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땅한 형벌들의 부과를 각각 주체의 지점과 전체(혹은 실체나 구조)의 지점에서 작동시킬 때,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지점(혹은 그 과정에서 극복되는 몰인식의 지점)에서 쟁점들을 찾아내는 데에 있으리라. 헤겔을 넘지 못했다는 말은 이제 그 이질성에서 진리치를 획득할 것이다.
이제는 사회적 심급 전반으로 확장하여 투사하는 레비-스트로스를 볼 뿐, 구조주의가 헤겔이 선취한 지점에 미치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위치 에너지의 쟁점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칸트나 헤겔의 이름으로 기소권을 확보하는 것보다, 칸트나 헤겔이라는 처벌을 각 철학자들에게 선고하여
도리어 헤겔은 쟁점 없는 무차별적 심급으로서 다소 새삼스러운 이름이 되는 게 아닐까? 라캉은 1960년 루아요몽 수도원에서 발표한 욕망의 변증법을 통해, 혹은 장 아폴리트에 대한 반박을 통해 헤겔을 넘었을까? 데리다는 [조종Glas]에서 헤겔을 넘었을까? 리쾨르가 “선험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라고
먼저 역사가 협상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지 단지 허구가 아닌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으로-증언이던 워털루 해전에 실제로 참전했던-관계맺음에도 실증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따져보고, 뒤틀린 칸트-신의 시간을 wie es eigentlich gewesen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따져보고(즉 탈정치의 정치화), 그가 위치짓는 시간이 선형적인 것인지 따져보고, 시대별로 분명히 달라지는 지각과 지금의 대상을 연결 시키는지 따져보고(국가, 계약, 통치, 근대), ‘역사’ 없이도 잘 살 수 있던 사람들에게 말을 부여해주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세계사를 받아들일건지
랭보가 지옥에서 보낸 한철 중 착란Ⅰ: 어리석은 처녀에서 “참된 삶은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 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바로 직전 나쁜 피에서 <인권 선언>을 비꼬았다.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 초현실주의 제 1선언에서 산다는 것과 살기를 그친다는 것은 모두 상상의 해결책이다. 삶은
, 인접-유비-경합-감응, 혹은 은유와 환유라는 극단적 과정, 끊임없는 꿈을 얘기한다. 그것은 작가에게 있어 장롱의 선물과 양말주머니와 같은 관계이다-고무장갑 역시 사랑스러운 선물일 따름이다!-작가가 이것을 그릴 때 그는 미적 가상 전체를, 장롱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풍차와 거인을
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근대적 주체가 드러난다. 올랭피아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누드라는 장르지만, 얼핏 보기에 거의 동일한 도상을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달리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것은 마네가 완성한 형식 중 하나인 캔버스의 공간이 관객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더 이상
가치가 있는 것만이 ‘주체’들을 만듦과 동시에 백인의 보되 보이지 않음이라는 ‘왕의 자리’가 가시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고전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에 있는 낭만주의적 주체가 모래사장에 그려진 그림이라면, 인상주의적 주체는 그 그림이 파도에 지워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