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꼭 알아두어야할점
현대한국인은 퉁구스의 문화와 섞인것을 인지해야한다.
첫번째 위지 동이전 부여왕의 정체다
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爲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부여국은 원래 오래전 예인들의 땅이었는데 그 예인의 땅으로 부터 북방에서
부여왕이 망명해와 그땅에 부여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즉 부여의 왕은 퉁구스계고 백성은 예맥계인 이었다는 것.
정확히 이 시점은 한나라가 흉노를 멸망시켜 흉노 일파가 동과 서로 나뉘어
도망가던 시기다.
즉 부여국은 이 흉노의 망명인이
예맥의 땅 즉 고조선의 땅에 세운 정권이라 볼수있고 당시 흉노의 황제칭호
즉 천제(天帝)를 탱리고도, 그리고 탱그리를 하늘이라했다.
즉 단군신화는 이것을 반영한것이다.
원래 동명왕신화는 부여국신화로
한참뒤에 고구려가 4~5세기경 이
신화를 차용한다. 이 사실은 후한서와
동이전을 보면 알수있다. 고구려에 이신화가 편입되는 시기는 양서가 만들어질때다. 즉 하늘의 천자를 두고
흉노와 중국이 경쟁하였고 예맥인이라고 나오는 고구려는 중화와는 다른 독립적 정치적 천손설을 위해 중화 천자의 후계자를 선택하지않고 부여계 천제(天帝) 설화를 그대로 차용하였다.
당시 지배층 국왕이 이민족인 경우는
흔한일이고 부여는 흉노계(몽골선비계) 왕가와 예맥계 국민을 가졌고
고구려가 그 신화를 이어받아 예맥족만의 국가를 세운것이다.
예맥족이 이 퉁구스 천손과 정치제를 받아들인것은 마한을 제외하고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 진한 변한 까지
광범위했다.
마한은 그 지도자의 명칭이 읍차 신지이지만 진한 변한은 칸(간) 간기 거사간을 썼다. 즉 백제 고구려의 키시 개와 통하며 칸이라는 호칭자체가 본래
흉노 퉁구스 기원이다. (마한의 경우
묘제도 옹관묘로 고립되어있고
기록상 진한과 언어도 다르다고 한반면
진한의 묘제는 북방계이고 예맥인인 낙랑과 동종이라고 나온다)
즉 고려때도 이 사실을 알고있었고
고구려수도가 있던 평양주위 수도권에서 단군신화가 보존되고있었던것이다.
예맥 고구려의 말과 부여 피지배층의 예맥어와 백제의 예맥어 진한의 예맥어는 서로 통하였으나. 순수 부여의 지배층의 언어는 거란계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고구려와 부여는 그 묘제가 다르고 문화도 상당부분 차이가 있으며
정치적 남부여를 자칭한 백제는 고구려의 양식은 다량나오지만 부여의 흔적은 없다.
이후 신용도가 떨어져 더러운 역사서적이라고 불리는 북위의 魏書(위서)와
정확도 논란이있는 신당서에서
두막루국(달말루)은 신당서에서 북부여의 후예라고 자칭하고(백제와
같은 정치적 자칭일 가능성이 높음)
북위의 魏書에서는 두막루 언어는 고막혜,실위,거란과 같다고 나온다. 다만 같은 魏書에서 이들은
고구려가 두막루와 언어가 같다는 소리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당시 고구려는
이미 평양에 천도할때 즈음이다.
즉
정리하면 예맥인들이 세운 고조선과
예맥문화권은 만주와 영남까지 퍼져있었는데.
한나라가 탱그리신앙을 가진 흉노를 반갈쭉내 기원전 3~2세기 시점에서 예맥지역에 선비계 왕이 도망와서 부여를 건국하고 이때 예맥문화권에 칸의 개념과 천손신앙 탱그리신앙이 심어진것으로본다.
그리하여 한국어는 퉁구스어계가 아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퉁구스와 밀접하다고 볼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