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우울증이 아니야. 우울증이라는건 병이야. 말하자면, 하루 종일 하늘에 구름이 끼어있어서 어두껌껌한 상태가 바로 우울증이지. 그래서 뭘 제대로 할 수가 없는거야. 근데 자네의 경우를 보자고. 자네의 우울감은 일 할거 다 하고, 청소 집안일 할 거 다 하고
나는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라는 말들을 극도로 혐오함. 상식과 생각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거든.
더 나아가면 상식은 생각의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생각의 시작점으로 소여된 것이 아님.
「그러나 이 유명한 인사의 반대자들은, 저 과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순전히 순수 사고에만 종사하는 한의 이성의 본성을 아주 깊이 파고들어 갔어야만 했는데,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거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통찰 없이도 고집을 세울 수 있는 편한 수단, 곧 보통의 인간지성/상식에의 호소를 생각해냈다.》
사실 반듯한 (또는 최근에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소박한) 인간지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늘이 준 아주 큰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지성을 행실을 통해, 즉 생각하고 말하는바 숙고된 이성적인 것을 통해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를 정당화하는 현명한 방책을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 때, 이러한 인간지성[상식]을 신탁처럼 불러내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 서설(prolegomena) // 임마누엘 칸트
어제, 그리고 그 이전에 전장연이 시위하는 것을 보고 소위 "일반 상식을 가진 선량한 인간들"이 지랄을 피워대는 것이 딱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시작됨. 그렇게 보이지 않는 위치로 격하된 사람들이, 보이기 위해 투쟁을 시작하고, 마침내 보여지는 순간 그 "일반 상식인"들은 그저 투쟁만을 보고, 그 장애인들, 보이지 않던 인간들은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불쾌한 부랑배 패거리들이라고 비난하는 것.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갈 때는 "보이지 않으니까 없음"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사는 것은 그럴 수 있음. 보이지 않는, 부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선택적이니까.
그런데 그러면, 최소한 보이는 것, 보이게 된 것에 대해서 그게 왜 나에게 보이게 됐는지 생각이라도 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일반 상식의 위치는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음. 왜? 상식은 생각하기 싫은 자들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대기 위해 만든 단어니까.
《헛소리Ge-rede》를 "공들여" 한다는 행위에 대한 미학.
헛소리, 그러니까 헛-소리는 "헛-"과 "-소리"의 합성어이고, 이것을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후자, 즉 근간을 이루는 의미는 -소리이다. 이것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는 분명 음향적 자극에 대한 서술적 기표이다. 그러나 그 앞에 접두사(prefix)가 붙는 것을 통해, 이 「소리」에 음향요소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의미적 차연이 구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가 붙으면 개소리가 되고, 씹-이 붙으면 씹소리가 되는 식이다. 이때 후자에 위치한 「소리」는 명백히 그 단독적 본질인 음향적 자극에서 소외된다. 이제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헛"과 결합되었을때, 이것은 《말의 본질이 비어있다(허虛)》는 문장으로 기술된다. 즉 「헛-소리」는 그 결합과정에서 소리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소외시키면서, 그 자신의 의미인 "말의 본래성"을 긍정한다.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Ge-rede라는 용어를 살펴보면 그것은 Ge-, 독일어에서 과거분사, 수동태를 구성하는 Prefix와 말을 의미하는 rede가 결합된다. 여기서 rede는 처음부터 말이었고, 그 전에 Ge가 붙어도 말인 것이다. 즉 Ge-rede는 rede의 의미를 전연 소외시키지도,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이 "말해진 것" - "무의미한 말"이라는 의미를 포획하여 구성한다.(그런 점에서 이기상 씨의 "빈말"이라는 번역어는 참으로 좋은 번역이었다.)
다시 헛소리라는 용어로 돌아오자. 이것은 "그 본질이 비어있는 말"이라는 문장적 기술에서 원래 말에는 본질이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말은 본래적으로 기표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것은 타자에 의해 이미 구성된 것이므로 말에는 처음부터 본질이 없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헛-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même si)' 말의 본질을 찾으려는 역동이다. 본래부터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도 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그것을 공들여 한다는 행위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본질 없는 말, 대답 없는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대답과 본질의 요구이며 부조리의 보존을 향한 노력이다. honetété, fidélité의 의미에서 가장 성실하고도 정직한 행위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의미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에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없어진 대타자의 자리, 공백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배회(De-sidere)하는 것.
자살 방지 대책에 대한 짧은 생각. 글쎄. 팔뚝을 30센치 넘게 그어버리고 경찰한테 끌려가면서 든 생각이기도 한데. 국가가 나서서 생명을 지켜준다는게 말이야. 도대체 내 생명의 뭘 지켜준다는 거지? 어차피 살아있는 한 죽음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팔뚝을 그어 과다출혈로 죽는 대신에
심지어 그 폐기 방식이라는 것도 아주 좆같다고. 늙고 병들어 죽기. 사고로 고통스럽게 죽기. 범죄자한테 칼맞아 죽기. 굶어 죽기. 추락사. 익사. 심지어 인권선언에 생명권 항목에는 자의적 어쩌고 하는 해석도 없는데 말이지. 그 응급입원으로 날 끌고간 경찰한테도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