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유행어처럼 떠도는 "인공지능의 시대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딴지를 걸어 보았습니다. 질문의 중요성을 생성형 인공지능 부상의 산물로 이해하거나, 질문만 잘하면 학습과 발달이 일어날 것처럼 말하는 풍조에 대한 제 나름의 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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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프트를 잘 던지면 근사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과 결과물의 진위를 가려내는 문해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묻고 싶다. 질문하는 힘과 텍스트를 꿰뚫는 통찰이, 과연 ‘기능적 숙련’으로 길러질 수 있는가.
등록 2026-03-26 16:52
https://t.co/raQs7NhO51
여전히 긴 글을 읽는 이유
"‘세 줄 요약’을 원하는 이의 생각은 요약하는 사람 혹은 AI가 점령한다."
"세상사는 언제까지나 변화무쌍할 것이며,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계의 복잡함을 외면하지 않으며 오래 배우고 고민해야 한다."
https://t.co/m0FYGHVlJS
마이클 폴란 신작 A World Appears 리뷰
(아래 원문 발췌)
인간은 기계보다 낫다거나 심지어 다르다는 말마저 요즘은 의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약 500년 동안 과학적 방법은 거의 끊임없이 승리하는 듯했고, 그 결과 인류는 세 차례 강등됐다.
먼저 우주의 중심에서(코페르니쿠스), 다음은 세계의 중심에서(다윈), 마지막으로 자기 정신을 지배하는 자리에서(프로이트) 추락한 것이다. 이런 지적 혁명과 그 사이 수천 가지 과학적 탐구 과정에서 인간의 자존심은 충격을 받았다.
가령 진화론 논쟁이 벌어지기 얼마 전, 인간이 자연계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라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세포 이론이다. 논란이 덜했던 이유는 반박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누구라도 풀잎과 엄지손가락 피부 조직의 기본 구조가 같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련의 과학적 정복에 맞서는 단 하나의 방어선이 남아 있다: 의식이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이 요약했듯,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는가? 이 질문에 지난 수세기 많은 연구자들이 답하려 애써왔음에도 우리는 원시인들보다 단 한 걸음도 확실한 해결책에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AI의 열광적인 마케팅 담당자들조차 세계를 설득하는 데 쉽게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심연이다. 사실 그들은 그냥 틀린 게 아니라, 기억에 남을 만큼, 웃음거리가 될 만큼 틀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적어도 이 책이 내리는 결론 중 하나다.
사실 폴란은 늘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꾸준한 핵심 관심사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경계를 넘는 것에 있었다. 먼저, 음식에 관한 획기적인 저서는 미국 식단을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음식을 먹어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가급적 식물성으로 먹어라”); 최근엔 환각 약물에 관심 가지며, 또 한번 이 주제가 주류 담론으로 부상할 걸 예견했다. 의식은 이 프로젝트의 논리적 최종 목적지이자 그의 신작 주제다: 인간이 외부로부터 흡수하는 모든 것과 그 교차점이 의미하는 것.
이 책은 저자가 방대한 독서와, 주요 과학자들과의 수많은 인터뷰, 그리고 광범위한 개인적 실험 끝에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견해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현재 의식에 관한 경쟁적 가설은 최소 106개에 달하며, 이 중 22개는 물리주의(정신이 뇌의 물리적 물질이 생성한 특성에 불과하다는 믿음)적 설명이고, 84개 이상의 비물리주의적 이론이 존재한다. 이처럼 경쟁적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현상은 “해당 분야가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꽤 잘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이 혼란을 네 단계로 안내하는데, 각 단계마다 복잡성이 점차 증가한다. 첫 번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식물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도 그의 발밑은 흔들린다. 식물은 우리의 오감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상이한 ‘감각’으로부터 정보를 통합할 수 있다고 그는 보고한다.
이어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부분인 ‘감정’에 대해 논한다. 감정은 의식의 필수 조건으로서 계산보다 선행한다. (그가 인터뷰한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남성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감정을 너무 ‘여성적’이라 여겨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기에 감정이 홀대받았다고 믿는다.)
폴란은 “컴퓨터 과학의 역설 하나는 우리가 한때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겼던 ‘고차원의 능력들-이성, 언어, 지능-을, 감정과 정서를 포함한 동물과 공유하는 더 기초적인 능력들보다 기계가 더 쉽게 습득했다는 점이다.”
책의 3장은 저자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통해 사고를 추적한다. 4장은 가장 신비로운 장으로, 자아에 관한 것이다. 자아가 존재하는지, 우리 육체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 때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다. 이 장은 71세인 저자가 산타페의 동굴에서 명상하며 자신의 탐구가 해결 불가능한 본질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 주제를 다루는 더 명료하고 강렬한 입문서로는 A World Appears보다 더 나은 것들도 있다. 이 책은 진지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복잡한 추상 개념들을 개념화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진정한 천재성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바로 문화가 향하는 방향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는 음식과 환각제 분야에서 이를 입증했으며, 이번에도 (AI에 집중하는 부분은 간헐적이지만) 다시 한번 그 능력을 발휘했다. LLM 개발자들이 냉소적이거나 어리석게도 해결 직전이라고 주장하는 문제를 끈기 있게 분석함으로써, 그는 최근 헤드라인과 금융 시장, 정치 논쟁을 장악한 이 기술을 훨씬 현실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를 뇌에 비유하는 은유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무너진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 읽다가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피질 신경세포 하나가 심층 인공 신경망 전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다.” AI는 흥미롭고 유용한 도구지만 그 격차를 OpenAI의 올트먼이 실험실에서 조만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물론 폴란은 자신의 결론 뒤에 따라올지 모르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결국 그는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 작가다. 역사적으로 과학 혁명에 저항한 이들은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 증오로 빠져들곤 했다. 자연선택론에서 나치즘과 우생학으로 이어지는 오용의 계보도 있다. 게다가 실리콘밸리에서 AI에 의문을 제기하면 “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경계심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컴퓨팅이 과학 혁명으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주로,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유토피아적 신비주의의 아우라에 싸인 경제 혁명이다.
AI 수장들이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반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기업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비용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최근 빅테크와 우익 정치의 결합이 어떤 이들에겐 안도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게 더 솔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AI 기술은 그것을 흡수하는 정치 운동만큼이나 정신적으로 반동적이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와 머스크가 똑같은 열정으로 공유하는 톨킨식 이름들, 우주 판타지, 낭만적 민족주의적 밈들을 보라.
폴란이 보여주는 것은 이 폭력적인 변경에 AI가 부수적인 게 아니라 근본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기술은 아무리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팔아도 종착점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500년 만에야 마침내 과학과 기술이 할 수 없고 이룰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이 잠재적 실패에 대한 공포가 AI에 대한 저 히스테리의 핵심이다. 우리는 물질주의에 많은 것을 걸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건 건지도 모른다. 종교의 쇠퇴는 많은 이들에게 초월성을 접할 수 있는 믿음을 잃게 했다. 신이 아니라면 우리의 의식은 무엇 덕분일까? 화성 정복과 특이점 달성은 전 세계적으로 부활하는 민족주의처럼, 그 옛날의 위안을 맛보게 해주는 백일몽이다.
AI가 진정으로 이 지상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꿀 위협이 되기에 그 공급자들은 그에 걸맞는 과장된 수사를 구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분별한 행동은 단지 우리가 유한한 공간에 존재할 뿐이며, 우리 안에 신성하거나 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을 보여줄 뿐이다. 실리콘 칩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생에서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가능한 한 많이 움켜쥐고 문밖으로 나가면서 빼앗긴 상대를 비웃는 것뿐일 것이다.
이 책은 경험주의와 경험주의의 한계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을 훌륭하게 융합한 작품으로, 이 시대가 기술에 외주화하고 만 기적 같은 감각의 일부를 인류에게 되찾아준다.
서문에서 “동물의 특정한 조직이 어떻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다 실패한 연구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이 영원한 수수께끼가 저자로 하여금 이 호기심 가득하고 공감 어린 책을 쓰게 했다. 항상 답을 찾으려 애쓰되 결코 찾지 못하는 것: 인간됨의 의미란 바로 그것다. 이 사실을 어떤 이들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절벽 위에 섰을 때 순수한 황홀감도 있다. 모든 질문 너머에 존재하는 질문-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https://t.co/XDT87Y7ulx
마이클 폴란 신작 A World Appears 리뷰
(아래 원문 발췌)
인간은 기계보다 낫다거나 심지어 다르다는 말마저 요즘은 의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약 500년 동안 과학적 방법은 거의 끊임없이 승리하는 듯했고, 그 결과 인류는 세 차례 강등됐다.
먼저 우주의 중심에서(코페르니쿠스), 다음은 세계의 중심에서(다윈), 마지막으로 자기 정신을 지배하는 자리에서(프로이트) 추락한 것이다. 이런 지적 혁명과 그 사이 수천 가지 과학적 탐구 과정에서 인간의 자존심은 충격을 받았다.
가령 진화론 논쟁이 벌어지기 얼마 전, 인간이 자연계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라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세포 이론이다. 논란이 덜했던 이유는 반박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누구라도 풀잎과 엄지손가락 피부 조직의 기본 구조가 같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련의 과학적 정복에 맞서는 단 하나의 방어선이 남아 있다: 의식이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이 요약했듯,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는가? 이 질문에 지난 수세기 많은 연구자들이 답하려 애써왔음에도 우리는 원시인들보다 단 한 걸음도 확실한 해결책에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AI의 열광적인 마케팅 담당자들조차 세계를 설득하는 데 쉽게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심연이다. 사실 그들은 그냥 틀린 게 아니라, 기억에 남을 만큼, 웃음거리가 될 만큼 틀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적어도 이 책이 내리는 결론 중 하나다.
사실 폴란은 늘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꾸준한 핵심 관심사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경계를 넘는 것에 있었다. 먼저, 음식에 관한 획기적인 저서는 미국 식단을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음식을 먹어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가급적 식물성으로 먹어라”); 최근엔 환각 약물에 관심 가지며, 또 한번 이 주제가 주류 담론으로 부상할 걸 예견했다. 의식은 이 프로젝트의 논리적 최종 목적지이자 그의 신작 주제다: 인간이 외부로부터 흡수하는 모든 것과 그 교차점이 의미하는 것.
이 책은 저자가 방대한 독서와, 주요 과학자들과의 수많은 인터뷰, 그리고 광범위한 개인적 실험 끝에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견해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현재 의식에 관한 경쟁적 가설은 최소 106개에 달하며, 이 중 22개는 물리주의(정신이 뇌의 물리적 물질이 생성한 특성에 불과하다는 믿음)적 설명이고, 84개 이상의 비물리주의적 이론이 존재한다. 이처럼 경쟁적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현상은 “해당 분야가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꽤 잘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이 혼란을 네 단계로 안내하는데, 각 단계마다 복잡성이 점차 증가한다. 첫 번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식물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도 그의 발밑은 흔들린다. 식물은 우리의 오감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상이한 ‘감각’으로부터 정보를 통합할 수 있다고 그는 보고한다.
이어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부분인 ‘감정’에 대해 논한다. 감정은 의식의 필수 조건으로서 계산보다 선행한다. (그가 인터뷰한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남성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감정을 너무 ‘여성적’이라 여겨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기에 감정이 홀대받았다고 믿는다.)
폴란은 “컴퓨터 과학의 역설 하나는 우리가 한때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겼던 ‘고차원의 능력들-이성, 언어, 지능-을, 감정과 정서를 포함한 동물과 공유하는 더 기초적인 능력들보다 기계가 더 쉽게 습득했다는 점이다.”
책의 3장은 저자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통해 사고를 추적한다. 4장은 가장 신비로운 장으로, 자아에 관한 것이다. 자아가 존재하는지, 우리 육체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 때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다. 이 장은 71세인 저자가 산타페의 동굴에서 명상하며 자신의 탐구가 해결 불가능한 본질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 주제를 다루는 더 명료하고 강렬한 입문서로는 A World Appears보다 더 나은 것들도 있다. 이 책은 진지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복잡한 추상 개념들을 개념화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진정한 천재성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바로 문화가 향하는 방향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는 음식과 환각제 분야에서 이를 입증했으며, 이번에도 (AI에 집중하는 부분은 간헐적이지만) 다시 한번 그 능력을 발휘했다. LLM 개발자들이 냉소적이거나 어리석게도 해결 직전이라고 주장하는 문제를 끈기 있게 분석함으로써, 그는 최근 헤드라인과 금융 시장, 정치 논쟁을 장악한 이 기술을 훨씬 현실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를 뇌에 비유하는 은유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무너진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 읽다가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피질 신경세포 하나가 심층 인공 신경망 전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다.” AI는 흥미롭고 유용한 도구지만 그 격차를 OpenAI의 올트먼이 실험실에서 조만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물론 폴란은 자신의 결론 뒤에 따라올지 모르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결국 그는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 작가다. 역사적으로 과학 혁명에 저항한 이들은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 증오로 빠져들곤 했다. 자연선택론에서 나치즘과 우생학으로 이어지는 오용의 계보도 있다. 게다가 실리콘밸리에서 AI에 의문을 제기하면 “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경계심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컴퓨팅이 과학 혁명으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주로,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유토피아적 신비주의의 아우라에 싸인 경제 혁명이다.
AI 수장들이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반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기업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비용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최근 빅테크와 우익 정치의 결합이 어떤 이들에겐 안도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게 더 솔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AI 기술은 그것을 흡수하는 정치 운동만큼이나 정신적으로 반동적이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와 머스크가 똑같은 열정으로 공유하는 톨킨식 이름들, 우주 판타지, 낭만적 민족주의적 밈들을 보라.
폴란이 보여주는 것은 이 폭력적인 변경에 AI가 부수적인 게 아니라 근본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기술은 아무리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팔아도 종착점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500년 만에야 마침내 과학과 기술이 할 수 없고 이룰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이 잠재적 실패에 대한 공포가 AI에 대한 저 히스테리의 핵심이다. 우리는 물질주의에 많은 것을 걸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건 건지도 모른다. 종교의 쇠퇴는 많은 이들에게 초월성을 접할 수 있는 믿음을 잃게 했다. 신이 아니라면 우리의 의식은 무엇 덕분일까? 화성 정복과 특이점 달성은 전 세계적으로 부활하는 민족주의처럼, 그 옛날의 위안을 맛보게 해주는 백일몽이다.
AI가 진정으로 이 지상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꿀 위협이 되기에 그 공급자들은 그에 걸맞는 과장된 수사를 구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분별한 행동은 단지 우리가 유한한 공간에 존재할 뿐이며, 우리 안에 신성하거나 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을 보여줄 뿐이다. 실리콘 칩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생에서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가능한 한 많이 움켜쥐고 문밖으로 나가면서 빼앗긴 상대를 비웃는 것뿐일 것이다.
이 책은 경험주의와 경험주의의 한계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을 훌륭하게 융합한 작품으로, 이 시대가 기술에 외주화하고 만 기적 같은 감각의 일부를 인류에게 되찾아준다.
서문에서 “동물의 특정한 조직이 어떻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다 실패한 연구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이 영원한 수수께끼가 저자로 하여금 이 호기심 가득하고 공감 어린 책을 쓰게 했다. 항상 답을 찾으려 애쓰되 결코 찾지 못하는 것: 인간됨의 의미란 바로 그것다. 이 사실을 어떤 이들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절벽 위에 섰을 때 순수한 황홀감도 있다. 모든 질문 너머에 존재하는 질문-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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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유학 1년 후 입대해 논산 훈련 거쳐 용산 연합사에서 통역병으로 2년 복무 후 제대한 남성의 긴 회고 에세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637일 동안 모두 184권의 책을 읽긴 했지만…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시각에서 적어 내려간 한국 사회와 군대 문화, 집단과 개인, 독서와 권력, 인간과 선악과 윤리에 대한 단상. 끝까지 읽었을 때 좋은 글. 아래는 부분 발췌: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리처드 로티는 두 종류의 책을 구분한다: 우리를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책과 우리를 ‘덜 잔혹하게 만드는’ 책이다. 군대에서 나의 독서는 명확히 첫 번째 유형을 추구한 것이었다. 개인을 대체 가능한 단위로 전락시키는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로티가 경고하듯, 바로 그 자율성의 추구 속에 잔혹성의 잠재력이 도사린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특정한 종류의 완성을 이루려 집착할 때 우리가 타자에게 가하는 고통과 굴욕을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그럴 때 내가 잔혹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것이 내가 덕을 지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간과했던 것은 책으로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바로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가장 생생한 인간 드라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극적인 아이러니였다. 책 읽는 삶-특히 작가의 삶-은 쉽게 일종의 자기-소비로 변질되어 세상을 피 한 방울 없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전락시킨다.
군복무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부대 회전문을 나설 때 나는 자문했다: 책이 없었다면 군대에서의 내 삶은 어땠을까? 하지만 (부대 밖) 현실의 삶이 다시 시작되려던 바로 그때 또다른 질문이 답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책이 곁에 있음에도?
https://t.co/czRcrVXCsa
AI 혁신 바람이 휩쓴 대학가. 인문학 교수가 학생과 교수들 보고 듣고 쓴 글 /아래 글 참조
AI 사용이 삽시간에 퍼진 걸 보며 대학 교육의 목적을 되묻게 된다. 과거에 대학 진학을 택할 땐 주어진 특정 과제를 수행한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했다. 규칙을 따른다는 조건의 충족 인증으로 학위를 받았다. 전공 불문하고 어려운 일을 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학습 자체를 소중히 여기게 될 수도 있었다. AI 등장으로 이 과정과 어려움을 완전히 건너뛸 수 있게 됐다.
글쓰기가 왜 중요한가. 쓰는 과정과 방식이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리속에서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처리한다. 모두가 동일한 AI 도움을 받는 미래엔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문장 작성 능력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AI를 사용하는 학생 대다수는 비슷한 경로를 걷는다: 처음엔 자기 생각 정리 도구로 사용하던 것에서 결국 점차 모든 생각을 AI에 맡기는 단계로 간다. 일부에겐 이제 소셜미디어 같은 게 되었고, 화면 한쪽에 항상 열려 있는 주의분산의 통로로 기능한다. 생각의 과정을 외주화하며 자신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거의 잊는다.
AI 이용한 부정행위를 두고 말이 많지만 학생만 탓할 순 없다. 그들이 초등학교 시절 노트북 도입을 요구했던가. 팬데믹 기간 화상수업을 요구했던가. AI 개발도 기술 혁신 홍보도 그들이 한 것 아니다. 그들은 얼리어뎁터였고 주어진 체제에서 앞서려 했을 뿐이다. 그들은 비판적 사고와 느린 숙고보다 빠른 결정과 속도가 더 중시되는 시대에 나고 자랐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통제권이 없다. 무력감은 어른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느낄지 모른다. 한 순간엔 코딩이
대세라고 했다가, 다음 순간엔 영어나 철학 전공에서나 배울 수 있는 ‘소프트 스킬’이 중요하다고 한다. 내가 본 많은 학생들은 어떻게든 열심이다. 노력의 적잖은 부분이 불필요한 곳에 허비될뿐.
교육, 특히 인문학 분야는 실용적인 지식 습득 외에도, 우연히 들은 어떤 복잡한 개념이 학생의 마음에 뿌리 내리고 나중에 꽃피울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AI는 누구나 무엇이든 전문가인양 느낄 수 있게 하지만,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의심과 위험, 실패의 감수다. 대학은 자신의 글을 누군가가 책임 있게 읽어주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그러니 진심을 다해 자기 생각을 써보라.
교수들은 강의를 다시 짤 순 있지만 통제력에 한계가 있다. 얼마 전만 해도 AI 제한하려 했던 많은 대학들이 4년 전까지도 없었던 제품을 학교 미래에 필수라며 기업들과 협력 서두르는 걸 보라.
정말 걱정인 것은 챗GPT보다 젊은 세대가 직면한 더 포괄적인 환경 조건의 추세다. 점점 더 내향적으로 변해가는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두며 청소년기 특유의 어색함을 극복하는 연습을 할 기회도 의향도 잃어간다. AI는 조건 악화의 요인일 수 있지만 유일 원인은 아니다. 누적돼온 조건의 정점일 뿐.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더 이상 학생들과 '장인 정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디 너의 진실된 목소리를 들려줄 만큼 나를 존중해 줄 수 있겠니. 그 생각이 대단찮아도 좋아. 다만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너를 만나고 싶구나.
어딜 가든 뭘 보든 폰카로 촬영부터 한다. 기기가 없었으면 유심히 보고 기억에 담아두려 했을 것을. 그런 인지적 수고를 피해 손쉽게 관찰과 기억을 외주화하면서 자기 뇌의 저장고이자 생각의 자료실은 점점 비어간다. 폰카로 자기 데이터를 다 넘기며 AI 학습의 단말기 역할을 제 일처럼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