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첨부한 사진 속 댓글을 남겨주신 분께 먼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결코 선생님을 조롱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그러기에 제 게시물의 작문 원칙과는 다르게 존댓말로 작성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적어도 이 게시물에 있어서 만큼은 인신공격성이나 예의에 어긋난 댓글을 삼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댓글을 처음 접한 제 심정은 뭐랄까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에 가까웠습니다. 저 역시 한때는 제 나이대 사람들이 그랬듯 남들 시선이 두려워 진보라는 그럴싸한 옷을 걸쳐 입었던 패션 좌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지금 어떤 두려움과 자기합리화 속에서 저런 글을 남기셨는지,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남들이 붙인 이름과 낙인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드렸습니다. 극우, 뉴라이트, 친일파 같은 꼬리표가 붙으면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고, 당장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할 것처럼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남들이 전하는 해설을 의심하서나 그 선에서 벗어나려 시도도 안했습니요.
저는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이재명에게 참 고맙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다들 무슨 소리냐며 깜짝 놀라지만,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 존재 덕분에 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빨간약을 먹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가짜 현실을 깨고 진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삼켰던 바로 그 빨간약 말입니다.
제가 얄팍한 패션 좌파의 허울을 벗어던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방금한 약속을 오늘 뒤집으면서도 한 치의 부끄러움조차 없는 좌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 머릿속에는 서늘한 의문 하나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렇게 백주 대낮에 뻔히 보이는 사실조차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우기고 속이려 드는데,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무조건적인 상식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이 맞긴 한걸까.
그 작은 의심이 제게는 완벽한 빨간약이었습니다. 그 의심을 품고 나니, 젊은 시절 제 등 뒤를 짓누르던 이름표들이 비로소 다르게 보였습니다.
직접 읽고 판단하며 팩트를 마주하며 알게 된 진실은 대단한 게 아니였습니다. 다만, 남들이 붙인 얄팍한 견출지 따위는 그 속의 진짜 내용물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척 보면 안다.'고 떠들던 사람들 역시, 실제로는 단 한 줄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무지한 사기꾼들에 불과했습니다.
남이 씹어서 입에 넣어준 요약본을 진짜라고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그 책 어디에도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국주의의 폭력 속에서 일본군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 포주와 브로커들이 어떻게 소녀들을 이용했는지 그 아픈 진실을 철저히 '학문적'으로 파헤친 책입니다. 하지만 조국 전 장관을 비롯한 사람들은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친일파로 몰았습니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나올 때까지 한 학자의 삶은 마녀사냥으로 무참히 망가졌습니다.
언급하신 이영훈 교수의 반일 종족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책 어디에도 식민 지배를 축복이라 찬양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당시의 경제 통계와 총독부 자료를 있는 그대로 대조해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유튜버들은 조회수를 올리려고 자극적인 가짜 요약본을 퍼뜨렸고, 대중은 그걸 세상의 절대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이진숙 의원-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공식 석상에서 분명히 5.18은 법률이 정한 민주화 운동이라고 수차례 밝혔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요지는 국민의 세금이 집해되는 국가사업에 유공자들의 이름조차 명백히 밝히지 못하는 게 말이 되는가? 여태껏 그렇게 방만하게 운영되도 유족의 슬픔이라는 말로 넘겨왔지만 이젠 기념사업을 넘어 국가의 뼈대라 할 수 있는 헌법에 싣자고 한다면 성역으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국민들의 토론으로 그 가치가 더더욱 정확히 평가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려운 말은 다 빼고, 아주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그 댓글을 짚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민주당이 마음에 안 들어서 국민의힘을 찍으려다가도 저런 인간들 때문에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하셨지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선생님은 애초에 보수 정당에 단 한 표도 던질 마음이 없으신 건 아닙니까?. 온갖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재명과, 거대 의석의 완력으로 국회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민주당을 계속 지지하고 싶은데, 스스로 생각해도 명분이 너무 부족하셨던 건 아닌가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런 친일 우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을 찍는다는 핑곗거리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민주당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씀은, 내 편이 저지르는 기막힌 잘못들을 외면하기 위한 가장 편하고, 어쩌면 비겁한 변명입니다.
만약 그들이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당히 포장할 줄 아는 영악한 사람들이었다면, 저 역시 지금도 그 달콤한 거짓말 속에서 남들이 붙여준 견출지 이름표를 넘지못할 금도처럼 여기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식을 짓밟는 저들의 투명하고도 노골적인 뻔뻔함이, 도리어 저를 맹목적인 믿음의 수용소에서 강제로 탈출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한 번쯤은 그 빨간약을 삼켜보시기를 감히 권해드립니다.
최소한 한 인간의 생을 규정할 정도의 확신을 그저 남들이 전해준 말에 의존하지 마시고, 책 한 권이라도 읽어보십시요. 그 한권을 끝까지 읽어볼 인내심도 없으면서, 유튜버가 짜깁기한 5분짜리 영상을 진리라 믿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행동은 이제 멈춰야 합니다. 누군가의 생각과 책을 비판하고 싶다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당장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 책들을 딱 한 번이라도 직접 펼쳐 보십시오. 그 학자들이 어떤 자료를 썼는지, 그 말이 정말로 틀렸는지 선생님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부터 하셔야 합니다.
내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알량한 정의가, 혹시 저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짜놓은 가짜 프레임은 아닐까 하는 아주 작은 의심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 의심을 품고 남이 뱉어준 요약본 대신 책장을 넘기고 스스로 판단하십시요. 다 읽으시고도 다들 친일파 맞네라는 결론에 다다르신 다면 판단을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자신의 두 발로 단단한 현실의 땅을 딛고 서는 진짜 자유인의 기쁨을 선생님도 꼭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값싼 인사 : 맘눌(좋아요)
마음을 누른다는 말이 나는 좋다.
엄지 하나로 하는 일에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필시 시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글에 답글이 달리면,
진료에 쫓기는 날에도 답은 못 할지언정
하트만은 꼭 누른다. 대단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다.
길에서 목례를 받으면 목례로 갚는, 딱 그만한 일이다.
들이는 시간은 1초가 못 된다.
그런데…..
이 1초가 없어 서운한 저녁이 더러 있다.
최근 어느 큰 계정의 글에 정성껏 답글을 달았는데
며칠째 아무 기척이 없었다.
숙인 고개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하다.
인사는 허공에 떠 있고 나는 공연히 먼 산을 본다.
저마다 사정이야 있으려니 하면서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조금 무겁다.
세상에서 가장 값싼 인사가 저 하트 한 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묘해서 주는 데는 1초가 들고 받지 못한 자리는 하루쯤 비어 있다.
예의란 거창한 데 있지 않고 상상력에 있다.
상대의 겸연쩍음을 그려 볼 줄 아는 사람은 손가락이 부지런해진다. 그늘 넓은 큰 나무가 되는 일은 내 힘 밖의 일이지만, 마주 오는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야 어려울 게 무엇인가?
오늘도 나는 몇 개의 마음을 눌렀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블록버스터 영화 오디세이가 전 세계 극장가를 강타하며, 3천 년 전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마저 서점가 베스트셀러로 역주행시키고 있다. CG를 극도로 꺼리는 놀란 감독이 무려 무게 3.6톤, 높이 10m에 달하는 거대한 실물 '트로이 목마'를 직접 지어 스크린에 구현해 낸 멸망의 스펙터클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그러나 트로이의 목마는 단순한 시네마틱 볼거리가 아니다. 밖에서 부술 수 없는 거대 요새의 내부로 들어가, 시민들 스스로 성문을 열고 자해극을 벌이게 만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인지전(Cognitive Warfare)의 완벽한 교과서다.
어제 KAIST 연구진이 네이버 뉴스 댓글 1억 1천만 개를 분석해 내놓은 충격적인 결과는, 2026년의 대한민국이 스크린 속 3천 년 전 트로이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함락되고 있음을 서늘하게 증명한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외국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려 2만 4천여 개의 조작 계정이 발각된 것이다.
가장 끔찍한 대목은 이 트롤 농장의 공작 메커니즘이다. 그들은 특정 정당을 노골적으로 편들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 양진영의 스피커로 교묘히 위장한 채, 극단적인 혐오와 분노를 유발하는 댓글을 양쪽에 번갈아 투척하며 한국 사회의 내부 갈등을 극한으로 폭발시켰다.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시스템 자체의 '거시적 마비'를 노린 것이다. 이는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흑백 갈등을 동시에 조장해 미국인들끼리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러시아의 이른바 '액티브 메저(Active Measures, 적극적 공작)'의 복사판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를 불태우는 방법은 의외로 명확하고 간단하다. 포털 사이트에 '댓글 국적 표시제'를 도입하여 사이버 국경의 방어막을 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 지극히 상식적인 방역 조치를 결사반대하며 거품을 무는 세력이 있다. 바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이다.
심증만 가던 사안에 이제 물증까지 쏟아진 이쯤에서 우리는 합리적 의심을 던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국적이 드러나면 안 되는 댓글이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선거와 여론을 쥐고 흔드는 그 익명의 텍스트들이 어느 나라 IP에서 작성되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자는 것이 어째서 표현의 자유 탄압이란 말인가.
좌파 진영의 이 궤변이 끔찍하게 역겨운 이유는 그들의 지독한 표리부동 때문이다. 지금 이재명 체제의 거대 여당은 경찰의 부실 수사를 고발하려는 자국민 피해자가 수사기록을 언론에 제보하면 징역 1년에 처해버리는 '피해자 입틀막 형사소송법'을 강행하고 있다. 그뿐인가. 이른바 '플랫폼법 개정안'을 들이밀며 디지털 광장 자체를 권력의 통제하에 두고, 입맛에 맞지 않는 비판 언론과 일반 국민의 목줄을 쥐고 흔들려는 전방위적인 입틀막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정작 주권자인 자국민과 언론의 숨통은 사법적 흉기와 플랫폼 규제로 무자비하게 끊어놓으면서, 국가 신경망을 갉아먹는 정체불명의 외세 조작 계정 앞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차별 금지'라는 거룩한 방패를 씌워 결사옹위하는 이 기괴한 매국적 모순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결국 좌파 권력은 외세가 던져주는 혐오의 땔감이 자신들의 맹목적 팬덤을 결집하고 진영 논리를 공고히 하는 데 철저히 유리하게 작동한다고 믿는 것이다. 국가의 뇌 신경이 파괴되든 말든, 당장의 표 계산과 권력 유지를 위해 2만 4천 개의 트로이 목마를 뻔히 보면서도 스스로 성문을 열어젖힌 셈이다.
영화 속 트로이는 그리스 연합군의 강대한 무력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목마의 본질을 꿰뚫어 볼 이성을 잃어버린 채, 그것을 전리품이라 환호하며 성안으로 끌어들인 내부의 어리석음 때문에 잿더미가 되었다. 외세의 조작은 보호하고 자국민의 입은 틀어막으며 내전을 부추기는 정치권이 존재하는 한, 스스로 붕괴하는 국가를 구원할 방어망은 없다. 혐오에 눈이 멀어 트로이의 목마에 면죄부를 쥐여준 대가로 치러야 할 청구서는, 결국 민주주의의 처참한 멸망뿐이다.
살다 보면 좌절하고 외롭고 절망하는 때가 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혼의 치유사’ 독일 철학자가 말해줍니다. 인생은 그네타기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상승하면 반드시 하강하는 것이고, 그 리듬이 우리를 성장시킨다고. 누구도 어김없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어느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은 책,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낙연의 사유,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말>
https://t.co/Gz0XTnGhKr
참혹한 폭력의 기억은 한 인간의 영혼을 쉽게 무너뜨린다. 일면식도 없는 괴한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던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그러나 그녀는 트라우마의 동굴로 숨어버리는 대신 기어이 세상 밖으로 나와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말도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분 참 웬만한 머스마보다 나으신 거 같다.
최근 그녀가 수사 조작으로 진실이 영원히 묻힐 뻔했던 광주 '장윤기 사건'의 유족을 찾아가 손을 맞잡았다는 소식은 숙연함을 넘어선 경외감마저 자아낸다. 부실한 1차 수사가 피해자를 얼마나 끔찍한 공포로 몰아넣는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기에, 남겨진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상처를 열고 방패를 자처한 숭고한 연대다.
그러나 정치는 이 위대한 생존자에게 참혹할 만큼 잔인했다. 자신을 구원한 마지막 생명줄을 제발 끊지 말아 달라는 피 끓는 절규조차, 오직 맹주의 방탄에 눈이 먼 거대 여당 앞에서는 그저 치워버리고 싶은 성가신 소음일 뿐이었다.
참다못한 피해자가 사법 파괴의 선봉장 격인 김용민의 SNS에 남겼다는 한 줄의 댓글은 그래서 뼈아프다.
"지옥에나 가세요."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다. 약자의 진실을 외면하고 국민의 생명줄을 무법의 정글로 내던진 타락한 권력자들을 향한, 가장 정확하고 서늘한 선고문이다.
특히 이 기막힌 사법 파괴의 현장에서 진정으로 역겨운 것은 이른바 '여성계'라 불리는 자들의 기괴한 침묵이다. 평소 여성 인권을 신흥 종교처럼 부르짖고 사소한 젠더 이슈 하나에도 득달같이 핏대를 세우던 그 숱한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지금 다 어디로 숨었는가.
범죄 피해자의 생존권이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사법 방어막 해체 앞에서도, 법을 망치는 주체가 자신들의 정치적 뒷배인 '좌파 진영'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철저히 입을 닫았다. 여성의 고통마저 진영의 유불리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그들의 시민운동은, 인권 보호가 아니라 기득권에 기생하기 위한 얄팍한 '정치 비즈니스'였음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언젠가 권력의 풍향이 바뀌면 또다시 입을 닦고 엄숙한 투사 행세를 하겠지만, 그들의 텅 빈 혓바닥을 믿어줄 대중은 이제 없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법의 척추를 부러뜨린 권력자들과, 진영 논리에 갇혀 진짜 약자의 비명을 철저히 외면한 선택적 인권팔이들. 이들이 합작한 위선의 잿더미 위에서, 억울한 피해자들은 오직 서로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닫으며 나는 저들에 대한 차가운 조소보다, 훨씬 더 간절하고 무거운 기도를 먼저 올리려 한다.
정치가 사법의 안대를 벗겨버리고 시스템을 망가뜨린 이 잔혹한 시대. 부디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과, 하루하루 성실하고 선량하게 땀 흘려 살아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이웃들이 결단코 저 위정자들이 열어젖힌 '무간지옥'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사법의 방패가 사라진 이 캄캄하고 야만적인 숲에서, 그 누구도 두 번 다시 억울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눈물 흘리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키토산의 효과? 아몬드 한 알 반
진료실에서 키토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게 껍데기로 만든다니 몸에 순할 것 같다고들 한다.
게는 그 껍데기로 한 생을 살았다.
파도와 갈매기에게서 제 몸을 지킨 갑옷이다.
사람은 그것을 강한 알칼리에 삶고 산에 녹여
흰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삼킨다.
남의 갑옷을 빌려 내 뱃살을 막아 달라 부탁하는 셈이다.
한쪽에서는 맹독이라 하고 한쪽에서는 기적이라 한다.
진실은 대개 소수점 아래에 조용히 앉아 있다.
키토산을 하루 4.5 g 먹으면, 흡수되지 않고 대변으로 빠져나가는 지방, 곧 분변 지방(fecal fat)이 복용 전보다 하루 1.1 g 늘어난다. 9.9 kcal이다.
아몬드 한 알 반…
Cochrane 리뷰는 그중 잘 설계된 시험만 따로 모았다.
누가 진짜 약을 받고 누가 가짜 약을 받을지 연구자도 미리 알 수 없게 감춘 시험, 배정은폐(allocation concealment)가 지켜진 시험이다.
미리 알면 사람을 고르는 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 시험들에서 체중 차이는 0.58 kg이었고,
그마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대신 변비와 복부팽만 같은 위장관 이상반응은
위약보다 1.9배 잦았다.
표시 문구는 “체지방 감소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이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은, 도움을 준다는 말이 아니다.
천연이라는 말도 그렇다.
복어도 천연이고 디지탈리스도 천연이다.
하나는 숨을 멈추게 하고, 하나는 지친 심장을 밀어 올린다.
자연은 편을 들지 않는다.
편을 드는 쪽은 언제나 파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알약을 산다.
나는 그것이 지방을 붙잡는 약이 아니라
마음을 붙잡는 약이라고 생각한다.
튀김 앞에서 죄책감을 한 알 삼키는 것이다.
흡수되지 않는 것은 키토산이 아니라 그날 밤의 후회다.
게딱지는 게를 지켰다.
사람을 지키는 갑옷은 따로 있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손, 한 정거장 앞서 내리는 다리.
값이 싸고, 알레르기도 없다.
요 근래 내 엑스 계정에 제법 흥미로운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이재명에게 단단히 실망한 듯한 굳이 자신을 민주당원이라 밝히는 이들의 팔로우 신청이 쇄도하는 중이다. 특히 조국이나 추미애를 지지하거나 민주당 권리당원임을 밝히는 분들의 노크가 눈에 띄게 늘었다. 맹신의 콘크리트 요새에 금이 가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나또한 패션 좌파일때, 무려 민주당 권리당원 출신이기도 하고,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고 문을 걸어 잠그는 옹졸한 취향은 없기에, 일단 날아오는 수락 버튼은 담담히 누르고 있다. 하지만 이 낯선 손님들의 타임라인을 훑어보면 반가움보다 헛웃음이 먼저 나온다. 이재명의 폭주와 도덕적 파산에 분노한다지만, 그들 시선 밑바닥에 흐르는 사상적 DNA는 여전히 뼛속까지 투명한 좌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조한 팩트를 마주해야 한다. 이재명이라는 괴물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돌연변이가 아니다. 내 편의 허물에는 무한한 관용을 베풀고, 팩트 대신 감성팔이에 열광해 온 좌파 특유의 척박한 토양이 기어코 잉태해 낸 가장 완벽하고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방문자들은 그 괴물을 키워낸 자신들의 토양은 여전히 신성하게 떠받든 채, 열매만 썩었다며 혀를 차고 있다. 이재명 하나만 치우고 내 입맛에 맞는 점잖은 새 아이돌을 데려오면, 자신들의 낭만적인 세계관이 다시 작동할 것이라 믿는 기막힌 인지부조화다. 본질적인 체제의 모순은 외면한 채, 낡은 팬덤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서글픈 인지부조화를 안고 찾아온 낯선 손님들을 환영한다. 거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는 첫걸음은,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의 파열음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다만, 내 담벼락을 찾아오신 이재명에게 실망하셨지만 여전히 조국, 추미애등을 지지 하시는 분들께 미리 정중한 경고를 남긴다. 나는 이재명 개인의 얄팍함만 조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탄생시킨 그 알량한 좌파적 세계관 전체를 이 서늘한 수술대 위에서 차갑고 건조하게 해체해왔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읽다 보면 십중팔구 '아, 내가 올 곳이 아니구나' 싶어 속이 꽤나 쓰리실 지도 모르겠다.
본인들이 먼저 발로 찾아와 친구 신청을 하셨으니 일단 문은 활짝 열어드린다. 하지만 팩트 폭격에 내상을 입고 조용히 '언팔로우'를 누르고 돌아서 가시더라도, 제발 뒤통수에 대고 쌍욕은 하지 마시라. 저또한 가셨다 욕하는 일은 없을테니 그것이 서로의 거친 산책길에 자진해서 들어온 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 믿는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10년을 훌쩍 넘긴 낡은 에어컨이 마침내 조용한 시위를 시작했다. 처음 거실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2, 3년에 한 번씩은 꼭 잔고장을 일으키며 속을 썩이던 변덕스러운 녀석이다.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전면부의 LED패널마저 맛이 갔다. 숫자가 깨져서 나오니 도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것인지, 무슨 에러 메시지를 띄우고 있는 것인지 통 해독할 길이 없다. 그저 창밖의 실외기가 웅웅거리며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만이 녀석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다. 다행히 일요일에도 근무를 하는 사설 가스 충전을 예약하며 기사를 불렀지만, 부디 그 얄팍한 처방 선에서 녀석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나는 보기보다 더위를 제법 잘 참는 편이다. 셔츠 자락에 땀이 좀 배어나는 것쯤이야 여름이라는 계절이 가진 당연한 질감이라 여기며 무던하게 넘길 수 있다. 선풍기 한 대가 토해내는 미지근한 바람만으로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이 내 안에는 충분히 내재해 있다. 그런데도 고장 난 기계 앞에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이유는 단 하나, 거실 바닥에 길게 몸을 뉘인 고양이들 때문이다.
온몸이 털로 덮인 이 작은 생명체들에게 에어컨이 멈춘 한여름의 찜통더위는 인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묵직한 재난이다. 조금이라도 서늘한 타일 바닥을 찾아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헉헉대는 녀석들의 무기력한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나의 무던함이나 인내심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더위를 참아내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일 수 있으나, 나의 체질을 핑계로 내게 온전히 의탁한 연약한 짐승들에게까지 이 끈적한 열기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전화를 걸어 기사를 재촉하고 기꺼이 수리비를 지불하게 만드는 진짜 동력은, 나 자신의 안락함이 아니라 곁에 있는 무해한 생명들에 대한 애틋한 책임감이다.
낡은 기계의 흐릿해진 LED 창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문득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우리네 삶의 궤적과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상념에 빠지게 된다. 어디가 아프고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히 알리던 젊은 시절의 선명함은 서서히 마모되고, 언젠가부터는 진단조차 모호한 먹먹함과 둔탁한 피로감만이 남는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가스 충전'이라는 소박하고 일시적인 처방에 기대어, 제발 이 여름의 남은 날들만이라도 무사히 버텨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어쩌면 나이듦을 견뎌내는 인간의 쓸쓸한 타협과도 같다.
무더운 거실 한가운데서 웅크린 고양이의 숨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삶의 척박한 순간과 짜증스러운 분노를 기어코 버텨내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강인해서가 아니라 내 곁에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무해하고 연약한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정이란 때로 그저 내게는 견딜 만한 더위조차 그 존재를 위해 기꺼이 서늘하게 식혀주고 싶은, 그 번거로운 수고로움을 기쁨으로 안는 일이다. 어서 가스가 충전되고 낡은 기계의 송풍구에서 다시 찬 바람이 불어나와, 저 바닥의 작은 짐승들이 평온하고 서늘한 단잠에 빠져들기를 조용히 기다려본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 왜 안오시나...
#이낙연 전 총리
2030 세대를 향한 모멸적 비난과 공격
진보 내부 2030 극우화 잘못된 인식, 난폭한 언어 사용
자기중심적 편견으로 젊은 세대를 재단해선 안된다. 공정성에 민감한 청년들은 참정권 침해에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기성세대의 타락, 불합리 분노 표현한다 생각
https://t.co/VqR0lAgUrk
평소 같았으면 건조하게 몇 마디 대화를 섞고 넘겼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알량한 지적 우월감을 뽐내던 객(客) 하나를 기어이 '또' 차단해 버렸다.
내가 6.3 지선 개표에서 쏟아진 '쌍둥이 득표' 현상을 무속 신앙에 빗대며 '부정선거'를 언급하자, 그는 득달같이 달려와 '지능'을 언급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대만 사례에서도 있었고 통계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우연인데, 왜 팩트 없이 선동하느냐"는 준엄한 훈계였다.
그래, 통계학자들의 말마따나 그 숫자 자체는 가능한 우연일 수 있다. 나 역시 글에서 인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둘러싼 국가 기관의 경이로운 야만성이다. 투표용지가 모자라 주권자를 내쫓고, 남의 지문을 프리패스시키고, 법원의 현장 검증 직전에 핵심 물증이 담긴 상자를 쓰레기차에 실어 불태워버린 선관위다.
심판이 대놓고 룰을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끔찍한 파행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데, 거기에 '통계적 기적'까지 더해졌다면 합리적인 시민으로서 당연히 거대한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대목에서 문득 헛웃음 섞인 한탄이 흘러나온다. 대체 왜 우리 보수만 늘 이토록 피곤하게 100% 완벽한 증거를 찾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산기슭을 어슬렁거려야 하는가. 범죄를 저지른 선관위가 '헌법기관'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밀실의 문을 걸어 잠가 수사조차 막고 있는데, 티끌 하나 없는 과학적 물증을 대령하기 전까지는 주권자가 의심의 돌멩이 하나 던지지 말고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토록 과학과 팩트를 사랑하시는 분들에게 건조하게 되물어보자.
과거 좌파 진영이 온 나라를 마비시켰던 그 거대한 선동의 역사 속에, 도대체 무슨 알량한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가.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이라며 유모차를 끌고 나왔던 광우병 사태. 참외가 전자파에 튀겨진다던 사드 괴담. 소금을 사재기하던 후쿠시마 선동까지. 삼류 소설만도 못한 미개한 괴담과 무속 신앙 수준의 공포를 무기 삼아 국가의 숨통을 조일 때, 그들은 그것을 "대중의 합리적 불안"이라며 거룩하게 묵인했다.
그런 자들이 왜 선관위의 명백한 행정 파산 앞에 분노하는 우파 시민들에게만 갑자기 엄격한 노벨상 후보급 통계학자로 빙의하여 '지능'을 운운하는가. 이 지독하고 역겨운 내로남불 앞에서는 비웃음조차 아깝다.
물론, 우리 보수가 저 좌파 카르텔처럼 밑도 끝도 없는 괴담을 날조하고 덮어놓고 선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보수의 무기는 차가운 이성이어야 하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국가 기관이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증거를 태우고 있는데, "법적 증거가 없으니" 점잖게 중립 기어를 박고 헛기침이나 하자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비겁함'이다.
권력이 은폐하려 할 때, 의심은 주권자가 쥘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방어권이다. 그 의심의 목소리를 지능 탓으로 뭉개며 쿨한 척 선을 긋는 것은, 이 비정상적인 권력의 폭주를 방관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공범 선언일 뿐이다.
그러니 알량한 지능을 자랑하고 싶었던 그 점잖은 분에게 마지막으로 '뜨거운 안녕'을 남긴다.
당신의 그 뛰어난 지능은 잘 알겠으니, 부디 나처럼 촌스럽고 지능 낮은 사람의 글에는 얼씬거리지 말고 당신 수준에 맞는 고상한 곳에서 노시라. 국가의 헌정 질서가 개판이 되고 참정권이 짓밟혀도, 그 대단히 높은 지능 덕분에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아주 여유롭게 버티실 만한가 보다. 나라가 완전히 망해갈 때도 부디 그 고상한 중립, 끝까지 훌륭하게 지키시길 바란다.
어쩌다 보니 또다시 ‘부정이냐 부실이냐’를 가르는 소모적인 사상 검증의 늪에 빠졌다.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 선관위의 파행이 의도된 조작인지 멍청한 실수인지 그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며칠을 이 지독한 갑론을박 속에서 허우적대다, 문득 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뜨겁고도 서늘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진짜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올림픽공원의 아스팔트를 지켜보던 중 마주한, 참으로 서글프고 기괴한 풍경 때문이었다.
나 역시 잃어버린 참정권을 찾으려 나선 청년들의 자발적인 시위에 낡은 정치색이 묻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현장 주변을 서성이는 우파 지지자들과 보수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았는가. 그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푹 눌러 가리고, 행여나 자신들의 존재가 청년들의 순수성에 ‘누가 될까’ 노심초사하며 발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정당한 의구심과 지지의 마음마저 억누른 채, 그저 멀리서 서성이는 그 주눅 든 어깨들을 보며 나는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슬픔을 느꼈다.
왜 우리는 늘 이토록 스스로를 검열하며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저들의 궤적을 차갑게 복기해 보라. 이 나라에 사회적 비극이나 굵직한 이슈가 터졌을 때, 민주당과 좌파 카르텔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난다던 광우병, 천안함 폭침을 향한 모욕과 음모론, 아이들의 비극에 인신공양설을 덧칠했던 세월호, 전자파에 참외가 튀겨진다던 사드 괴담, 방사능 소금 사재기를 부추겼던 후쿠시마, 그리고 이태원의 참사까지.
그 숱한 선동의 굿판들 속에서, 단 하나라도 완벽한 과학적 증거와 팩트를 가지고 시작된 시위가 있었는가. 없었다. 그들은 1%의 불안을 100%의 공포로 부풀려 광장을 점령하고, 타인의 슬픔을 탈취해 정권 퇴진의 흉기로 삼았다.
그래놓고도 그들은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뻔뻔한 정치적 이용을 ‘시민사회와의 숭고한 연대’라며 거룩하게 미학화했다.
그런데 왜 보수 우파는, 헌법 기관이 대낮에 주권자의 투표용지를 증발시키고 개표 직전 선관위 뒤뜰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이 명백하고도 기괴한 팩트 앞에서도,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고 눈치를 보아야 한단 말인가.
내 권리가 도둑맞은 것 같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구심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들은 즉각 '극우'라는 주홍글씨를 찍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프레임이 두려워 스스로 마스크를 쓰고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린다. 남이 남의 비극에 숟가락을 얹어 나라를 흔드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의 행동'이고, 내가 내 짓밟힌 주권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극우의 정치색'이 되어버리는 이 지독하고 구역질 나는 이중잣대.
내가 진정으로 분노하고 서글픈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지금 보수 우파에게 부정이냐 부실이냐의 논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진짜로 분노해야 할 본질은, 내가 품은 당연한 의구심을 자유롭게 내뱉을 그 소박한 권리마저 저들이 휘두르는 ‘극우’라는 폭력적인 딱지 앞에 처참하게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유를 수호한다는 우파이면서도, 정작 내 생각과 의심을 표현할 자유를 저들의 검열 기준에 완벽하게 외주 주어 버렸다. 저열한 선동꾼들은 광장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마이크를 쥐고, 상식을 지키려는 자들은 뒷골목에서 마스크를 쓴 채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이 전도된 세상.
이제 그 알량한 마스크를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 완벽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점잖게 중립을 지키겠다는 지적 허영도, 극우로 몰릴까 두려워 뒷걸음질 치는 그 서글픈 눈치 보기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라.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져 내릴 때, 주권자가 의심의 돌멩이를 던지는 것은 정치색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숭고하고 처절한 본능이다. 당신의 정당한 분노를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도둑맞은 투표용지 이전에, 숨통을 옥죄는 저들의 프레임을 비웃으며 내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 '잃어버린 야성(野性)' 그 자체다.
자고 일어나면 불어나는 게 불법 사채 이자만 있는 줄 알았더니, 기어이 선관위가 그 상식을 깼다. 투표용지가 모자라 셔터를 내린 투표소가 하룻밤 새 140곳으로 자가증식했다.
물 닿은 그렘린이나 배양 접시 위 대장균도 이토록 맹렬하게 분열하진 않겠다. 국민 세금 수천억을 쥐여주고 투표용지를 찍어내라고 했더니, 정작 용지 대신 ‘투표 빵꾸난 투표소’를 윤전기로 펑펑 찍어내고 자빠진 이 경이로운 마술.
표를 세라고 앉혀 놨더니 매일 아침 자신들이 사고 친 투표소 개수나 경신하며 세고 있는 꼴을 보라. 이쯤 되면 단순한 무능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갉아먹으며 끝없이 자가증식하는 미지의 바이러스 수준이다. 변명할 때마다 숫자가 불어나는 저 끔찍한 화수분 앞에서, 분노를 넘어 인류 행정사에 영구 박제될 위대한 코미디를 직관하는 기분이다.
올림픽공원에 모인 청년, 시민들은 선관위 컴퓨터가 해킹당했다거나 투표지를 바꿔치기했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을 얘기하는 게 아님. 내가 내 발로 투표소에 갔는데, 국가 기관이 용지가 없다고 나를 쫓아냈다는 눈앞의 명백한 팩트와 인재에 대해 국가의 책임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