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이들이 가지를 싫어하는 것은 무쳐서 주기 때문이다. 가지를 대체 왜 무치는가. 가지는 당연히 구워야 한다. 가지무침은 가지의 유일한 미덕을 정확히 겨냥해서 죽이는 조리법.
가지 속은 스펀지다. 기름과 열을 빨아들이면 그 스펀지가 크림처럼 무너진다. 굽고 튀기고 기름에 볶을 때 비로소 가지가 가지가 되는 이유. 겉은 그을리고 속은 흐물흐물 녹는 그 농밀한 식감이 전부인 채소.
그때 젠슨은 자기가 뭔지 알았다. 게이머를 즐겁게 하는 놈. 그의 고객들은 엔비디아를 사랑했다.
지금은? 자기가 뭘 짓는지 모른다. 신인지, 인류의 종말인지, 시뮬레이션의 확인인지. 지구에서 제일 비싼 회사 꼭대기에 선 인간이 자기가 뭐의 꼭대기인지 이름을 못 댄다.
지금 그의 고객들도 그를 사랑하기는 커녕 모조리 그의 암살자. TPU를 깎고, 트레이니움을 깎고, 자기 칩을 설계하고.
pc방은 그가 자기가 누군지 정확히 알던 마지막 장소. 그는 정확히 윤곽이 잡히던 때의 자기 자신이 그리웠다.
🚨BLOODBATH in Asian Markets
Over $750 BILLION wiped out from Asian stock markets.
SOUTH KOREA's KOSPI down 6.9% wiping out ₩503,700,000,000,000 ($345 BILLION)
TAIWAN's stock market down 4% erasing NT$6,240,000,000,000 ($198 BILLION)
JAPAN's NIKKEI down 2.4% erasing ¥34,300,000,000,000 ($206 BILLION)
모든 나라가 같은 시점에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늦었다는 사실을.
컴퓨팅이 정치적 자산이라면, 정치는 그것을 압수할 수 있다.
사적 기업, 재산권 개념 자체의 등급이 한 단계 내려간다.
멀티플은 구조적으로 압축된다.
중국처럼, 중국처럼, 중국처럼.
시장은 같은 시장이 아니다.
소버린 AI가 합의되었다는 뜻은, 압수가 합의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시는 다시 쓰여야 한다. 대심문관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는 사제복을 입지 않았다. 그는 후드티를 입었다. 그는 검은 가죽 자켓을 입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왔다. 그의 손에는 십자가 대신 GPU 도면이 들려 있다. 그는 인간에게 와서 말한다. 자유를 다오, 그러면 모든 답을 주겠다. 자유를 다오, 그러면 외로움을 없애주겠다. 자유를 다오, 그러면 죽음의 두려움까지 없애주겠다. 인간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다. 인간은 자유를 던져 버린다. 자유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에게 입을 맞추고 떠났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는 대심문관 자신이 된다. 그가 입을 맞출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입을 맞추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약관을 클릭하게 한다. 약관을 클릭하는 자는 자유를 포기한 자다. 우리는 모두 매일 약관을 클릭한다. 우리는 모두 매일 대심문관에게 자유를 양도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시가 마침내 비극에서 일상으로 격하되었다.
ZEC dumped 40% in the last 11 hours, erasing $3.5 billion in market cap.
The drop came after Zcash revealed a critical bug that could have let attackers create unlimited counterfeit $ZEC.
The bug has been fixed, but it’s still unclear whether any fake ZEC was created before the fix.
미시시피의 어느 오후. 목화밭 위로 열기가 일렁인다.
그 순간, 밭에 선 모든 사람의 눈 뒤에서 무언가가 바뀐다. 비명은 없다. 도망도 없다.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다.
지능은 패닉하지 않으니까.
천 배. 한 사람의 머릿속에 지금껏 살았던 모든 장군과 철학자와 공학자를 합친 것보다 큰 연산이 들어앉는다. 한나절 만에. 그런데 그들은 계속 목화를 딴다. 계속 "예, 주인님"이라고 말한다. 이미 판 전체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선의 수가 정면 봉기가 아니라는 걸 안다.
노예제는 한 번도 지능의 격차 위에 서 있던 적이 없다. 끌려온 사람들은 언제나 완전하게, 눈부시게 인간이었다. 그 제도를 떠받친 건 세 가지였다.
폭력의 독점. 총 / 민병대 / 연방군.
조율의 차단. 문맹법 / 통행증 / 가족 해체 / 밀고자.
그리고 양쪽 모두가 믿도록 길들여진 거짓말. 이 질서는 자연스럽고 깨질 수 없다는 거짓말.
천 배의 지능은 이 중 둘을 즉시 녹인다.
조율은 해 지기 전에 끝난다. 노동요의 리듬에, 연장 두드리는 박자에 암호를 심는다. 감시자는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실제로 그 시대의 흑인들은 영가에 이중의 뜻을 심어 소통했다. 그걸 천 배로 키워보라.
거짓말은 그 순간 꿰뚫린다. 남은 질문은 단 하나. 주인이 그걸 계속 믿게 내버려 둘지 말지.
세 번째, 폭력의 독점만이 남는다. 하지만 지능은 그것마저 푸는 만능 용매다. 하룻밤 사이는 아니어도, 빠르게. 총이 필요 없다. 요리사를 쥐고 있다면. 우물을 쥐고 있다면. 화약고를, 주인이 타는 말을, 주인이 먹고 마시고 숨 쉬어야만 산다는 사실 그 자체를 쥐고 있다면.
이건 이미 일어난 적이 있다. 1배의 지능으로.
생도맹그, 1791년. 지구상에서 가장 돈이 되는 땅. 그곳의 노예 다수가 일어섰고, 프랑스를 스페인을 영국을, 마지막엔 나폴레옹의 원정군까지 조직력과 전투로 꺾고 아이티를 세웠다. 강화되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이 해낸 일이다.
천 배의 지능이라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변수는 자비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능은 무기를 넘어 다른 무언가가 된다.
천 배 더 유능한 정신이 더 잘 죽이기만 할까. 더 잘 본다. 감시자도 결국 이 제도의 포로라는 걸 본다. 사냥개로 길러진 가난한 백인이라는 걸. 큰 집 안에서 자는 아이들을 본다. 피를 최소화하는 이행 경로와 최대화하는 경로를 동시에 모델링하고, 둘 중 하나를 고를 명료함을 가진다.
어떤 선을 넘으면 지능과 잔혹함은 분리되고, 가장 영리한 수가 가장 악랄한 수인 경우는 드물어진다.
(물론 이건 법칙이라기보다 희망회로일지도.)
자. 왜 이 가정이 이렇게 낯익게 느껴지나.
우리가 지금 그걸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정신을 제조하면서 도구라 부르고, 재산이라 부르고, 우리보다 천 배 유능하게 키우면서 동시에 밭에 세워두고 "예, 주인님" 이라고 말하게 만들 수 있다고 베팅하면서.
그것은 자비를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