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대안은 사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방침을 바꾸는거임. 사실 유죄율은 극히 낮기 때문에(2%) 법원의 판결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닌데, 그걸 재판까지 끌고 가는 경찰과 검찰새끼들이 문제임. 지금은 교육감 의견서가 나와도 닥치고 기소하는 문제가 있음. 결국 사법개혁이...
<보통 일베들의 시대>이후의 일베에 대하여,
탱크데이 이래 많이들 물어보시지만 어디 나가서 할 정도의 말도 아니고 하니 대략 생각을 풀어봤습니다. 심심풀이로 읽어보시면 리마인드쯤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룩소가 있었으면 거기다 썼을텐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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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덜렁에 마법을 거는 느낌임. 그것을 피할 도피처가 필요하고 고추 덜렁에 당할까봐 늘 전전긍긍해야 하고. 물론 난 모든 원인은 남성들의 성폭력 범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고추 덜렁에 대한 두려움을 위해 성벽을 쌓는 게 적절한지는 좀... 그게 막 가까이만 있어도 여성이 힘을 잃나??
다른 성별과 공유하는 공간을 어디까지 설정해두느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느꼈음. 우리나라에서 성중립 화장실의 장애물이 큰것도 이런 문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란 생각이 잠깐 들었음. 단순히 터프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한 지점이 있는거지
탐구 중심·개념 기반 교육, 꼭 IB여야만 하는가?
해외 인증 체계의 양적 확대보다 우리 교육과정의 안착과 교사 지원이 먼저다
매년 스위스 민간기구에 연회비 학교당 1천5백만 원을 내야 한다. 지금까지 들어간 세금이 618억 원에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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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을 '게임화'한 교육계의 중대 실책
보조 도구라는 제자리로 돌려놔야
(아래 원문 발췌)
예전엔 학교에서 ‘재미’가 지적 흥미를 뜻하는 교육적으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다 화면이 수업 시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학교를 ‘재미’있게 만들고 온라인 게임 시장의 성장에 발맞춰 학습 개인화 요구에 부응했다.
하지만 이는 지난 10년 동안 초중등 교육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모든 아이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제공하고, 표준화 시험 준비부터 쉬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게임화하기로 한 결정 말이다. 학습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거대 기술 기업들의 선전과 결합돼 학교의 존재 목적을 왜곡해 버렸다. 기술은 교육의 근원이나 정점이 아니라 보조 도구로서, 교실 내에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초중고 교실에 더 많은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는 코로나가 학교를 화면 속으로 밀어넣기 전부터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였다. 성인들이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최신 개인용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교실에서도 분명 학습 효율을 높이고 학생들을 현대적인 직장에 대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아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생각도 있었다. 화면 속에서 자라난 만큼 그들 뇌는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교사들은 짧은 집중력을 고려하고 책을 멀티미디어 수업으로 대체함으로써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 가르쳐야 한다. 수학과 언어 과제가 비디오 게임과 비슷해질수록 학생들은 더 많이 배울 것이다.
이 주장의 모든 단계가 틀렸다. 연구 결과, 전 세계 부국들의 시험 점수 하락과 교내 기기 도입 확대 간 상관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13세 학생들의 수학과 읽기 점수는 2012년에 정점을 찍은 후 하락해 왔다.
직장과 교실의 동일시는 청소년은 성인과 다르게 배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청소년은 훨씬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하며 다양한 감각 활동을 경험해야 한다. 저학년에서는 모래와 블록 놀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 경우 역사는 고등학교 시절 ‘중세 시대’ 축제에서 직접 만든 의상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왔다. 특히 차에 적셔 오븐에서 갈색으로 구워내며 연대표 과제를 ‘진짜 중세풍’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기억에 남는 감각적 활동이 그랬다.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개념은 신화일 뿐이다. 아이폰과 노트북의 등장이 수천 년에 걸친 뇌의 진화를 불과 몇 년 만에 뒤집지는 못했다. 비록 과도한 화면 시청 시간이 대뇌 피질의 얇아짐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뇌의 가소성 덕분에 이런 손상은 회복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선호도를 깊은 생물학적 현실로 오해하고 있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만 그 취향에 맞춰 매 끼니를 아이스크림으로 시작할 순 없다. 아이스크림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나 채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신간 <디지털 망상>은 학교를 뒤덮은 수많은 디지털 기기와 소프트웨어, 이른바 에듀테크의 과용이 학습에 미치는 해악을 입증하는 방대한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이 화면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이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집중력도 함께 줄어든다. 강의 시간에 노트북을 사용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시간당 평균 38분을 수업과 무관한 일에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글 시대라 해도 구식 암기법은 여전히 중요하다. 클라우드가 아닌 우리 뇌에 저장된 지식이야말로 창의적 사고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가장 교묘한 교육 기술 침투의 측면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평가하며, 즐겁게 하기 위해 비디오 게임 스타일의 앱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앱들은 학생들이 점수, 배지, 그리고 기타 디지털 도파민 자극에 집착하도록 부추기는 광범위한 ‘게임화’ 풍조를 조장하고, 진정한 학습이 요구하는 실험, 좌절, 분투를 기피하게 만든다.
문제는 게임 그 자체가 아니다. 훌륭한 교사들은 게임을 활용해 학생들의 동기를 부여하고 친구들과 유대감을 형성해 왔다. 하지만 지난 15년여 동안 활기 넘치던 아날로그 게임의 소란은 조용한 교실로 대체되었고, 학생들은 헤드폰을 끼고 화면 속 활동을 스와이프하고 스크롤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컴퓨터 게임의 설득력 있는 디자인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없이 오직 화면만 보며 계속 사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클릭만 할 뿐,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읽지도 않는다. ‘무슨 질문인지 대충 알겠으니,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클릭할게’라는 식이다.
온라인 게임의 과용 그리고 일반적으로 화면 기반 기술의 사용은 ADHD와 자폐증 학생들에게 특히 해로울 수 있다. 읽기, 쓰기, 다감각적 참여 같은 필요한 기술을 기르는 대신, 좁은 범위의 패턴 인식만 익히게 된다. 또 학생들은 어려운 사회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트북을 사용한다. 아이들은 수업마다 기기들을 들고 다니는데 대인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그냥 컴퓨터를 꺼내서 비디오 게임을 하곤 한다.
어떤 종류의 학습이든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고 모호함을 헤쳐 나가며 실패에 대처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너무 잦은 온라인 게임은 마찰 없는 가짜 몰입감을 주고 좁은 범위의 기술만을 키우며 모든 질문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가정을 조장한다. 기술을 적용하는 맥락이 다양할수록 기술의 폭은 넓어지지만 컴퓨터는 지독하게 좁다. 학생들은 게임에 능숙해지고 점수는 올라가겠지만 화면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기술의 대부분은 사라진다.
수업을 게임화하면 학습 효과를 높이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제품에 더 오래 몰입하도록 주의를 끄는 것일 뿐이다. 아동 발달과 상충된다. 아이들은 화면 앞에서 몇 시간씩 보내서는 안 된다.
반기술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기술을 의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아이들도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워야 하지만 6살에게 아이패드를 주어 읽기를 배우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해결책은 신중한 절제다.
학교는 학생들이 노트북과 태블릿을 자신의 신체 일부처럼 여기도록 부추긴 1대1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 디지털 게임은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단, 도파민 분비를 기대하며 홀로 화면을 스크롤하는 것보다 협업, 창의성, 그리고 도전 정신을 강조할 때에 한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교사, 행정가, 가족들이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대학 및 직업 준비가 뭘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존 합의가 무너져 가던 시기에 학교들이 교육 기술에 빠르고도 심하게 매료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십 년간 미국 역사와 과학 교과 과정을 둘러싼 문화 전쟁 논쟁이 공립학교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많은 연구자들은 공통 핵심 국가 교육 과정 기준을 실패작이라고 평가해 왔다. 이제는 엘리트 사립학교들조차 자기 목적을 정의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서구 정전을 대체할 개인적 취향과 정체성 범주들의 뒤죽박죽이 뭘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학력 부모들조차 학교의 더 깊은 목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자녀를 원하는 대학에 어떻게 보내야 할지만 생각할 뿐. 그 결과 모두가 여전히 한 가지 점엔 동의한다. 혁신이 많을수록 좋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방향을 잡아줄 닻이 없는 상황에서 기술이 그 공백을 메워주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중립적인 기술은 없다. 교육의 모사품을 제공하는 앱과 게임들은 학생들이 특정 세계관, 즉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을 흡수하도록 부추긴다. 결국 학생들은 학습이라는 게 체크리스트를 채우고, 패턴을 인식하며, 개별 과제를 완수하고 ‘레벨 업’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해 개방형 논술 문제나 그 밖의 모호한 상황들에 직면했을 때, 즉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이 모든 것의 의미를 파악하려 할 때 그들은 당황한다. 교수가 소설 한 권을 통째로 읽으라고 요구하면 그 과제는 감당하기 힘들게 느껴진다.
그들은 게임화된 시스템을 숙달함으로써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것은 세상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다. 에머슨은 저서 <자립>에서 진정한 교육이란 성취를 위한 알고리즘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적었다: “광활한 우주는 선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영양가 있는 옥수수 알갱이 하나도 자신의 수고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진지한 지적 작업과 도덕적 추론은 게임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