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자는 자기행위가 아니라 내주하신 성령님의 은혜와 도우심의 능력으로만 구원받는다. 신자에게는 성령충만을 통해 하나님께만 의탁하는 믿음 하나면 된다. 문제는 기도와 말씀을 경시하며 그 믿음을 안 키우는 것이다. 날마다 그 믿음을 구하는 겸손한 자기 부인의 삶이 참된 구원의 확신이다.
전도도 변증도 설교도 다 목적을 가진 일인데, 찬양과 경배는 다른 목적이 없다. 그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만 바라며 영원히 그분만 높여드리고자 하는 것뿐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구한 그 '한 가지 일'(시 27:4)이 내 평생의 소원이 되고 영생의 교제 가운데서도 유일한 기쁨이 되길 구한다.
전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다 보니 이제 신자나 목회자들 가운데 지식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누가 깨어 있고 잠들어 있는지도 대충 느껴진다. 주된 잣대에는 사후 천국이나 지옥의 존재에 대한 민감도도 포함된다. 내세에 깨어나면 자신의 구원문제에도 깨어나 지옥에는 결코 못 갈 사람으로 바뀐다.
만왕의 왕이시며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의 눈에 드는 일, 그분을 소유하는 일보다 더 복된 일이 있을까? 하루 종일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고 온 천지를 춤추며 싸돌아다녀도 지칠 것 없이 환장할 만큼 좋은 일이다. 그만큼 좋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그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영원한 불구덩이에서 건짐받은 기독교가 아니라면 기독교에 무슨 절박한 재미가 있을까? 그 극적인 재미가 영원한 감사로 녹아들지 않고서야 기독교의 찬양에 무슨 영감이 있을까? 하나님의 성육신이 의도한 진리가 바로 이것 하나라고 정확하게 간파한 감격이 없고서야 기독교에 무슨 믿음이 있을까?
누가 나에게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얼굴부터 발가벗은 온몸에 들이붓는다고 상상해보라. 그 뜨거움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아주 조금은 실감할 수 있다. 죄인이 영원히 불못에 던져질 만큼 인간의 죄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도 없었다.
"난 네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맘먹고 있으면 하나님도 그 일을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일상이 분주해져 주님께로부터 맘이 멀어지거나 식어질까 하는 게 그분의 일인 듯 느껴진다. 어쩌면 그분의 일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