 표현을 통해, 서사적·분석적 방식보다는 공연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모든 면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이에 대한 감각과, 그 깊이를 숨겨두는 것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고독이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온전함을 지킬 뿐만 아니라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사회와 거리를 두는 것은 사회를 넘어서는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에머슨은 고독에 대해 “천재에게 고독은 엄격한 친구”라고 말했다. “자신의 종족에게 영감을 주고 이끌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동행하는 것, 그들의 의견이 만들어낸 일상적이고 낡은 멍에 속에서 생활하고, 숨 쉬고, 읽고, 쓰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지적·도덕적 합의의 흐름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특히 청년기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에머슨은 덧붙였다.
에머슨은 대학이 학생들에게 “별도의 방과 난로”, 즉 고독을 누릴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믿었다. 물론 오늘날 대학들은 학생들이 자해 행위를 저지르거나,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품을까 봐 그들이 혼자 있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개인적이든 사회적, 예술적, 철학적, 과학적, 도덕적이든 진정한 탁월함은 고독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성자와 시인은 가장 공적이고 보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적 생활을 추구한다.”라고 에머슨은 말했다.
고독은 쉽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것도 아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고독은 언제나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영역이었다.
빈둥거리며 자신의 영혼을 초대하는 것을 선호하고, 남들과는 다른 리듬에 맞춰 걷는 젊은이들-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이 바로 그 예외일 것이다.
문화의 흐름을 되돌릴 힘은 누구에게도 없다. 자신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정도는 언제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인기가 없어도 괜찮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고독에 대해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것이 그리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로는 고독이 길러내는 ‘이중성’, 즉 한 발 물러서서 냉정하게 삶을 관찰하는 능력이 우리를 동료들에게 다소 불쾌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교제를 피하는 데 내재된 불쾌감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친근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하루 세 번, 식사 시간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의 문자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친근함-가벼운 미소, 예의 바른 관심, 가식적인 초대-을 핵심 미덕으로 삼아 왔다. 우정은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친근함은 보편적이다.
'사교적인gregarious'이라는 단어가 '무리의 일원'을 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소로는 자기 내면의 평정을 지키는 것이 몇몇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이웃들을 불편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다. 고독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홀로 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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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성이 육아와 가사 노동에 몰두하다가 가족 모두 잠든 새벽에 읽고 쓴다. 미국 작가 오드리 로드가 말했듯, 글쓰기의 형식은 계급적 문제이자 동시에 젠더 문제다. 산문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 종이, 타자기(컴퓨터), 결정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마이크로 단편’이라고 할 정도로 짧은 글이 많은 데이비스의 이야기는 독박 육아를 하는 여성도 짬짬이 읽을 수 있다. 이주혜 번역가는 “데이비스의 글에는 아무리 짧아도 여운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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