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가까워진 만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어요 그러다 손끝이 가까워지면 누가 먼저 거리를 두는지 잠시 기다렸고요 가까이서 숨을 나누고 닿을 듯한 입술 사이로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이상하죠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으니까
약지에 이상할 만큼 선명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오래 끼고 있었던 탓인지 살이 눌린 자리만 깊게 패여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희미하게 자국이 따라왔죠 그런데 당신과 있으면 이상하게 그 흔적조차 잊게 돼요 그래서인지 당신 앞에서는 그 손을 굳이 감추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묻지 않았고요
어떤 것은 수평으로 태어나고 어떤 것은 수직으로 태어난다 하나는 끝없이 밀려와 닿으려 하고 다른 하나는 오래 서서 바라보는 법을 안다 서로를 해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닿는 방식이 달랐다 밀려오는 것은 물러섬을 거절로 오해했고 물러서는 것은 덮쳐오는 마음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였다
자기 전에는 창문을 꼭 닫고 커튼을 치고 방문을 닫고 백색소음을 틉니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더군요 당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어떤 소리도 소음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의 심장과 내 심장이 가장 가까웠던 그 순간만 자꾸 떠오릅니다 내 심장은 언제부터 당신 증거가 된 겁니까
어떤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어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느냐의 문제라서요
그 말랭이인가 말랑이인가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 같은데 아니 우리 애가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집에 왔는데 웬 고무덩어리를 주물럭거리길래 만득이가 다시 유행하는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만득이 좋아하냐 물었는데 표정 싹 굳더니 방으로 들어가더라 내가 뭐 잘못했나? 만득이가 어때서
어째서인지 눈 앞의 증거들은 점점 흐려지고 그 여자만 선명하게 서있다 마치 안개 속에서 혼자 초점을 맞춘 사람처럼 그래서 더 불안했다 범인을 찾는 일보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그 여자가 범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자꾸 그 여자를 범인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