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본 민주주의가 일본의 토착 윤리전통과 충분히 재접속하지 못했다”는 문제제기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헌법·선거·삼권분립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시민이 스스로 절제하고, 공적 책임을 느끼고, 패배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며, 권력자 역시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민주주의적 습속’이 필요합니다. 토크빌이 말했던 바로 그 영역입니다.
이 점에서 일본 사회가 이미 수백 년 동안 가지고 있던 유교의 수신·공공심·책임·신의·염치·충언, 불교의 자기절제·자비·무상·상호의존, 무사도에서 발전한 명예와 자기통제 같은 어휘를 전후 민주주의의 시민윤리와 재해석하여 연결하는 길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충’을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 아니라 공공에 대한 책임으로, ‘의’를 인권과 법치로, ‘수신’을 자율적 시민의 자기절제로 번역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민주주의가 단순히 “미국에서 가져온 정치제도”가 아니라 일본인이 익숙한 도덕언어를 통해 이해되는 체제가 될 가능성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칸트적 이성이 틀렸고 『논어』가 민주주의의 진짜 토대다”라고 결론짓는 것도 문제입니다. 칸트의 자율, 인간 존엄, 보편적 법칙,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원칙은 오히려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윤리적 토대와 매우 잘 맞습니다. 반대로 전통적 유교에는 장유유서·가부장제·신분적 위계·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자유민주주의와 긴장하는 요소도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전전 국가 역시 충효·가족국가론 같은 유교적 언어를 천황제 국가주의와 결합해 활용했습니다. 따라서 유교 자체가 민주주의적이거나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느냐가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