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창고에 넣은 총
— 운전대·엔진·흰 선 1부
1543년, 폭풍에 밀린 배 한 척이 일본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에 닿았다. 섬의 영주는 배에 탄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화승총 두 자루를 사들였다.
마흔여섯 해 뒤, 같은 총 몇 자루가 조선 조정에도 들어왔다.
영주는 칼을 만들던 장인에게 똑같이 만들어 보라고 명했다. 이듬해 그 섬에는 총을 만드는 공방이 섰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주가 바친 그 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군기시 창고에 넣어 두었다. 세 해 뒤, 그 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부산진에 상륙했다.
물론 전쟁의 승패가 총 몇 자루로 갈린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물건 앞에서 한쪽은 "이것을 어떻게 만들까"를 물었고, 다른 한쪽은 창고 문을 닫았다.
도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도구 앞에서 던진 질문이 달랐다.
나는 AI 앞에 선 우리가 어느 쪽인지를 자주 생각한다. 올여름 『AI가 두려운 당신에게』라는 문답집이 나왔다. 과학기술 주무 부처가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린 책으로, 국민이 AI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 열네 가지에 답한다.
책은 사람의 일이 "좋은 답을 외우는 것에서 좋은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옮겨 가고 있다고 쓴다.
정리와 요약과 번역은 기계가 빠르고 정확하며,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일은 사람이 잘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내건 목표는 모든 국민이 AI를 한글이나 산수처럼 쓰게 하는 것이다.
AI를 자동차의 엔진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시민이 알아야 할 것은 엔진을 뜯는 지식이 아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묻고 익혀야 할 조작과 규칙의 지식이다.
엔진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누구도 엔진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잇는다.
내가 묻고, 기계가 답하고, 나는 그 답을 받아 다시 묻는다. AI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이 사슬을 더 길고 더 빠르게 돌리는 일이다.
그런데 모든 물음표가 질문은 아니다.
"우리 아이가 꼭 대학에 가야 할까요?" 냉정히 말해서 이 말은 "이 주식 오를까요?", "이 집값 오를까요?"와 똑같다.
나는 이것을 질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신 정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의 꼴을 하고 있지만, 실은 판단과 그 판단의 책임을 남에게 넘기려는 부탁에 가깝다.
진짜 질문은 판단을 내 손에 남겨 둔 채 재료를 구한다. 가짜 질문은 판단 자체를 넘긴다.
책이 사람의 몫으로 꼽은 바로 그 일,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을 스스로 내려놓는 셈이다.
질문을 하면 도구가 일을 해 온다. 그다음은 검토다. 반복적인 서류 검토가 아니다. 핵심을 뽑아낼 줄 아는 것, 그리고 이것이 오답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다.
『듀얼 브레인』을 읽고 적어 둔 문장이 있다. 길러야 할 것은 도구를 쓰는 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이 기계가 잘하는 쪽인지 못하는 쪽인지를 가려내는 능력이다.
질문과 검토는 따로 노는 두 능력이 아니라 같은 머리의 앞면과 뒷면이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아는 사람이 무엇이 틀렸는지도 안다.
딥페이크를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면 멀쩡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할 수도 있다. 그저 AI가 나쁘다고 했으니까, 혹은 좋다고 했으니까.
판단력이 비어 있는 자리에는 기계의 답이 들어앉는다.
나도 AI를 글 검수에 자주 쓴다. 이번에는 같은 물건이 모든 나라에 한꺼번에 들어와 있다. 그 앞에서 우리가 내미는 것은 질문인가, 부탁인가.
#AI가두려운당신에게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경축사가 전국에 생중계되던 중에 총성이 울렸다. 그 총성에 두 사람이 숨졌다. 영부인 육영수, 그리고 합창단원으로 식장에 있던 여고생 장봉화.
52년 뒤인 지난 9월 23일, 영화 〈암살자(들)〉이 그날을 다시 꺼냈다. 추석 연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첫 주에만 150만 명이 넘게 봤다.
당시 수사는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은 문세광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냈고, 문세광은 그해 12월 사형됐다. 의문은 그 뒤로도 남았다. 2005년 공개된 외교문서 3천여 쪽도 그것을 다 풀지 못했다.
영화는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다는 탄환 두 발을 쫓다가, 배후를 특정하지 않은 채 끝난다.빈칸은 오래 비어 있지 않았다. 그 빈칸에서 한 이름을 읽어 낸 관객들이 있었고, 한 평점 사이트에는 "좌파식 역사 왜곡"이라는 평이 올라왔다.
논쟁은 정치권으로 번져 사자명예훼손 이야기까지 나왔다. 제작진은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다며, 창작의 산물로만 봐 달라는 입장문을 냈다.
만든 이의 속은 알 수 없다. 다만 빈칸을 채운 것은 만든 이가 아니었다.
1961년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로 묶여 나온 케임브리지 강연에서, 역사가의 일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과거를 장악하고 이해해서 현재를 읽는 열쇠로 삼는 것이라고.
과거를 장악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죽은 자가 산 자를 다스린다.
2023년 11월 개봉한 〈서울의 봄〉은 12·12를 그렸다. 1997년 대법원은 그 밤과 이듬해 광주로 이어진 일을 반란과 내란으로 판결했다. 결말이 이미 판결문에 적혀 있던 영화를 천만 명이 넘게 봤다.
개봉 이듬해 겨울, 비상계엄이 실제로 선포됐다. 이튿날 그 영화의 IPTV 시청 건수는 전날의 열 배를 넘었고, 계엄이 실감 나지 않으면 〈서울의 봄〉을 보라는 글이 돌았다. 판결로 정리된 과거가 오늘을 읽는 열쇠로 쓰인 것이다.
두 영화는 같은 제작사에서 나왔다. 한 영화가 끝난 자리에는 판결문이 있었고, 다른 영화가 끝난 자리에는 빈칸이 있다.
판결문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문장을 읽는다. 빈칸 앞에서는 저마다 원하는 이름을 써 넣는다.
나라 안팎이 이미 시끄러운 가을이었다. 논쟁이 정치권으로 번진 그 주 목요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는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나왔다. 박정희는 소총 한 자루로, 노무현은 전시작전통제권으로. 그 앞에는 자주국방이 어느 한 정부만의 꿈이 아니었다는 문장이 있었다.
한 이름을 두고 사람들이 갈라선 그 주에, 두 이름은 한 대목에 나란히 놓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의혹을 덧댄 영화가 나온다면, 그때는 우파 영화라는 이름표가 붙을까. 유족이 받는 상처는 박정희나 노무현이나 똑같지 않겠는가.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무덤 속의 사람은 반박하지 못한다. 1974년의 유족도, 2009년의 유족도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
흥행의 셈은 극장 안에서 끝나지만, 갈등의 셈은 극장 밖에서 시작된다.
그 총성이 앗아 간 두 번째 목숨은 어느 진영의 깃발도 되지 않았다.
깃발이 되는 죽음만 무덤에서 불려 나온다면, 그 싸움의 값은 누가 치르는가. 무덤 속의 사람인가, 무덤 밖의 사람인가.
왜 우리는 여전히 죽은 자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게 두는가. 국민도 대통령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서로 통합으로 나아가야 할 이때에 왜 하필 이 영화였는지, 나는 그래도 모르겠다.
이런 사회적 갈등, 무덤정치가 대한민국에서 제발 사라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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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로 해 달라고 먼저 청한 쪽이 있었다. 그쪽이 세계에서 가장 큰 연단에 올라 그 비밀을 꺼냈다.
지켜 온 쪽이 아쉽다고 하자, 이번에는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했다. 9월 23일 유엔 총회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전장에서 붙잡은 북한군 포로 둘을 최근 한국으로 보냈다고 밝혔다.
한 명은 붙잡힐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연, 북한은 사람을 이렇게 키운다는 말이 뒤따랐다.
청와대와 국정원이 밝힌 경위는 이렇다. 비공개를 먼저 요구한 쪽은 우크라이나였다. 다수의 자국 포로와 맞바꿀 기회를 버렸다는 국내 비난이 나올 수 있으니 한국행을 알리지 말자고 했다. 한국은 포로와 가족의 안전 등을 생각해 합의했다.
연설 이틀 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에서는 그런 합의는 없었다는 반박이 나왔다. 포로가 어디로 가는지 숨기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다.
10월 1일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이 일을 사건이 아니라 '외교적 오해'라 부르겠다고 했다.
이튿날 이재명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합의 사실이 없다며 상대국 국가원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썼다.
국민과 국가의 위신에 관한 문제라 묵과할 수 없다며, 사실 인정과 공개 사과를 계속 거부하면 추가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맹자는 약속 위에 둔 것이 하나 있었다. 대인은 말을 꼭 지키려 들지 않고 행동을 꼭 끝맺으려 들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의(義)가 있는 곳을 따를 뿐이라고(惟義所在).
약속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의 하나뿐이다.
그러니 약속을 깬 쪽이 내놓아야 할 것은 그 의가 어디 있었느냐에 대한 답이다. 해명이란 그것이다.
그 답이 들어갈 자리에 사실을 놓아 본다. 국정원은 이번 송환에 우크라이나가 내건 조건도, 한국이 건넨 지원도 없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같은 보고는 공개의 동기를 무기를 비롯한 지원 여론이 일기를 바란 데서 찾았다.
포로의 가족은 북에 있다.
제네바 제3협약 13조는 포로를 "폭행, 협박, 모욕 및 대중의 호기심"으로부터 항상 보호하라고 적고 있다.
국가원수의 말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나라의 말이다. 맹자는 이렇게 썼다. 사람은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야 남이 업신여기고, 나라는 스스로를 친 뒤에야 남이 친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
사과가 온다면 거기서 끝내면 된다. 오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말이 아니라 값으로 답할 차례다.
바둑의 위기십결에는 공피고아(攻彼顧我)가 있다. 상대를 칠 때 내 돌부터 살피라는 말이다. 이번에 살필 내 돌은 이 나라의 신용이다.
이 나라와 맺은 비밀을 깨고도 아무 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다음에 누가 이 나라에 비밀을 맡기겠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코미디언 출신이다. 코미디에 두 갈래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다. 스스로 망가져 웃기는 코미디는 호감을 남기고, 남을 깎아내려 웃기는 코미디는 반드시 씁쓸한 뒷말을 남긴다.
유엔 연단에서 그가 고른 것은 뒤의 것이었다. 남의 비밀과 한 포로의 사연이 그 연설의 소재였다. 외교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코미디의 이름은 사과다. 그 무대에 그는 아직 오르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다른 문법을 썼다. 처음에는 합의가 깨졌다는 사실을 밝히며 아쉽다고 했다. 목소리를 높인 것은 우크라이나가 합의 자체를 부인한 뒤였고, 그때도 문은 열어 두었다.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되는 문이다.
『맹자』가 큰 용기라 부른 것이 있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 곧으면, 천만 명이 막아서도 나는 간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10월 1일 국군의 날, 그는 북측을 향해 신뢰는 한 번의 말로 만들어지지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조금씩 쌓인다고 했다. 비밀을 지킨 쪽이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끊긴 선을 다시 잇는 자리가 열린다면, 맞은편에 앉을 이도 이번에 누가 약속을 지켰는지 기억할 것이다.
코미디언의 박수는 막이 내리면 끝난다. 약속을 지킨 대통령의 말은 막이 내린 뒤에도 그 나라의 말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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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망명지의 두 독일인이 이상한 결론에 이르렀다. 도망쳐 나온 나치의 선동과, 도착한 미국의 라디오 쇼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본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생산라인이었다.
규격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감정을 채워 넣는다. 분노 15분, 조롱 5분, 끝에 안도 1분.
어떤 사안이 들어와도 같은 분량으로 잘려 나온다.
그러니 필요한 능력은 분석이 아니라 배합이다.
지금 이 땅에서 가장 크게 말하는 이들을 보라.
소위 진보 쪽에도 있고 소위 보수 쪽에도 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는 일이 똑같다.
사안이 생기면 먼저 편을 확인한다. 우리 편이면 맥락을 깔고 저쪽이면 맥락을 걷어낸다. 같은 행위가 이쪽에서는 결단이고 저쪽에서는 폭거가 된다. 논거는 결론이 나온 뒤에 조달된다.
주재료는 적개심이다. 분노는 값싸고 매일 갱신된다. 그래서 이 산업은 날마다 새로운 적을 필요로 한다. 상대편 확성기가 사라지면 자기편 확성기도 일감을 잃는다.
대립처럼 보이던 것은 같은 시장의 두 점포였다. 진열대만 달랐지 공장은 하나였다.
요즘 그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시장이 줄면 자극의 단가가 오른다. 청중이 빠질 때 할 수 있는 일은 둘뿐이다.
더 정확해지거나, 더 세지거나.
정확해지는 데는 축적이 필요하고 세지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래서 거의 전부가 후자를 택한다.
이건 이겨 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다. 물건이 안 팔리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장사가 잘될 때 호객은 조용하다. 목이 쉬도록 외치는 것은 언제나 파장 무렵이다.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다. 예전에는 해설이 끝나야 판단이 시작됐다. 다 차려진 밥상을 받아 놓고 먹을지 말지만 고르는 셈이었다.
지금은 원문이 먼저 도착한다.
해설을 듣고 나서 원문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순서가 뒤집힌 것이다.
해설이 먼저면 해설자가 기준이 되고,
원문이 먼저면 해설자가 검증 대상이 된다.
대단한 각성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확인하는 사람이 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산업이 무너지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설명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아도르노가 무서워한 것은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였다.
해설 없이 읽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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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자 사울은 자기 갑옷을 입혀 주었다. 다윗은 몇 걸음 걸어 보더니 그 갑옷을 벗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3장에서 이 장면을 빌려 와, 남의 갑옷이 사람을 어떻게 망치는지 세 개의 동사로 적었다.
벗겨지거나, 짓누르거나, 옥죈다.
같은 장에서 그는 남의 군대를 불러들인 군주의 끝도 적었다. 그 군대가 지면 함께 망하고, 이기면 그들의 포로가 된다.
이웃과 싸우려고 투르크 병사 1만 명을 그리스로 들인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도 그들은 떠나지 않았고, 그리스의 예속은 거기서 시작됐다.
조선도 마지막에는 제 힘으로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해 망했다. 1894년 조정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일본군이 뒤따라 들어왔다.
조정이 농민군과 화약을 맺은 뒤에도 두 나라 군대는 떠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고, 청일전쟁은 이 땅에서 시작됐다.
13년 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고, 다시 3년 뒤 한반도 전체가 예속됐다. 해방 5년 만에 이 땅의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였다. 전차 한 대 없이 전쟁을 맞은 국군은 사흘 만에 수도를 내줬다.
개전 19일 만에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넘어갔다. 이양 서한에는 "현 적대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은 1994년에 돌아왔다. 전시작전통제권은 일흔여섯 해가 지난 지금도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사람은 반드시 큰 위험에 빠진다. 하물며 국가는 어떻겠는가.
갑옷이 벗겨지던 때 갑옷을 짓기 시작한 정부가 있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 1개 사단이 빠져나가던 무렵, 박정희 정부는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우고 방위산업을 일으켰다.
옥죄는 갑옷의 끈을 풀려 한 정부도 있었다. 2005년 10월 1일 국군의 날,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군이 "전시작전통제권 행사를 통해 스스로 한반도 안보를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자주 군대로 거듭날 것"이라고 했다.
2007년 한미는 전환 시점을 2012년으로 정했다. 그 시점은 이후 두 차례 미뤄졌다.
스물한 해 뒤 같은 날, 이재명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로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자주국방의 꿈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했다.
우리 기술로 짓는 핵추진잠수함의 목표 시점은 2030년대 중반으로 잡았다. 그리고 박정희와 노무현, 두 이름을 나란히 불렀다. 자주국방은 "어느 한 정부만의 과제나 꿈이 아니었다"고 했다.
국방에는 여야 좌우 없이 오로지 국익만 있고, 통합하여 뭉치는 것만이 살길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정치언어를 아득히 벗어난 국가언어라고 볼 수 있다.
이재명이라는 사람은 그러한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대한민국 통치권자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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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망명객 신채호는 압록강 가의 집안현에서 고구려 유적을 하루 둘러보았다. 여비가 모자라 무덤이 몇 기인지 세어 볼 겨를도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안(斷案)을 내렸다.
"집안현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 『조선상고사』 총론에 남은 문장이다.
지금 전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역사책은 고구려가 무너지고 470여 년 뒤 고려의 문신 김부식이 엮은 『삼국사기』다. 고구려 사람이 스스로 엮은 역사책은 한 권도 전하지 않는다.
무엇을 싣고 무엇을 뺄지, 어떤 일을 어떤 말로 적을지는 엮은 사람이 정했다. 단재는 그 책이 사대의 눈으로 엮였다고 비판했고, 다른 기록이 사라지고 그 책만 살아남은 경위까지 따졌다.
원본을 한 번 본 사람은 가공을 가공으로 읽고, 원본을 본 적 없는 사람은 가공을 원본으로 읽는다.
그동안 높은 자리의 속사정은 흔히 '관계자'의 귀띔으로 흘러나와 몇 겹의 방송을 거치고, 자극적인 썸네일을 입은 뒤에야 시민에게 닿았다. 원문을 제 눈으로 해석할 기회는 시민의 몫이 아니었다.
원문과 시민 사이의 그 거리가 이제 손바닥만 해졌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직접 쓴 문장이 그 경로를 거치지 않고, 같은 시각 누구에게나 같은 글자로 도착한다.
원본은 믿으라고 오는 것이 아니다. 판단을 읽는 사람 손에 돌려주려고 온다.
고깃집 사장님은 굽기 전에 고기부터 보여 준다. 손님은 그 고기를 제 입맛대로 굽는다. 양념이 진할수록 고기의 상태는 가려지고, 남이 구워 준 고기만 먹어 온 사람은 굽는 사람의 손맛을 고기 맛으로 안다.
이 길이 유지된다면 가공은 언제나 원본 옆에 나란히 놓여 비교될 것이다. 원본에 보탠 것 없이 양념만 바른 가공은 그때부터 값을 받기 어려워질 것이다.
다만 비교는 원본을 열어 본 사람만 할 수 있다. 2024년 『네이처 인간행동(Nature Human Behaviour)』에 실린 미국 연구진의 논문은 2017~2020년 페이스북 공개 게시물 3,500만여 건을 분석했다. 링크 공유의 약 75%가 링크를 열어 보지도 않은 채 이루어졌다. 자기 성향에 맞는 정치 콘텐츠일수록 더 그랬다.
나 역시 원문 링크를 앞에 두고 남이 3분으로 줄여 준 영상부터 누른 날이 적지 않다.
단재는 모자란 여비로 원본 앞에 하루를 섰다. 원본이 손바닥 위까지 온 지금, 우리는 그 앞에 몇 번이나 서 보았는가.
그리고 원본이 가까워진 것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은 누구의 것인가. 원본을 읽은 나의 것인가, 원본을 대신 구워 팔던 손의 것인가.
https://t.co/RMQgTwuN4g
김어준 욕하지 마세요. 유시민 욕하지 마세요. 조국 욕하지 마세요. 갈라치지 마세요. 일베같은거 마세요.
그 선생님들.. 여기 댓글 비난하시는 글 전부 저 스피커들이 말하는거 여기에 따라하는 앵무새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누가 말하면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신도
@Jaemyung_Lee 왜 대통령의 SNS를 입틀막 할까요? 소위 자칭 정치정문가라고 논평하며 하는 사람들은 내부정보로 자기들의 밥그릇을 유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는 고위공직자들의 썰을 받아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지금 그게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치지요. 대통령님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