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의 얼굴들 ⑬ | 민영휘
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의 인생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돈까지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민영휘(閔泳徽).
조선 말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지낸 고위 관료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평범한 친일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무너져가던 1907년, 민영휘는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고, 이후 친일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했던 정우회의 총재까지 맡으며 국권피탈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에 병합됩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는 민영휘에게 자작(子爵) 작위를 내립니다.
끝이 아니었습니다.
1911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에게는 식민지 시대가 시작됐지만,
민영휘에게는 일본 제국이 보장하는 새로운 지위가 생긴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후에도 그는 식민통치 체제 밖으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조선귀족회 부회장을 맡았고, 한일은행 두취를 지냈으며, 일본의 병합기념장을 받았습니다.
내선융화를 내세운 대정친목회의 고문을 맡았고 친일 유교단체인 대동사문회의 회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28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금배와 은배,
쇼와 천황 즉위기념장을 받았고,
1935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습니다.
1933년 무렵 자료에는 30만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거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서도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민영휘가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 민간의 재산을 빼앗아 재산을 축적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당시 황현이 남긴 기록이라는 점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민영휘라는 인물을 단순한 한 줄짜리 악인으로만 보면 역사 역시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1906년 휘문의숙을 설립했습니다.
오늘날 휘문중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와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역사를 어렵게 만듭니다.
학교를 세운 사람과
일제의 자작 작위를 받은 사람이
동일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했으니 친일 행적도 덮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민영휘의 행적을 조사했고,
결국 그를 법률이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했습니다.
민영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친일의 역사는
몇몇 사람이 일본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라의 주권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저항했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그 새로운 권력에 올라탔습니다.
1910년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은 일본의 신민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해, 민영휘는 일본의 자작이 됐습니다.
역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친일의 얼굴들》은 계속됩니다.
[우리는 북미회동 이후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이기헌 의원] 아직 확정돼 있지는 않지만 북미 회담 이후에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저희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일부는 대한민국의 정부는 그걸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관님 하실 일이 많습니다.
[정동영 장관] 예. 아까 역사적인 소명이라고 말씀드렸고 이재명 정부가 아니면 어떤 정부가 해내겠느냐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김영삼 정부는 정말 야심차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NPT 탈퇴와 1차 핵위기가 불거지면서 남북관계는 전면 적대적인 상태였죠. 그러다가 94년 7월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이 성사됐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주일 전에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불발로 그치면서 국내에서 조문 파동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완전히 통미봉남 국면이 된 겁니다. 남북은 완전 단절 상태였고. 그런 통미봉남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1996년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후반부인데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해서 제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 회담 제안을 했습니다. 제네바에서 97, 8, 9, 6차례 4자 회담이 열렸던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30년이 흘렀는데요. 30년 동안 제자리 걸음입니다. 이재명 정부가 다시 김영삼 정부 때의 통미봉남 상황을 타개했던 4자 회담 그 구상을 포함해서 평화체제 바구니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북미 관계 정상화, 북핵 문제, 그리고 평화협정의 전환, 그 밖에 군비 통제 등등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구니에 넣어서 북미 회동이 이루어지는 즉시 저는 우리의 역할을 피스 메이커로 전환해서 그런 역사적 전환을 밀고 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영삼 정부 때 통미봉남 상황에서 우리 외교 당국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탐문이었습니다. 탐문. 다른 말로 하면 귀동냥이죠. 북이 알려줄 리가 없고 미국이 다 알려줄 리가 없기 때문에 참 우리 신세가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비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입니다. 한반도 역사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늘 비운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는데 2005년 9.19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 그리고 특사로 간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의 담판, 그리고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라이스 국무장관의 소통, 이런 걸 통해서 9.19 공동성명을 우리가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9.19 공동성명은 지금도 정치적으로 유효합니다. 거기에 특히 평화체제 네 글자가 박혀 있습니다. 당시 저는 nsc 상임위원장으로서 회담 대표로 갔던 송민순 차관보에게 다른 건 몰라도 평화 체제 네 글자는 9.19 공동성명에 반드시 박아놔야 한다는 것을 수 차례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우리가 당사자로서 주도하느냐,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느냐, 구경꾼으로, 제3자로 전락하느냐, 그 차이는 엄청나다고 생각합니다.
김한석 씨는 국가보훈처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이미 6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천소악(1912년생) 여사의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되어 유공자 서훈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이었다.
그가 놀란 것은 어머니가 생전 장남인 자신에게도 그런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1930년 서울 숙명여고 3학년 재학시절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을 서울에서 주도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됐고 총독부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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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억 기부하고도 20년 된 옷 입는 남자
1. 이름 하충식. 한마음국제의료재단 의장. 창원한마음병원 설립자
2. 1960년생. 함양 출신. 진주고 → 조선대 의대 → 부산대 의학박사
3. 1994년, 병상 4개짜리 산부인과로 시작
4. 그해 병원 통째로 인수. 35세에 병원장
5. 2021년, 병상 1008개 대형 종합병원으로 성장
6. 직원 수천 명. 규모 기준 지방 최대급
7. 산부인과 전문의로 직접 받은 아이만 5,000명 이상
8. 지금까지 사회환원 누적 411억. 매출 대비 기부 최상위권
9. 부산대 동문 기부 최고액 100억 약정. 로스쿨에 ‘하충식홀’ 생김
10. 차는 오래된 아반떼. 골프 안 침. 집무실엔 20년 된 헤진 옷
11. 2011 국민포장. 2019 국민훈장 동백장
12. 사회공헌 90%가 아이들. 소년소녀가장·교통사고 유자녀 30년 지원
13. 행사 다니던 아이가 자라 자기 병원 간호사가 된 사례 있음
14. 세계 최초 기업형 장애인 오케스트라 창단. 전원 정규직
15. 고향 함양엔 12년째 연탄 나눔
16. 창원 의대 유치에 30년 가까이 매달린 ‘의대에 목 맨 사나이’
17. 말 “병원을 키워준 건 시민.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당연”
18. 2026년 EBS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 출연. 서장훈도 옷 보고 기겁
지방대 출신이라고 차별받던 의사가
아무도 무시 못 하는 병원을 만들고
번 돈을 거의 다 나눠준 이야기.
창원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본 이름.
전국에선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하충식님
영화의 역사를 간직한 프랑스 니스에서 넷플릭스, 디즈니, 소니를 비롯한 미국영화협회(MPA) 회원사 대표들과 K-콘텐츠의 가능성과 영상 콘텐츠 산업의 미래를 논의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축적된 풍부한 이야기와 깊은 공감, 창작자들의 열정과 섬세한 제작 역량이 K-콘텐츠의 힘입니다. 큰 제작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창의적인 이야기와 뛰어난 제작 역량에 세계의 투자와 유통 역량이 더해진다면, 더 많은 좋은 작품이 세계 시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강점을 나누며 창작과 투자, 제작과 유통이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을 만들어가길 기대합니다.
오늘의 만남이 K-콘텐츠의 더 큰 도약과 세계 영화·영상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