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야기를 가끔 올리지만 때론 고루하고 때론 식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속에는 분명 각 시대의 여러 인간 군상들이 겪는 사회상이란게 우리만 겪는 특별한 상황도, 우리만 느낀 절망감만도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다.
오늘 전해 드릴 에피소드도 그 중 하나다. ��론 키케로는 과거 소개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한 발 더 나아가 얘기해보려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마 공화정은 권력의 진공 상태에 빠졌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안토니우스는 그 혼란을 틈타 무력과 재정을 장악하며 새로운 독재자로 군림하려 했다. 당시 62세의 원로 정치인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의 앞에는 아주 매력적이고도 안락한 유혹이 놓여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별장으로 물러나 조용히 철학이나 연구한다면, 당신의 부와 목숨을 안전하게 보장해 주겠다"는 은밀한 타협안을 보냈다. 광기 어린 권력에 눈을 감고, 노학자로서 이른바 '더러운 평화'를 누리라는 제안이었다.
���러나 키케로는 평생을 바쳐 지켜온 공화국의 헌정 질서가 한 명의 야심가에 의해 철저히 겁탈당하는 꼴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안락한 도피처를 걷어차고, 무장한 군인들이 득실대는 원로원 연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폭정을 낱낱이 고발하는 14편의 피 튀기는 연설문, '필리피카(Philippicae)'를 토해냈다.
키케로가 목숨을 걸고 폭로했던 14편의 연설문은, 권력이 어떻게 이성을 잃고 공화국을 내부로부터 부식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해부도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연설문에 대한 완역이나 해설본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로 그 연설문의 라틴어 원본과 영어 번역본을 볼 수 있는 링크를 첨부한다.
그가 해체한 독재의 알고리즘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죽은 전임자의 이름을 교묘하게 이용한 이른바 '시체팔이의 원형'이다.
안토니우스는 죽은 카이사르의 남겨진 메모와 서류를 자신의 입맛대로 위조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사적 이익을 채웠다. 키케로는 "독재자는 죽었는데, 검증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유령이 여전히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다"며 망자의 유산을 권력 연장의 방패막이로 삼는 기만술을 서늘하게 질타했다.
둘째, 숙의를 건너뛰고 광장의 군중을 동원하는 다수결의 폭력이다.
안토니우스는 합리적 토론의 장인 원로원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대신 선동에 취한 광장의 군중을 동원해, 합의되지 않은 법안들을 완력으로 강행 처리했다. 키케로는 이를 두고 "공화국의 지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군중의 폭력에 기대어 법을 겁탈하고 있다"며, 타협이 멸종된 폭민 정치(Ochlocracy)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셋째, 국가 재정의 ���유화와 매표 행위다.
안토니우스는 옵스 신전(로마의 국고)에 보관되어 있던 막대한 국가 재정과 카이사르의 유산을 마음대로 헐어 썼다. 국가의 금고를 털어 자신의 개인적인 빚을 갚고, 지지자들과 군단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현금을 살포했다. 국가의 미래를 담보로 지지층의 충성을 돈으로 사는 원시적인 포퓰리즘의 극치였다.
넷째, 측근을 보호하기 위한 사법 시스템의 유린이다.
키케로가 가장 분노했던 지점 중 하나는, 안토니우스가 비리를 저지른 자신과 측근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원의 배심원단을 자격 없는 자들로 교체하고 사법 시스템을 마비시켰다는 사실이다. 권력자의 치부를 덮기 위해 국가의 사법 기능을 거세하고 재판을 지연시키는 행태는 헌정 질서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었다.
다섯째, 맹목적 친위대를 동원한 국가 기관 겁박이다.
안토니우스는 이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한 원로원 회의장에 무��한 자신의 사병(私兵)과 극렬 추종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반대파의 입을 물리적으로 틀어막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력의 호위병들이 민주적 절차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키케로는 연설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잃은 체제의 본질을 뼈아프게 까발렸다. 그러나 이성을 잃어버린 군중과 완력을 쥔 권력자 앞에서 지식인의 혀는 한없이 무력했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암살단에 의해 키케로는 목이 베였고, 진실을 외치던 혀와 글을 썼던 두 손목은 로마 광장의 연단에 못 박혀 조리돌림을 당했다. 어리석은 대중은 권력자가 던져주는 빵에 환호하며 키케로의 죽음을 방관했다.
그렇다면 키케로는 완전히 패배한 것인가.
역사의 섭리는 결코 그렇게 얄팍하지 않다. 광장의 군중은 당장 눈앞의 빵을 쥔 자를 연호했지만, 그 권력자는 결국 투쟁에 패배해 비참하게 자결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광장에서 썩어 문드러진 줄 알았던 키케로의 그 차갑고 묵직한 문장���은 2천 년의 세월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공화주의와 법치를 지탱하는 가장 위대한 뼈대가 ���었다.
하루하루 절망적인 시대의 몽유병을 직시하며 고독하게 펜을 쥔 사람들과, 타협과 침묵의 안락한 유혹에 흔들리거나 거대한 무력감에 펜을 꺾고 싶을 때마다, 저 낡은 광장에 내걸렸던 키케로의 손목을 기억해야한다. 우리가 뜬눈으로 지새우며 쏟아내는 차가운 활자들이 당장 광장의 맹목적인 군중을 설득하지 못한다 해도 결코 허무해할 필요가 없다. 이기적인 권력과 군중의 광기는 시간 앞에 흩어지는 잿더미에 불과하지만, 붕괴하는 이성을 막아서기 위해 피 토하듯 남겨둔 진실의 기록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무너지는 공화국을 향해 던졌던 필리피카는, 환상이 깨진 훗날 반드시 이 사회를 다시 세울 가장 강력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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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노른자위 땅만 골라 파산의 잿더미로 만드는 이 놀라운 연쇄 붕괴의 평행이론을 보고 있노라면, 저들이 부르짖는 '유능함'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지 아득한 현기증이 밀려온다.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그, 우리의 '볼드모트'가 거쳐 간 정치적 본거지들의 면면을 보라. 첫 번째 실험대였던 성남시는 판교 테크노밸리라는 거대한 IT 기업들의 화수분과 강남권이 생활영역으로 묶이는 지리적 이점을 품은, 그야말로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는' 축복받은 지자체였다. 아무리 호화 청사를 짓고 예산을 펑펑 써대도 어지간해선 금고가 마르지 않을 구조다. 그런데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화려한 치적 서사가 아니라 곪아 터진 빚더미였다.
그 참혹한 실체는 후임자인 은수미 전 성남시장의 입을 통해 본의 아니게 폭로된 바 있다. 2018년, 은 전 시장은 "장기미집행 공원일몰제 대응을 위해 4,000억 원이 넘는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SNS에 하소연했다. "나는 성남시의 빚을 다 갚았다"고 자화자찬하던 볼드모트의 새빨간 거짓말이 후임자의 앓는 소리에 들통이 난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오래가지 못했다. "감히 우리의 절대존엄을 팀킬하느냐"며 득달같이 달려든 강성 지지자들의 십자포화에 기겁한 은수미가 황급히 글을 수정하고 입을 다물어버린 그 촌극은, 빚으로 쌓아 올린 가짜 유능론의 얄팍한 밑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완벽한 블랙코미디다.
이 기괴한 '마이너스의 손' 법칙은 경기도로 무대를 옮겨 더욱 거대하게 반복되었다. 경기도가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 수출의 심장인 반도체 공장들이 포진해 있고, 수많은 일반 산업단지가 뿜어내는 막대한 세수로 숨만 쉬어도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역대급 지자체다. 그런데 그분과 민주당이 휩쓸고 간 그 튼튼한 금고 역시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추미애는 사실상 '경기도 부도'를 선언하며 7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채무를 고백하며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가.
조건만 놓고 보면 절대 깡통을 찰 수 없는 우량 기업 두 곳을 연달아 부도로 몰아넣은 셈이다. 기본소득, 재난지원금, 지역화폐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걸고 미래 세대의 주머니를 털어 당장의 표를 매수하는 악성 포퓰리즘이 만들��낸 필연적 파국이다. 가는 곳마다 금고를 거덜 내고 빚잔치 영수증만 수조 원 단위로 남겨놓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그래도 행정은 잘한다"며 맹목적으로 빨아주는 것인지 이 기형적인 종교적 맹신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성남시에서 경기도로 덩치를 키우며 이어진 이 끔찍한 연쇄 파산의 궤적 앞에서 우리는 차가운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주저 없이 갈라 당장의 고기 파티를 벌인 이 무책임한 권력자의 현 위치가 바로 '대한민국'의 운전석이기 때문이다. 수천억 원의 빚을 숨기고 수조 원의 채무를 떠넘기며 자화자찬하던 그 볼드모트식 가짜 유능함의 그림자가 국가 재정마저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는 기어이 이 파괴적인 평행이론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한다.
나도 한때 민주당원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했고,
MB·박근혜 시절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때 나는 민주당이 약자 편에 서고, 정의를 지키며,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 거라 믿었다.
그러나 서서히, 너무 서서히 본색이 드러났다.
이재명이 시장 시절 보여준 행태는 ‘개혁’이 아니었다.
측근 비리, 측근 사망, 조폭 연루 의혹, 성남FC 의혹,
대장동 게이트, 여성과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처음엔 ‘음해’라 생각했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변명과 거짓말이 반복됐다.
그리고 그의 곁에 모인 얼굴들을 보라.
김어준, 김민석, 정청래, 송영길, 추미애, 우원식,
조국, 윤미향, 김민웅, 강선우, 김남국…
부패, 위선, 친중·친북 노선이 한데 뭉친 정치의 집약체였다.
윤미향 사건만 봐도 그렇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팔아 모금한 돈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의혹, 회계 불투명, 피해자와의 갈등.
이게 인권운동가의 모습인가?
그런데 민주당은 그녀를 감싸며 “정치 ��압”이라고만 외쳤다.
피해자는 외면한 채, 가해 의혹자만 보호하는 ‘인권 팔이’였다.
강선우는 ‘여성 정치인’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실상은 논리 대신 감정 자극, 토론 대신 선동.
김민웅은 언론과 강단에서 ‘친북 논리’를 주입했고,
김민석은 그때그때 유리한 쪽으로 줄을 서며 자기 입지만 챙겼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력 카르텔이다.
정책은 더 끔찍했다.
기본소득, 소비쿠폰, 무차별 현금 살포로
국민을 ‘국가 의존형’으로 길들이고,
국방 약화, 한미동맹 흔들기, 중국 눈치 보기로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
그 와중에 북한에는 끊임없는 저자세와 지원.
그게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나는 환멸감을 느꼈다.
내가 믿었던 ‘민주’라는 이름이,
실제로는 권력 유지와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이었음을 깨달았다.
통합진��당 해산 당시 종북세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당의 그��로 숨어 들어왔다.
당신이 아직도 민주당을 믿는다면, 제발 눈을 떠라.
이건 보수가 옳고, 진보가 틀렸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지금 똑똑히 보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팬덤이 아니라,
나라와 후손을 위한 냉정한 선택이어야 한다.
나는 한때 '진보'라는 단어에 자부심을 느꼈다.
정의, 약자 보호, 국민 주권, 평등, 공존, 평화.
그 모든 가치를 '진보'가 품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자랑스럽게 "진보입니다",
"민주당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이 부끄러워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혐오하던 보수의 부패, 기득권 담합, 불의는
지금의 민주당이 더 악랄하고 더 위선적으로 하고 있다.
예전엔 보수가 부패했고, 진보는 정의로웠다.
지금은 진보가 부패하고, 보수는 적어도 부끄러움을 안다.
정의는 이제 민주당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어다.
민주는 국민의 것이라며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국민’을 개무시하고 있다.
그들 입에 붙은 '약자'라는 말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어릴 때 배웠던 공산주의의 모습이
이제 민주당에 그대로 투영된다.
입을 막고, 언론을 장악하고, 반대하면 적폐로 몰고.
���한과 중국이 하던 방식이다.
"진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감’이 아니다.
그저 "편 가르기"와 "과거 팔이"로 퇴보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충격적인 건 내 주변이다.
정의, 인권, 공정, 약자를 외치던 친구와 현제들이
이제는 범죄를 옹호하고, 이견을 탄압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2찍'이라며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이토록 잔인하고 배타적인 나라가 되었나?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는 사라졌다.
이제는 '충성심'이 주권을 대신하고,
'팬덤'이 사리분별을 삼키고 있다.
이념보다 사람이 먼저였던 정치는
이제 이재명 한 사람의 사법 리스크를 위해
모든 가치를 희생시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이 나라는 내 자식들이 살아갈 곳이다.
조국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적인 진영논리에서 ��어나야 한다.
지금 이 불의와 몰상식을 용납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우리가 알던 나라가 아니게 된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보다 못 배운 시대의 사람들도,
불의 앞에선 분노할 줄 알았다.
왜 지금은 그렇게 똑똑하고, 잘 배운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입을 막고, 부끄러움을 잊었는가?
민주주의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것조차 실험하고 있다.
지금 깨지 않으면, 나중엔 후회할 기회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