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지와 보드카로 삶의 고통을 잊으려는 사람들이 육체의 욕망에 유혹받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누나’라 부르며 이야기를 듣고, 이름을 불러주고, 함께 울어주는 일이 알료샤 자신의 일이 된 것은 그에게서 다시 믿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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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샤, 당신 무릎에 좀 앉게 해줘, 자, 이렇게!” 그러면서 그녀는 갑자기 냉큼 톡 튀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작은 응석꾸러기 고양이처럼 웃으면서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아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그의 목을 휘감았다. “내가 당신을 즐겁게 해 줄게, 신앙심 돈독한 우리 꼬마 양반!” (146-147쪽)
형과 아버지를 파멸로 끌고 가는 무서운 여자인 줄 알았던 그루셴카는 경건하게 조시마 장로의 죽음을 애도하고, 알료샤를 가엽게 여겨준다. 그루셴카에게 뜻밖의 위로를 받은 알료샤는 그녀를 ‘누나’라 부르며,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보물 같은 영혼이 자신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말한다.
존경했던 목회자들에 대한 실망도 겪다 보니까,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고요, 이후에는 공허와 허무가 찾아왔어요. 여태까지 지켜왔던 신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오는 허무. 당시엔 이런 감정들에 이름 붙이지 못했지만 #신앙사춘기 라 이름을 붙이며 감정들에도 이름을 붙이게 되었죠
발달장애인들이 오롯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포함하여 세상 곳곳에서 사익이 바로 세워지는 것을 볼 때 저는 비로소 진정한 십자가가 세워졌노라고, 당신의 협력하는 손들이 모여 공익을 이루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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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애인의 권리는 신체와 생명의 안전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장 투표를 못 한다고 하여 어딘가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게 아니므로 기다리라는 겁니다. 장애인의 요구가 최소한의 범위에서 벗어날 때 사회는 너무나 쉽게 ‘입법 재량’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로 권리 보장을 뒤로 미룹니다.
딸은 아빠와 함께 다녔던 교회에 오는 걸 너무 힘들어해서 지금 못 나오고 있거든요. 아빠가 늘 앉아있던 자리만 봐도 마음이 아픈가 봐요. 남편이 아이들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했거든요.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정해진 답 외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참 조심스러워요. 동성애나 차별금지법 같은 주제들이 그렇죠.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들이 너무 쉽게 ‘악마화’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참 아파요. 그럴 때 복상을 읽으면 ‘나만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용기를 얻어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 부동산에 묶여버리면 공동체가 자원을 나눠 쓸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쪼개지면 그곳이 지옥이겠죠. 만약 기독교인들이 먼저 부동산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견지했다면, 세상 사람들은 대통령의 정책보다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을 더 신뢰하고 의지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