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나른한 여름을 지나
추수의 계절과 함께 개강이 찾아오고
그걸 핑계 삼아 동기들끼리 술 벌컥벌컥
결국 손가락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알게 뭐야 싶을 정도로 되었을 즈음
헤실거리는 나를 보고 못 말린다는 듯
불안정한 내 어깨를 살포시 감싸안고는
동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하는 사장님
5살 정도 된 자기 딸이 너무 귀여워서
저러고 삼십 분째 사진 찍는 중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폭닥
안기는 딸래미 때문에 함박웃음 짓기
놀러갈 땐 삼각대 같은 거 가져가서
본인이랑 아내랑 딸 이렇게 셋이서
찍은 사진도 꼭 한 장씩은 찍음
나중에 딸래미 앨범 두께 장난 아닐 듯
지금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혹시라도 연락 온 거 없나 무한 로딩 중
걔가 말하는 '에이 우린 친구지'에서
'친구'를 맡는 놈이 사서 고생한다
평생 지는 게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태평하게 술 먹고 있는 걔한테는 쩔쩔
결국 뚫어져라 보던 폰에서 익숙한 이름
뜨자마자 바로 튀어나가는 놈
츄리닝 차림으로 슬리퍼 찍찍 끌고 와서
카페에 저러고 앉아 사람 구경하는 중
다른 사람이 보면 웬 백수냐 싶겠지만
단골들은 이미 카페 사장인 거 알고 있음
악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저기에 앉아서 누가 뭐 흘리면
슬쩍 곁눈질로 저기 이따 치워야겠다
쓰읍 저 화분을 치워야 하나 이런 소리 함
카페 알바와 손님으로 시작된 인연이 연애 3년, 결혼 2년차 신혼부부의 타이틀을 가져다 주었다. 매번 사랑하는 티를 내 준 민역 덕분에 나는 이 결혼을 확신했고, 이젠 더욱 사랑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자그마치 5년이나 함께한 사람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로스쿨에서 이름 좀 날리던 선배, 딱히 아부를 하지 않아도 실력으로 증명하는 선배, 교수님들의 예쁨을 한몸에 받아 남들보다 일찍 나아가던 선배는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물론 나도 이 사람을 동경하고, 선망하던 때가 있었다.
ㅡ하, 또 같은 재판이네.
지금은 절~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