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향에 입문하지 마세요.
평범한 삶을 사세요.
그 편이 어쩌면 더 편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무리 외면해도 자꾸 같은 마음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한 번쯤 자신을 다시 한 번 바라봐도 괜찮아요.
성향을 안다는 건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나를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는 일이니까요.
평범하게 살기 위해 나를 속이는 것과,
나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는 결국 자신만 알 수 있어요.
어떤 선택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외면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결국 각자의 방식이니까.
중요한 건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니까.
성향자와 ‘변바’의 차이는 뭘까.
나는 그 차이가 성향의 강도, 연차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플레이를 얼마나 강하게 좋아하는지, 얼마나 오래 성향판에 있었는지가 기준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건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이해하고, 또 그 욕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향 고찰은 단순히 내가 돔인지, 섭인지, 어떤 플레이를 좋아하는지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왜 이런 욕구를 느끼는지,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상대의 거절과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계속 들여다보는 과정에 가깝다.
이런 고찰이 부족하면 자신의 욕망을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기 쉬워진다.
“나는 돔이니까 이 정도 통제는 당연해.”
“섭이면 이 정도는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쌓이면 성향은 자기이해의 언어가 아니라, 욕구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고찰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좋은 성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말을 잘해도 실제 관계에서 상대의 경계와 동의를 무시한다면 의미가 없다.
결국 고찰은 시작점이고, 그 뒤에는 절제와 책임, 동의와 행동이 따라와야 한다.
나는 좋은 성향자란 자신의 욕망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그 욕망을 어디까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돔텍과 섭깁을 궁금해하시는 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 말들이 꽤 레즈비언 관계에 특화된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즈비언의 성관계는 음경 삽입을 기본값으로 두지 않는 경우가 많고, 누가 ‘하는 쪽’이고 ‘받는 쪽’인지가 자연스럽게 정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성적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깁(Give)과 텍(Take)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해왔다.
그렇다 보니 BDSM의 돔/섭과 성적 역할인 깁/텍이 서로 별개의 축으로 나뉠 수 있고, 그 교차점에서 돔텍과 섭깁이라는 표현이 생긴 게 아닐까 싶다.
돔텍과 섭깁은 원래 한국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소소하게 사용되던 말이었는데, 앞으로는 단순한 조합어를 넘어 BDSM에서 하나의 성향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조금 기대해본다.
나는 돔텍이다. BDSM 성향으로는 돔이지만, 성관계에서는 받는 쪽을 좋아한다.
레즈비언 용어인 ‘돔텍’, ‘섭깁’이라는 개념은 아직 많은 정보가 없다. 그래서 나 역시 이에 대한 고찰이 아직 뚜렷하지는 않았다.
최근 처음으로 혼자 셈바에 갔을 때,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내게 말했다.
“텍 받으면 섭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꽤 혼란스러웠다. 내가 돔이 아닌 건가? 내가 스위치인 건가? 내가 알고 있던 나 자신이 틀린 건가?
그 뒤로 이어진 말들은 더 아팠다. 그냥 섭인 걸 인정하지 왜 자존심을 세우냐는 말, 그게 돔다운 거냐는 비웃음까지. 나는 그날 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처음 혼자 찾아간 성향자들의 공간이었고, 적어도 이곳에서는 각자의 성향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은 더 깊게 들어왔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고, 내가 알고 있던 나 자신까지 의심하게 됐다.
어쩌면 내가 트위터를 시작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비웃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곳,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안전하게 꺼내놓을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좋은 사람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성향을 더 깊게 고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으면서 배우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조금씩 더 알아가는 중이다.
레즈비언 BDSM 안에서 돔텍과 섭깁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많지 않다. 그래서 나 역시 여전히 정리하고 알아가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누군가의 한마디 때문에 내가 틀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성향을 고찰한다는 건 정답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계속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알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 역시 나를 더 정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성향판을 보다 보면 가끔 너무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얼굴 사진을 그대로 올리거나, 생활 반경이나 직업, 자주 가는 장소처럼 신상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남기는 경우도 있다.
물론 무엇을 공개할지는 개인의 자유다. 다만 성향판은 일반적인 SNS보다 관계와 취향, 사적인 정보가 더 깊게 오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번 공개된 정보가 어디까지 퍼질 수 있는지, 누가 보고 있을지 조금은 더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과 스스로를 보호하는 건 반대되는 일이 아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안전해야 한다.
가끔은 표현보다 안위를 먼저 생각해도 괜찮다. 오히려 오래 즐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지키는 감각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누군가를 이끌고 싶어 할까.
나는 지금 천 명이 넘는 비즈니스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안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고, 필요한 정보를 얻고,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때 꽤 큰 만족감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계획을 세워주는 걸 좋아했다. 내가 함께 정리한 계획을 따라 그 사람이 조금씩 달라지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좋았다.
그때는 내가 그냥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친구에게 너무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고, 그럴 때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나로 인해 조금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다.
물론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개입하려 하지 않고, 상대가 그것을 원하는지 먼저 본다. 하지만 내가 애정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그런 마음이 생긴다.
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필요한 순간에 방향을 잡아주고, 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누군가를 이끌고 싶어 할까.
성향을 깊게 고찰하면서 그 질문에 조금씩 답을 찾게 됐다. 오너나 미스트레스라는 성향은 단순히 관계에서 우위를 갖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신뢰받고, 존중받고,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내 모습과 꽤 닮아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나를 오지랖이 넓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나는 누군가를 억지로 바꾸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끼는 사람이 스스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곁에서 이끌어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오너와 미스트레스라는 성향은 내게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알게 된 뒤로는
나를 이해하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도
조금은 쉬워졌다.
돔의 자존심과 권위는 어떻게 다를까.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나는 꽤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존심은 내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에 가깝고, 권위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신뢰하게 되는가에 더 가깝다.
자존심이 앞서면 실수를 인정하기 어려워지고, 틀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방어적으로 변하기 쉽다. 섭의 질문이나 반대 의견도 ‘내 권위를 흔드는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권위는 오히려 그런 순간에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못했을 때 인정할 수 있는지, 사과해야 할 때 사과할 수 있는지, 감정이 상했다고 해서 맡겨진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지.
권위는 큰소리나 완벽함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일관성과 책임에서 쌓이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돔에게 필요한 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관계를 망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사과한다고 권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걸 인정한다고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보다 관계의 신뢰를 먼저 둘 수 있을 때, 그 권위는 더 단단해지는 것 아닐까.
누군가의 말보다
스스로 마주한 깨달음이
변화의 시작이 된다
변화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지만
깨달음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익숙한 나를 내려놓고
불편하고 아픈 나를 마주하며
끝까지 바꾸려는 것
그게 변화의 대가다
결국 사람은
깨달은 만큼이 아니라
변하기 위해 감당한 만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