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에서 맞이한 눈비 내리는 겨울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어깨에 포를 둘러주는 선호의 손길을 섬은 한 번 거절했습니다. 겨울을 견디는 데는 내가 그대보다 더 솜씨가 좋아. 그이의 예쁜 숨이 답하기를, 충애라 불러주심이 어떠합니까. 이 모진 이름 뒤에 숨어 우리 조금만 더 눈맞춤을 가집시다.
⏾ 드림주와 드림캐의 모호한 관계는 정의 내려야 문제가 사라진다 vs 정의 내리려 하는 순간 재앙이 시작된다
말하지 않을 사랑 대신 다른 이름을 서로에게 붙여 두었습니다. 최초의 이름은 벗이었고, 후에는 부친의 칼과 주군의 여식으로 서로를 정의합니다. 서운하기는 해도 안전한 도피처지요.
섬이 겪은 비극에 정안군은 내심 기뻐하였고 부마는 퍽 아쉬워하였는데, 정작 선호와 섬은 마음을 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비 모를 아이를 자연히 잃었음에 함부로 숨을 돌려도 될는지. 젖먹이 조카를 어르던 품을 섬은 오래 내려다보았습니다. 선호는 감히 그 시선의 까닭을 묻지 못했습니다.
1394년 한양 천도 당시 섬은 개경에 남아 있었습니다. 유산으로 몸을 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명으로 떠난 오라비 대신 갓 출산한 새언니와 조카를 돌본다는 명분이 있었지요. 선호도 섬의 곁을 지켰습니다. 몇 달 전 섬이 쏟아낸 핏덩이를 떠올리지 않으려 거듭 고개 저으면서요.
섬의 혼처는 계모와 오라비들의 지난한 힘겨루기 끝에 결정되었습니다. 어느 쪽에도 보탬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 차라리 가장 못난 사내로 골라주오. 큰 오라비들은 웃으셨어요. 이것이 지아비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 하는구나. 다섯째와 섬의 심중에만 세상 고운 또 다른 사내가 스치웠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