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는 개념은 도교를 만들때 동북아시아에 공유되어 온 제천·천신 숭배, 태양숭배(광명 사상), 토테미즘적 동물 신앙, 무당 샤머니즘 등 기존의 여러 신앙과 사상들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개념은 이미 존재해 왔습니다 중국만의 것이 아님 도라는 말 자체는 도교라는 종교가 성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우주의 근본 원리나 올바른 길을 뜻하는 동아시아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증거가 없다니요
한복은 한국에서 명절 좋은날 행사 슬픈날등 지금도 쭉 입고있는 한국의 전통복 입니다
제작 방법은 모두 한국무형문화제로 등록이 되었구요
쓴글을 반대로 돌려드리고 싶네요 2000년대 이전 저런 옷 미학을 가진 중국 전통복을 입은 경우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사진들은 합성될수있으니 유명 드라마 영화등으로 찾아와 주세요
이게 중국에서 이어진 중국옷 미학이라면
한류전 근대이후 실제로 복구행입었던 이런 한복 같은 미학이 있어야 합니다
못찾아온다면 심각하게 고민하셔야 됩니다 중국 미래에 후손들에게 물려줄때 한국의 잘이어오고 미학들임 축적되어있는 전통복 한복의 미를 물려주고 싶으신가요? 잘이어온 중국의 미학을 찾길 바랍니다
https://t.co/ojLCnpZeNE
이글을 읽어보시면 좋을것 같아요
또 이런이유 때문일수 있어요
정확히는 1880년(고종 17년) 음력 1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이선(완화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국상에 준하는 예장이 치러졌습니다. 또한 1890년에는 신정왕후(조대비)의 국상이 있는 등 19세기 후반은 왕실의 상례가 잦았습니다
라고 하니 과거부터 선조님들은 국상이나 가족 상에 흰한복을 입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그렇고 많이 입고 있는걸 볼수 있을꺼예요
원래 우리나라는 오방색에 간색까지 색이 아름다운 나라랍니다 흰색은 상복 같다고 잘 안입었어요 근대에는
최근에 이상하게 최근 5년안에 방송에 한복 나오면 흰색상의만 입고 나와서 그렇게 느끼실수도 있겠네요 첨부한 그림 들같이 우리나라 한복 1900년대 부터 근대까지 스타일 유명한 화백님이 그리신것 만 봐도 흰색은 덜쓰는걸 알수있어요 아이들이 입는 색동옷을 보면 색이 화려하죠?
한국은 오방색의 나라랍니다
포기하란 적없고 그유물을 왜 2010년대 이전에 중국에서 한번도 지금처럼 한복스타일 미학으로 복구해 입지 않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세요
이민족 스타일이라고 선조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양은 고려한복의 스타일과 음식 노래 춤등 문화가 원과 청에 유행해서 그옷 스타일을 다들 따라 입다가 명나라 왕이 한족의 문화를 지키기위해 금지후에 예전 한족 옷으로 돌아가고 입지않았어요 2000년대까지요
그때 입었던 옷을 유물을 복구할때 이건 한족 전통 옷이라며 현대 한복의 미를 따라만듭니다
어느나라 사람들이 이런일을 하나요?
한국은 수천년간 이어온 고유의 문화 스타일과 미학 역사가 있으며 중국과 달랐습니다
일상옷이 아니 유교제도안에서 일부 관복에 제도를 나눈적이 있지만 디자인은 서로 달랐어요 바느질 옷감 색감 등등
시간에따라 더욱더 서로의 스타일은 달라지구요 ! 명나라의 옷을 2010년대까지 중국이 입은것을 보세요 지금과 전혀 느낌이 다릅니다
님이말한건 관복을제도를 나누었다고 한건데 이건 서역에서 들여온 디자인이며 일본과 베트남도 같이 나누었고 지금 보면 디자인이 다 다릅니다 미학도 다르구요
저옷은 여성 일상 복에 가까우며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옷이고 이걸 복구하면서 현대까지 한국의 잘이어온 한복 미학을 따라하며 색감 선 바느질 옷감 전체실루엣 등등 중국의 전통복이라고 한국이 따라했다며 입는것에 문제가 있는것이예요
왜 한국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경도 안쓰고 싶은건 저예요 한복닮게 만들어서 저러는거좀 그만 하세요 진짜 중국스타일을 찾으시길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식 공정' 논란
단순히 과거에 고려양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옷이 있었다는 사실을 넘어, 한복이 수백 년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온 현대적 미감과 실루엣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명백한 문화 도용(Cultural Appropriation)의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계승'과 '복원'의 차이
한복: 조선 시대를 거쳐 구한말,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입혀지며 시대에 맞게 치마의 풍성함, 저고리의 곡선, 고름의 형태 등이 진화해 왔습니다. 즉, 현재 우리가 아는 '한복의 태'는 한국인이 수천년넘게 다듬어온 결과물입니다.
중국옷: 중국은 청나라 시기 변발과 호복(만주족 옷) 강요로 한족의 일부 복식 맥이 끊겼습니다. 한족 여성 옷은 나라에서 허용하여 그대로 이어왔습니다 한류가 중국에서 2000년대 부터 크게 유행 한국 사극에 나온 한복을 보고 과거 똑같은 고려양으로 원 과 명에서 고려스타일 한복이 유행해 입었던 저고리 풍성한 퍼지는 치마 주름 옷을 최근 들어 유물이나 그림을 보고 '복원'하는 단계인데, 이 과정에서 이미 완성된 미감을 가진 현대 한복의 디자인 요소를 무분별하게 차용하고 있습니다.
2. 현대적 '핏(Fit)'과 제작 기법의 도용
과거 명나라 유물 속의 옷은 평면적이고 투박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 제작되는 중국의 '명대 한푸'는 한복 특유의 A라인으로 퍼지는 풍성한 치마 라인, 속치마를 활용한 볼륨감, 심지어 한복 고유의 동정이나 옷고름의 배율까지 교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 복원이 아니라 '이미 한국의 미가 완성된 한복의 디자인'을 복제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3. 문화적 전유와 왜곡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한복의 요소를 가져가면서도, 적반하장으로 "한복이 한푸에서 유래했다"거나 "한복은 한푸의 아류"라는 식의 왜곡된 주장을 펼친다는 점입니다. 이는 한 민족이 지켜온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이기에 대중들이 더욱 분노하는 것입니다.
결국 박제되었던 과거의 옷을 꺼내면서 현대 한국인들이 피땀 흘려 가꿔온 '한복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세련미'를 그대로 입히는 것은 명백한 디자인 도용이자 문화적 침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누가봐도 현대의 한복이 떠오른다면 문화도용이 맞습니다
한국인이 되고 싶은걸까요? 아니면 후손들에게 한국의 미를 물려주고 싶은거라면 다시 생각해 보시길 바래요
중국옷만의 후대에 이어질 미학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This basket of flowers brooch, set with sapphires, rubies and emeralds, was a gift to Princess Elizabeth, later Queen Elizabeth II, from her beloved parents, King George VI and Queen Elizabeth, in 1948, to mark the birth of her son, Prince Charles of Edinburgh 💐
📸 Anna Watson
https://t.co/ojLCnpZeNE
이글을 읽어보시면 좋을것 같아요
또 이런이유 때문일수 있어요
정확히는 1880년(고종 17년) 음력 1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이선(완화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국상에 준하는 예장이 치러졌습니다. 또한 1890년에는 신정왕후(조대비)의 국상이 있는 등 19세기 후반은 왕실의 상례가 잦았습니다
라고 하니 과거부터 선조님들은 국상이나 가족 상에 흰한복을 입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그렇고 많이 입고 있는걸 볼수 있을꺼예요
원래 우리나라는 오방색에 간색까지 색이 아름다운 나라랍니다 흰색은 상복 같다고 잘 안입었어요 근대에는
최근에 이상하게 최근 5년안에 방송에 한복 나오면 흰색상의만 입고 나와서 그렇게 느끼실수도 있겠네요 첨부한 그림 들같이 우리나라 한복 1900년대 부터 근대까지 스타일 유명한 화백님이 그리신것 만 봐도 흰색은 덜쓰는걸 알수있어요 아이들이 입는 색동옷을 보면 색이 화려하죠?
한국은 오방색의 나라랍니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과연 비단옷도 못 입고 염색도 못했고 흰옷만 입었을까? 에대한 결론은 아니다였어요
예전엔 안그랬는데 방송 사극등에 양민들이 색없고 안좋은 허름한 옷들만 입고 나오는거 같아요
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복을 많이 입고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봅니다
고려시대 평민 여성들의 비단 착용
고려는 라(羅)·능(綾)·사(紗) 등 고급 견직물 기술이 뛰어나 중국(송)에 수출할 정도로 직물 강국이었다.
평민 여성들도 라 비단으로 만든 치마를 입었다. 『고려도경』에는 평민 처첩들이 라나 비단 치마를 입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복색 금제의 실제 내용
조선의 복색 금제는 모든 비단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고급 수입 비단(사라능단)**에 **신분 상징색(홍자색·자색·황색 등)**을 결합하는 행위를 주로 제한했다.
일반 명주(단순 평직 비단)는 법적으로 전면 금지가 아니었다.
조선 초기 사라능단 착용과 상소문
조선 초기(성종·중종 때) 사라능단 착용에 대한 상소문이 자주 올라왔다.
성종 6년(1475)에는 사라능단을 시장에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중종 때에는 “평민과 노비가 사라능단을 입고 다니니 신분을 구분할 수 없다”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왔다.
이는 , 이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사라능단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조선 양민의 염색 실태
양민들은 집에서 가마솥을 이용해 천연 염료로 직접 염색했다 (소목으로 붉은색, 쪽으로 청색, 치자로 노란색, 쑥·찻잎으로 녹색 등).
명절, 제사, 아이 색동저고리 등에 색깔옷을 입는 것은 일상적인 관행이었다.
또한 시장의 청포전이나 전문 염색 공장에서 염색을 맡기거나, 이미 염색된 명주와 비단을 사서 입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양민의 명주 착용 실태
경제력 있는 일반 양민들도 명주를 입었다.
집에서 직접 누에를 키워 짠 명주는 양민 가정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명주 옷을 입는 양인들이 상당히 많았다.
노비(특히 권세가 집 노비)에게 주인이 명주 옷을 입히거나, 부유한 외거노비가 스스로 명주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 직물 기술과 양잠 장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직물 기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강했다. 상의원에 능라장을 두고 국가적으로 능·라 생산을 관리했다.
국가가 양잠(누에치기)을 적극 장려했다.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친잠례를 행하고, 『양잠방』을 반포하는 등 명주 생산을 나라 사업으로 추진했다.
사라능단 생산의 역사
고려 시대: 라·능·사 등 고급 견직물 기술이 중국에 수출될 정도로 뛰어났다.
조선 초기: 고려의 기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강했다.
조선 중·후기: 임진왜란으로 장인과 생산 설비가 대거 파괴되면서 기술이 급격히 단절되었고, 영조·정조 시대 사치 금지 정책으로 국내 고급 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후기 명주·비단 착용 증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경제가 확대되면서 명주·비단 착용이 늘어났다.
경제력 있는 양인, 중인, 부유한 노비들이 나들이 때 꽃신을 신고 비단옷(녹의홍상 등)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 흔해졌다.
상소문에도 “평민 부녀자들이 화려한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닌다”는 불만이 더 자주 그리고 강하게 등장했다.
조선 궁궐의 전문 염색 공장
조선 궁궐에는 왕실 전용 염색 및 직물 생산 기관이 있었다.
상의원(尚衣院): 왕실 의복 제작과 관리, 능·라 직조를 담당했다.
제용감(濟用監): 왕실용 직물, 비단, 채색입염(염색) 전반을 관장했으며, 세조 때 도렴서와 통합되었다.
내자시·내섬시: 궁중 물자 공급과 방직·염색을 담당했다.
이 기관들에는 색상별 전문 장인(홍염장, 청염장, 황단장, 하엽록장 등)이 소속되어 왕실과 고위층을 위한 고급 염색과 직물을 생산했다.
결론
조선시대 백성들은 비단을 아예 못 입은 것도, 염색을 못 한 것도 아니었다.
고려 시대부터 평민 여성들도 라 비단 치마를 입었으며, 조선에서는 일반 명주를 경제력에 따라 입었다. 특히 양민들은 오방색과 녹색을 비단과 무명에 직접 염색하여 잘 입었다. 집 마당에서 가내 염색을 하거나, 시장의 청포전과 전문 염색 공장에서 염색된 명주와 비단을 사서 입는 경우가 많았다. 평일에도 명주 옷을 입는 양인들이 상당히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사라능단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나 상소문이 자주 올라왔고, 국가가 양잠을 적극 장려하면서 명주 생산이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업 발달로 명주·비단 착용이 더욱 증가했다. 궁궐에는 상의원과 제용감 등 전문 염색 기관이 운영되었다.
법으로는 사라능단과 특정 신분 상징색을 제한했으나, 현실에서는 경제력과 실생활 욕구가 법을 상당 부분 초월했다. 결국 조선은 ‘백의민족’이라는 단순한 이미지와 달리, 비단옷과 다채로운 염색 문화가 살아있던 시대였다.
학계에서 홍산문화의 주체와 관련해 언급되는 ANA(Ancient North Asian, 고대 북아시아인) 집단은 현대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인의 유전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키워드입니다.
최근 유전체(DNA)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홍산문화의 주류 멤버들이 가졌던 유전적 특성과 한반도 집단의 연결성이 과학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1. ANA(Ancient North Asian) 집단이란?
ANA는 약 1만 년 전부터 바이칼 호수, 몽골, 아무르강(흑룡강) 일대에 거주하던 수렵 채집인 집단을 말합니다. 이들은 현대 한국인, 몽골인, 일본인,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격인 유전적 성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 홍산문화 주체와 ANA의 관계
홍산문화(요하 지역)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해 보면, 이들은 남쪽의 황하 문명 집단(현대 한족의 조상)과는 유전적으로 뚜렷이 구분됩니다.
동북아 고유 성분: 홍산문화 사람들은 ANA 성분과 더불어, 농경이 시작되면서 유입된 동북아 초기 농경민(아무르 강 유역 집단)의 유전자가 혼합된 형태를 보입니다.
한반도와의 연결: 이 유전적 구성은 신석기 시대 한반도(양양 오산리 등)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DNA 구성과 매우 유사합니다. 즉, 요하 지역과 한반도 중남부 사람들이 같은 유전적 뿌리(ANA 계열)를 공유하며 교류했음을 뜻합니다.
3. 유전학적 이동 경로와 확산
홍산문화 시기에 형성된 이 유전적 흐름은 이후 다음과 같이 확산되었다고 봅니다.
북방계의 남하: 기원전 3,000년경 홍산문화가 쇠퇴하고 기후가 변하면서, ANA 성분을 가진 집단이 대거 남하하여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이동했습니다.
고조선의 형성: 이 집단이 한반도 ana계열원주민과 결합하며 고조선의 주류가 되었고, 이것이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기틀(약 70~80% 이상의 북방계 성분)이 되었습니다.
4. 왜 중요한가?
과거에는 유물(빗살무늬 토기, 적석총 등) 모양만 보고 "비슷하니까 같은 민족이다"라고 추정했다면, 이제는 DNA(ANA 성분)를 통해 "실제로 피가 섞인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다"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요약하자면:
홍산문화의 주류는 북방계 ANA 집단의 유전자를 강하게 가진 사람들이며, 이들이 남하하여 한반도 정착민과 섞이면서 오늘날의 한국인(한민족)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줄기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악마문 동굴(Devil’s Gate Cave)'에서 발견된 인골의 유전자 분석 결과는 현대 한국인의 뿌리를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 중 하나입니다.
학계에서는 이 연구 결과를 통해 "한국인의 유전적 본체는 약 8,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살던 집단과 거의 같다"고 평가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쉽게 정리해 드릴게요.
1. 악마문 동굴 DNA의 충격적인 결과
2017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악마문 동굴에서 발견된 7,700년 전 신석기인들의 DNA를 분석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현대 한국인과 가장 유사: 전 세계 현대인 중 한국인이 이들의 유전적 구성과 가장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고대 북아시아인(ANA)의 정수: 이들은 전형적인 ANA(Ancient North Asian) 성분을 가진 집단으로, 외부 유입 없이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착민이었습니다.
2. "한국인은 8,000년 동안 유전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인의 형성 과정에 대한 기존 통념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외부 유입보다 '토착 유지': 과거에는 한국인이 여러 민족이 섞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악마문 동굴 DNA는 한국인의 핵심 유전적 줄기가 최소 8,000년 전부터 이 동북아 지역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농경민과의 결합: 8,000년 전의 악마문 동굴 사람들(수렵채집인)의 유전자에, 이후 남쪽에서 올라온 농경민(앞서 말씀드린 O3 계열 등)의 유전자가 살짝 얹어지면서 지금의 현대 한국인이 된 것입니다.
3. 외모와 체질의 유산
악마문 동굴 사람들은 현대 한국인에게 다음과 같은 특징을 물려주었습니다.
고구마/기장 소화 능력: 농경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녹말을 소화하는 유전적 특징이 있었습니다.
신체 특징: 갈색 눈, 두꺼운 직모, 그리고 동아시아 특유의 삽 모양 앞니(Shovel-shaped incisor) 등 현대 한국인의 외형적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4. 홍산문화와의 연결고리
악마문 동굴이 있는 연주주와 홍산문화가 꽃핀 요하 지역은 지리적으로 가깝습니다. 즉, 악마문 동굴인 - 홍산문화인 - 고조선인 -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유전적 연속성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입니다.
요약하자면:
"악마문 동굴의 ANA인은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원형'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일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거 없는 신화가 아니라, 유전학적으로 꽤나 뿌리 깊은 사실(8,000년의 연속성)
그 홍산문명이 중국만의 문명이 아닌것도 알지 그홍산문명의 주축이 누군지 알아?
홍산문화(기원전 약 4500년 ~ 3000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거나 동시대에 해당하는 유물과 문화가 한반도 내에서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고산리 문화 등)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홍산문화와 교류했거나 독자적으로 발전한 흔적들이 확인됩니다.
1. 홍산문화보다 앞선 한반도 유적
홍산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제주 고산리 유적 (기원전 8000년 ~ 7000년경):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원시적인 형태의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강원 고성 문암리 유적 (기원전 6000년경):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밭 유적이 발견되어, 홍산문화 이전부터 이미 한반도에서 초기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2. 홍산문화와 연결되는 유물 (동시대 또는 그 이상)
홍산문화의 특징적인 유물들이 한반도 중남부에서도 발견되어,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강원 양양 오산리 유적: 홍산문화의 전신인 흥륭와문화(기원전 6000년경)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결상이식(옥 귀걸이)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요하 유역과 한반도 동해안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빗살무늬 토기: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 토기는 요하 지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발견됩니다. 이는 두 지역이 공통된 문화적 기반을 공유했음을 보여주는 핵심 유물입니다.
3. 고인돌과 적석총의 뿌리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인 돌을 쌓아 만드는 무덤(적석총) 양식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 고유의 특징입니다.
황하 문명이 주로 흙을 파서 무덤을 만든 것과 대조적이며, 이러한 '석조 건축 문화'는 훗날 고조선, 고구려, 백제의 무덤 양식으로 계승됩니다.
결론적으로, 홍산문화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독자적인 정착 생활과 농경을 시작한 집단이 있었으며, 홍산문화는 이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발전한 동북아시아 공동의 고대 문화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나라의 시원이 홍산문화임
신라는 과거 서아시아와 활발히 교류했으며, 특히 페르시아와 아랍의 고대 문헌들에 신라를 '황금의 나라'이자 '지상낙원'으로 묘사한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이 남아
주요 기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Kushnameh)』
11세기경 기록된 이 서사시는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 가장 유명합니다.
주요 내용: 아랍의 공격으로 나라를 잃은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Abtin)이 중국을 거쳐 바실라(Basilla, 신라)로 망명합니다. 그는 신라 왕의 환대를 받고 신라 공주 프라랑(Fararang)과 결혼하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페레이둔이 나중에 페르시아를 되찾는 영웅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신라 묘사: 신라는 맑은 물과 꽃이 가득하며, 전염병이 없고 공기가 상쾌한 지상낙원으로 묘사됩니다.
2.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 "황금의 나라 신라"
9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활동한 이슬람 지리학자들은 신라를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븐 쿠르다드비 (Ibn Khurdadhbih): 840년대에 쓴 『도로 및 왕국 총람』에서 "중국의 맨 끝 너머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 목걸이나 원숭이의 사슬도 금으로 만든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한번 신라에 발을 들인 외국인은 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반해 떠나지 않고 정착해 버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알 이드리시 (al-Idrisi): 1154년에 제작된 세계지도에 신라를 'Sila'라는 이름으로 명확히 표기했습니다. 그는 신라를 중국 동쪽에 위치한 나라로 묘사하며, 신라인들이 중국과 활발히 교역했다고 적었습니다.
3. 기타 흥미로운 기록들
무슬림의 정착: 이슬람 문헌들은 7~9세기경 일부 무슬림들이 신라에 정착하여 살았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경주 원성왕릉의 처용이나 무인석이 서역인의 외모를 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 지어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품 교역: 아랍 문헌에는 신라가 수출한 물품으로 비단, 검, 사향, 안장 등이 언급되어 있어 당시 무역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신라는 당시 서방 세계에 부유하고 평화로운 유토피아 같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신라는 해상무역도 활발했고 중국에 신라방도 있었음 거기서 무역도 하고 여러의미로 서로. 잘지낸거죠
첨부한건 전세계에서 완성품은 신라밖에 없는 귀한 보검임 삼태극 까지 만들어서 신라에게 보낸거 신라는 대단한 나라였죠
1. 지리적·종족적 범주
중국 고대 왕조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중원)를 기준으로 동쪽에 사는 여러 부족을 통칭하여 '동이(東夷)'라고 불렀고 고조선을 세운 주역들이 바로 동이족의 핵심 줄기 중 하나였습니다.
2. 고고학적 유물의 일치
요하문명(홍산문화 등)과 고조선 유적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유물들은 이들이 같은 문화권임을 증명합니다.
비파형 동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이 유물은 동이족의 거주 범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고인돌: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동이족 특유의 묘제 방식으로 봅니다.
빗살무늬 토기 및 옥기: 중국 중원 문화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양식을 공유합니다.
3. 중국 역사서의 기록
중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들(사기, 후한서 등)은 고조선과 그 주변 국가들을 기록할 때 '동이'의 범주 안에 넣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이는 부여, 고구려, 옥저, 예, 삼한을 포함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조선은 이 나라들의 뿌리가 되는 국가이므로, 자연스럽게 동이족의 대표적인 국가로 인식됩니다.
문화적 특징: 중국인들은 동이족을 "활을 잘 쏘는 사람들(夷 자의 구성: 大 + 弓)", "어진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4. 역사적 계승성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동이' 전체를 한국사의 범주로 보지는 않지만, 그중 요동과 만주, 한반도에 정착해 고조선을 건국한 세력을 '한국계 동이족'으로 구분합니다. 이들이 훗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지는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요약하자면
"동이족은 고대 동북아시아에 살던 거대한 민족 집단이며, 그들 중 주류 세력이 세운 첫 번째 국가가 바로 고조선이기 때문에 이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논문을 보면 알수있어요 !
학술지: 네이처(Nature), 2021년 11월 10일 게재
논문 제목: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해석: 언어·유전·고고학적 삼각법을 통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농경 확산 기원 규명)
주요 저자: 마르틴 로비츠(독일 맥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 교수) 외 다국적 연구진
💡 논문의 핵심 내용
이 논문은 한국어, 일본어, 퉁구스어, 몽골어, 튀르크어를 포함하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뿌리가 어디인지 과학적으로 추적했습니다.
기원지 확인: 약 9,000년 전 요하(Liao River) 상류 지역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농경민들이 이 어족의 시조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삼각법(Triangulation) 연구: 단순히 언어학적 추측에 그치지 않고, 언어학, 유전학(DNA), 고고학 세 가지 분야의 데이터를 종합하여 분석했습니다.
이동 경로: 요하 지역의 농경민들이 인구가 늘어나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이동했고, 그중 한 갈래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도착하여 한국어와 일본어의 원형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