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식민지 엘리트에게는 시대와 구조를 앞세운다. 반면 선택지가 훨씬 적었던 위안부 여성에게서는 선택과 관계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아낸다. 엘리트의 선택은 구조 속으로 숨기고, 피해자의 선택은 구조 밖으로 끌어낸다.”
명쾌한 분석이다.
https://t.co/6ItPHorjSJ
이타카를 정주민족의 눈에서 보면 작고 귀여운 섬의 지방호족 오디세우스지만 그런 농본주의적 투영이 사실과 맞을리없죠? 이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농민이라기보가는 해민에 가까웠음. 말하자면 바다유목민인 것. 당연히 인구대비 병력비율이 높���고 무역과 약탈이 생활방식임...
슈에이사(집영사)가 창업 100주년을 맞아 ‘MANGA MILLION’에서 400작품 100만 페이지를 100개 언어로 사람 번역해서 <무료> 공개.
2027년 12월 말까지.원피스,데스노트,보쿠아카, 단다단, 테니스의왕자,최애의아이,스파이패밀리 등 인기작 다수.
한국어 번역은 약 84작품.
https://t.co/qPARpUTVDw
칸에서 <호프>를 보고 만점을 매겼던 얄 사다트 평론가는 이 작품을 시대정신과 공명하는 블록버스터로 읽는다. 국내에선 메시지가 없다는 평가 주류이지만 그는 반대다.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면 비현실적인 폭력과 유머가 동시에 흐르는 SNS 타임라인과 <호프>는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보았다.
여성신문 군체때부터 영화 진짜 이상하게 보네
내가 그때도 그런영화 아닙니다 했었는데..
오빠 사랑해는 철저하게 다음 장면을 위한 대사였음
웃다가 애매하게 멈춘 얼굴로 피 뒤집어쓴거 못보셨나..
그래놓고 마지막에는 고성기씨 일은 운이 나빴던 것뿐이에요 하고 대책마련부터 하는 여자야 성애는
실리콘밸리 거물들이 SF를 약탈한 방식
선택적 영감을 자기 권력과 지배 정당화하는 미학적 장치로
(아래 원문 발췌)
2026년 1월 머스크는 텍사스 스페이스X 스타베이스에서 전쟁부 장관과 펜타곤 고관들 앞에 섰다. “우리는 스타 트렉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 SF가 과학적 사실이 되어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누비는 날이 오게 하려는 겁니다.”
실제 <스타 트렉>은 돈이 폐지되고 인류가 공동의 ��전을 위해 노력하는, 희소함이 사라진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묘사한다. 진 로든베리의 연방은 이윤이나 군사적 지배가 아닌, 평등과 지식 탐구의 원칙 위에 세워졌다. 거기서 머스크는 대형 우주선, 외계인과의 조우, 장대한 모험 같은 미학적 요소만 차용했을 뿐 정치적 토대는 제외했다.
스타 트렉에 자본주의, 민족주의, 군국주의는 빠져 있다는 사실은 알려진 사실이다. 머스크는 엔터프라이즈호를 원하되 군산복합체를 위한 버전을 바란다.
2021년 저커버그는 페북을 메타로 개명하면서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우 크래시>에서 차용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의 아바타가 디지털 공간을 누비는 가상 현실인 ‘메타버스’를 상상한 작품이다. 지난 반세기의 가장 날카로운 풍자 소설 중 하나인 이 작품을 스티븐슨은 경고의 메시지로 썼다. 그가 묘사한 메타버스는 이미 붕괴된 사회를 위한 위안상에 불과하다. 연방 정부는 해체됐고, 기업 프랜차이즈가 일상을 지배하며, 피자 배달마저 마피아가 운영하는 사업으로 민영화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피자 배달원이자 파트타임 해커로, 가상 세계에서 검술을 구사하는 아바타를 통해야만 존엄성을 느낄 수 있다. 스티븐슨은 디지털 세계의 화려함과 물질적 빈곤 사이의 대조를 소름 끼치게 묘사했다. 이는 플랫폼 자본주의가 이끄는 방향에 대한 경고의 전망이었다. 저커버그의 메타는 이런 점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애플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은 2017년 “우리는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영감을 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들이 SF에서 어떤 부분을 택하고 어떤 부분을 버리는지 알 필요가 있다.
머스크는 SF가 자신의 야망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얘기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SF를 읽으며 ‘더 깨끗한 에너지 기술을 개발하거나 인류의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우주선을 [만들고] 싶은’ 열망을 키웠다고 했다.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스페이스X 업무에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아시모프의 소설은 은하 제국의 몰락을 예견하고 다가올 암흑기를 견뎌내며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설립한 수학자 하리 셀던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소설들은 비범한 민주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1942~93년 집필된 7권의 책을 관통하는 핵심 통찰은, 문명의 생존은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집단적 제도, 분산된 지식, 민주적 숙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셀던의 가장 중요한 행보는 예언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협력하는 학자들의 숨겨진 네트워크인 제2 파운데이션을 설립한 것이다.
이 소설들의 도덕적 구조는 명백히 반권위주의적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 임무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할 때마다 이야기는 이를 재앙으로 묘사한다. 이 시리즈는 그 핵심에서 견제와 균형의 불가결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논증이다.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그토록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제도에 대한 정서적 관대함 때문이다. 셀던의 ‘심리역사학’이 통하는 이유는 한 사람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지식과 공동체를 위해 종종 익명의 선택을 내리는 수백만 명의 작은 사람들의 행동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시모프가 그린 미래 비전은 문명의 평범한 기반 시설, 즉 기록 보관소, 위원회, 협상을 통해 도출된 합의 등을 옹호하는 것이다.
머스크의 해석은 이 모든 걸 배제한다. 2024년이 되자 그는 명확히 했다: “다행성 문명으로 발전하는 것은 인류와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체의 장기적 생존을 보장��는 데 결정적이다.” 이런 프레임은 스페이스X의 모험을 문명적 필수 과제로 재구성하고 비판의 눈길에서 면책시켜 준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고독한 선지자 셀던의 역할에 놓음으로써, 노동 관행, 환경적 비용, 혹은 화성 식민지화가 과연 공익에 기여하는지에 대한 의문들은 인류의 생존을 방해하는 단순한 마찰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전제는 과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논란거리다. 과학적 측면에서, 천체물리학자 아웬 E. 니콜슨 등은 에세이 ‘지구 B는 없다’(2023)에서, 지구 생물권과 생명체 간의 수십억 년에 걸친 공진화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윤리적 측면에서 앤드류 러셀과 리 빈셀은 에세이 ‘화성의 백인’(2017)에서 머스크가 내세우는 ‘인류’라는 개념은 속임수라고 일축한다. 그가 목표로 내건 100만 명의 화성 주민은 지구 인구의 고작 0.01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주 투자가 모든 사람에게 혜택으로 흘러내린다는 ‘파급 효과’ 논리도 근거 없다. 목표가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거라면 화성 투자의 ‘낙수 효과’를 기다리기보다 그 문제들을 직접 겨냥한 연구 계획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베조스가 우주 거주지 프로젝트 지원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제라드 K. 오닐의 The High Frontier(1976)만 해도 본래 20세기 가장 야심차고 인본주의적인 비전을 그렸다. 산업을 지구 밖으로 이전함으로써 지구의 환경적 압박을 완화하고, 정착지는 민주적으로 운영되며 혜택은 폭넓게 분배되는 거대한 회전식 우주 식민지를 구상한 것이다.
오닐은 이런 식민지를 인류의 다음 위대한 공동 프로젝트, 즉 민주주의의 경계를 우주로 진정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상상했다. 베조스는 그의 공학적 비전과 야심 찬 규모만 취하고 민주적 거버넌스와 폭넓게 공유되는 이익은 뒤로 넘긴다.
이 비전은 무한 성장과 무한 자원을 전제로 한다. 머스크의 화성 야망과 마찬가지로, 베조스의 우주 식민지 구상은 지구의 환경 위기를 집단적 행동이 필요한 문제로 보지 않고, 확장을 통해 해결해야 할 자원 제약으로 재구성한다. 이 SF적 비전은 사적 부로 자금을 조달하고 사적 이익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 탈출구가 된다. 오닐은 이 식민지들을 인류의 민주적 미래로 상상했지만, 베조스는 이를 아마존의 다음 개척지로 제시한다.
페이팔과 팔란티어 등의 공동 창립자인 피터 틸은 SF를 정치적 청사진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소설 <달은 가혹한 여주인>(1966)을 인용하는데, 여기선 달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켜 최소한의 정부만 있는 자유지상주의 사회를 수립한다. 틸은 2025년 뉴욕 타임스 팟캐스트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가 계속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하인라인의 소설은 틸의 해석처럼 자유지상주의 팸플릿이 아니다. 혁명이 실제로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에 대한 진정으로 복잡한 정치 소설이다. 하인라인이 묘사한 달 식민지 주민들은 기업가가 아니다. 그들은 수감자, 추방자, 그들의 후손들로, 잃을 것이 없으면서 공유된 궁핍 속���서 취약한 공동체를 일구어 낸 자들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마이크라는 인공지능은 인간 반란군들과의 우정을 통해 정치적 자각을 얻는데, 그 동기는 효율성이나 이익이 아니라 호기심과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 책은 승리로 끝나지 않고,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지에 대한 지친 양면성으로 마무리된다. 하인라인은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를 가능케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유대 사이의 긴장 관계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모든 걸 틸은 못 본다. 하인라인의 달은 식민지 형무소다. 자유지상주의 사회는 유배된 죄수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실리콘 밸리의 선택적 독해는 정교하다. 반정부적 미학만 취하고, 강압과 착취라는 경제적 토대는 버리는 것이다. 하인라인의 달은 관료적 간섭 없이 강인한 개인주의자들이 번영하는 개척지 유토피아다. 실리콘 밸리는 이를 통째로 흡수했다.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주권을 가진 떠다니는 도시 국가를 건설하는 ‘Seasteading 운동’은 소설 속 환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은 2009년 에세이 ‘자유지상주의자의 교육’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더 이상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920년 이후 복지 수혜자의 급격한 증가와 여성에게 선거권이 확대된 것-이 두 집단은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악명 높게 다루기 힘든 대상이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모순된 표현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크 안드레센도 <테크노-낙관주의 선언문>(2023)에서 자신이 SF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부 규제로 인해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풍부한 에너지가 실현되지 못한 잃어버린 미래를 한탄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가속주의, 즉 기술 발전을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AI의 발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인명 손실로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존재하지 못하게 막힌 AI로 인해 예방할 수 있었��� 사망은 일종의 살인이다.
이 선언문은 속도 그 자체를 도덕적 절대 가치로 취급하며, 어떤 일시 정지, 규제, 예방 조치도 죽음에 가담하는 행위로 재구성한다.
1950년대 SF는 비행 자동차와 풍부한 에너지 등을 상상했다. 이는 쓰리마일 아일랜드 사고와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러니까 우리가 종종 재앙을 통해 안전을 희생하고 속도를 우선시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깨닫기 전의 이야기였다. 안드레센이 철폐하려는 규제 체계들은 피땀 흘려 얻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다. 낙관적인 미학은 차용되면서, 그 교훈은 버려진다.
이 점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팔란티어일 것이다. 톨킨의 소설에서 팔란티리(palantíri)는 먼 거리를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보는 돌’ 또는 ‘수정구’다. 작품 속에서 이것은 타락을 부추기는 장치다. 사루만의 팔란티리는 그를 사우론과 연결시켜 파멸로 이끌었고, 데네토르의 팔란티리는 그를 광기와 자살로 몰아넣었다. 팔란티리는 단순히 ‘보는 것’을 ��능하게 할 뿐 아니라, 이를 숙달한 자들이 타인을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기업 팔란티어는 정부, 군대,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에 분석 및 감시 도구를 제공한다. 이 회사의 이름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침습적인 추적을 신비로운 통찰로 바꾸어, 알고리즘 기반 감시를 체계적인 침입이 아닌 현명한 예지력으로 포장한다. 팔란티어의 CEO 알렉산더 카프와 그의 법률 고문 니콜라스 자미스카는 저서 <기술공화국 선언>(2025)에서 팔란티어의 정부 관련 업무를 군사적 용어로 설명한다. “우리는 연합과 전사 집단을 구축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한 소속감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부정해 온 것은 실수였다.”
그들은 감시 도구가 전사적 형제애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주장한다. 톨킨에 대한 언급은 미학적 권위를 제공하지만, 톨킨의 실제 도덕적 비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 비전 없이도 행동할 자유를 부여한다. 사용자를 타락시키고 배신하는 장치들의 이름을 딴 감시 ���업을 명명하는 것은 경의가 아니라, 도덕적 핵심을 거부하면서 미학만을 차용하는 행위이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1984)는 깁슨이 직접 만든 용어인 ‘사이버스페이스’를 소개했다. 소설 속 사이버스페이스는 거대 기업들이 소유하고 통제한다. 개별 해커들은 자신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해관계에 의해 고용되었다가 버려지는 도구에 불과하다. 주인공은 전 고용주로부터 처벌로 신경계를 손상당한 해커다. 소진되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추방당한 그는 갈 곳 없는 ‘콘솔 카우보이’로 치바 시를 떠돌고 있다. 깁슨의 비전은 명백히 디스토피아적이었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지닌 민주화 잠재력이 시작되기도 전에 차단되고, 자본에 포획되어 자본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세상이었다.
깁슨은 2012년 인터뷰에서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사이버 공간-전적으로 기업의 이익과 정보 도둑들로 가득 찬 곳-은 초기 인터넷 시절과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고 인정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십 대가 기���들을 제칠 수 있었고, 네트워크가 잠시나마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느껴지던 그 시절 말이다. 깁슨은 그 단계는 완전히 놓쳤지만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지에 대해서는 우연히도 옳았다.
깁슨은 처음부터 사이버 공간을 기업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상상했다. 실리콘밸리는 처음엔 개방형 인터넷을 구축했지만 결국 디스토피아로 수렴했다. 차이점은 <뉴로맨서>에서 수렴은 저항해야 할 재앙이었다는 점이다. 저들은 그의 경고를 제품 로드맵으로 바꿔버렸다. 그들의 세계관은 SF를 통해 표현된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들의 축적 전략을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매개체로서.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중심은 1990년대 반문화적 자유주의와 디지털 유토피아주의가 합쳐진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서, 자원 착취와 천년왕국주의적 기독교가 한 세기 동안 융합된 듯한 ‘텍사스 이데올로기’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신의 섭리에 의한 운명이 자연의 정복과 그 부의 추출을 정당화한다는 신념이다. 이전 시대가 네트워���와 플랫폼 구축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로운 모델은 데이터를 석유 붐의 풍요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며, 방대한 토지와 전력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서버 팜에서 채굴해야 할 천연 자원으로 간주한다.
텍사스주 오스틴에 위치한 테슬라의 기가팩토리는 구글의 ‘캠퍼스’와 달리, ‘가축 목장만큼 큰 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로, ‘기술의 힘을 길들이려는 의지’와 ‘땅에서 이익을 짜내려는’ 남성들이 구축한 미래를 상징한다.
2024년 12월 머스크는 스페이스X 본사를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스페이스X의 남부 텍사스 시설인 ‘스타베이스’는 이런 비전을 잘 보여준다. 이곳은 스페이스X가 규칙을 정하고, 노동자들이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지역 행정이 기업의 우선순위에 따라 움직이는 민간 기업 도시다. 선택적 SF가 정치적 현실로 구현되었고 기술적 진보가 사회적 퇴보를 위장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 길은 ‘장기주의longtermism’라는 철학적 표현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암호화폐 사기죄로 복역 중인 샘 뱅크먼-프리드 같은 인물들의 기술 자본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는 효과적 이타주의(EA) 운동의 파생물이다. 윌리엄 맥아스킬 같은 EA 지지자들은 엄격한 공리주의적 계산을 적용��, 우리가 우주를 개척할 경우 존재할 수도 있는 수조 명의 잠재적 미래 인류의 복지가 오늘날 살아있는 80억 명의 필요보다 수학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향후 천 년 내에 발생할 수 있는 가상의 ‘AI로 인한 인류 멸종’을 막는 것이 불평등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이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며, 기술 업계 리더들은 이미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알고리즘 시스템에 대한 규제를 거부하는 한편 ‘AI 가치 정렬’ 연구에 수십억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실존적 AI 위험에 대한 관심 돌리기는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 아닌 도구 자체에 행위 주체를 부여’함으로써 기술 기업들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문제는 AI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 특정 특성을 지닌 무언가’를 만드는 기업들이다. 얼마 전 AI ��스템이 ‘지배적인 관점을 고착화하고, 권력 불균형을 심화시키며,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사내 논문을 구글 연구원이 써내자 구글은 해고했다.
업계는 살인 로봇, 폭주하는 AI, 존재적 위험과 같은 먼 미래의 재앙적 시나리오로 정책 논의를 유도함으로써, 채용 과정의 알고리즘 편향, 얼굴 인식 기술의 인종적 불균형, 플랫폼을 통한 극단주의 확산 등 이미 해를 끼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규제에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올트먼은 AI 개발을 ‘1945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원폭 실험을 지켜보던 과학자들’을 보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며, ‘미친 SF 기술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의 SF 지향성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1990년대 SF 팬, 트랜스휴머니스트, 사이퍼펑크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교류를 나누며, 2008년 금융 위기로 인해 암호화폐가 필수적으로 여겨지기 훨씬 전부터 비트코인과 같은 기술의 개념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이른바 ‘반동적 미래주의’라고 부르는 개념으로 수렴된다. 이는 반민주적 정치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해 SF의 미학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새로운 것’의 반짝이는 미학을 이용해, 극단적 개인주의와 규제 없는 시장, 민주적 통치의 거부를 특��으로 하는 19세기 개척지 자본주의 같은 이상화되고 잔혹한 과거로의 회귀를 설계한다. 21세기의 드론과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채.
틸은 2009년 에세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 세계의 운명은 자본주의를 위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자유의 기구를 구축하거나 전파하는 단 한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그리고 집단적 노력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다. 이는 파운데이션의 서사이자, 하리 셀던 신화, 대중이 볼 수 없는 것을 꿰뚫어 보는 고독한 선지자의 이야기다. 아시모프가 그 신화를 수호하기 위해 구축했던 민주적 제도들은 모두 제거된 상태다.
SF는 이들의 반민주적 비전에 미학적 위장을 제공한다. 이는 참정권 축소를 빅토리아 시대의 퇴행이 아니라 대담한 미래주의처럼 들리게 만든다. 또한 민주적 책임에 대한 거부를 탈출 속도, 개척지 확장, 문명의 생존으로 변모시킨다. 미래는 민주적 토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선별적이고 종종 반동적인 환상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 이 모델 하에서 민족 국가는 단순히 주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속이 비워지며, 기업 도시 국가와 사적 디지털 관할 구역으로 대체된다. 스노우 크래시에 등장하는 ‘프랜차이즈 국가’가 현실이 된다.
핵심 질문은 SF가 현실을 형성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다. 진정한 질문은 ‘누구의 버전이 우세해질 것인가’이다.
실리콘 밸리의 힘은 협소하면서도 반동적인 환상을 피할 수 없는 진보인 것처럼 제시하는 데 있다. 하지만 다른 미래도 가능하며, 다른 SF들도 존재한다.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1974)은 착취가 아닌 상호 부조를 기반으로 한 무정부주의적 달 식민지를 상상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우화 시리즈(1993-98)는 화성으로의 탈출이 아닌, 적응과 돌봄을 통해 붕괴를 이겨내는 공동체를 묘사한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화성 3부작(1992-96)은 행성 정착을 억만장자의 벤처 사업이 아닌 집단적 민주적 프로젝트로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순진하거나 유토피아적인 텍스트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구축���는 데 따르는 대가에 대해 까다롭고, 어렵고, 솔직하게 다룬다. 이 작품들은 고독한 비전가의 위안을 거부하며, 미래는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이야기들은 미래가 중립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선택임을 상기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사업 계획으로 취급하는 이사회로부터 우리가 되찾을 권리가 있는 바로 그 선택 말이다.
SF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깁슨의 <뉴로맨서>는 기업 권력에 대한 경고였지, 투자 제안서가 아니었다.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시>는 풍자였지 전략이 아니었다.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은 개인의 천재성이 가진 한계와 민주적 제도의 필요성을 탐구했다. <스타 트렉>은 자본주의를 더 나은 우주선으로 개조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미래가 이야기에서 만들어질 것이라면, 우리의 임무는 그 이야기들이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걸맞은 것이 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SF가 정치적 전술로 선택적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군사화된 드론과 민영화된 도시 헌장을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권력�� 관한 특정하고 협소한 이야기들이 구체화된 형태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문학적 과거의 선별된 환상이 아니라, 현재의 다원적인 필요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의 미래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누가 대가를 치르는가? 약탈 과정에서 무엇이 뒤처져 남았는가?
미래는 크롬으로 된 외관이 아니다. 미래는 더 지저분하고, 더 복잡하며, 항상 지금 그곳에 서식하는 다양하고 지역적인 삶에 의존한다. 우리의 과제는 타인의 시나리오에서 조연으로 머무르는 것을 그만두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https://t.co/3Z20yNq8qH
순문학과 장르문학 또는 웹소설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보통 '순문학은 보다 예술적으로 뛰어나고 문장이 길고...' 같은 답이 오는데 사실 너무 예외적인 작품들이 많음. 순문학과 장르문학, 웹소설의 차이는 독자(마니아층)의 욕망 충족을 지향하냐 작가의 욕망 성취를 허용하냐의 퍼센티지 차이임
그림이 귀여워서 설명 읽는데
화가는 형부의 열기구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음. 마치 소설 인물 같았던 그는 귀족이자 화가, 천문학에 사진도 하고 무기도 어쩌구
<<<오오
전세계를 여행했으며 일본에선 결혼까지 << 호오오
그렇게 전재산을 쓴 후 머리에 총을 쏴서 자살했습니다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