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책을 샀는데 앞사람의 밑줄이 있었다. 그가 그은 문장은 내 눈에는 시시했고, 내가 긋고 싶은 문장은 그가 그냥 지나갔다.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책을 읽은 것이다. 헌책은 이렇게 한 권 값에 두 권이 온다.
그런데 3장 중간에서 밑줄이 끊겼다. 거기서 그가 책을 덮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지루했을 수도 있고 바빠졌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다. 그 뒤로는 혼자 읽었다. 시시한 밑줄이 없어져 홀가분해야 했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외로웠다.
다 읽고 나서 나는 연필을 들고 3장 이후에 밑줄을 그었다. 그의 취향으로, 시시한 문장만 골라서. 그가 끝까지 읽은 것으로 해 두고 싶었다.
그래서 난 성인되고 나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햇음
내가 무얼 보고 느낄 때 행복한가
행복하다는 그 감정을 어떻게 느꼇는가
하나하나씩 좋아하는 거 모아놧다가
이것들이 왜 좋은지 분석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음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다채롭구나~ 하고싶은게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시기에책도많이읽음
요즘 은근히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임
그냥 이거 좋아요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왜 좋은지
어떤 부분이 취향인지
비슷한 것 중에서도 왜 이걸 고르는지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취향도 계속 보고 경험하고 비교해봐야
점점 구체적으로 생기는 것 같음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좋아해보고
많이 경험해보는 게
생각보다 쓸모없는 일이 아닌 것 같음
결국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
뭘 고를 때도 덜 흔들리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