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모스크바, 한 상인이 쓴 예루살렘 순례기는 200년 넘게 성경에 못지않은 인기를 끌며 필사되고 인쇄됐다. 이 순례기에서 가장 생생한 대목은 시나이산을 묘사한 부분이었는데, 반전은 이 사람이 실제로 시나이산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 이 상인의 이름은 트리폰 코로베이니코프다.
이 책세어 시나이산을 묘사한 부분은 한 세대 앞선 다른 여행자 바실리 포즈냐코프의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트리폰은 황제의 명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사절로 다녀온 사람이었지만, 시나이에 가본 적은 없었다.
그가 처음 성지로 향한 사연도 예사롭지 않다. 당시 황제였던 이반 뇌제가 제 손으로 죽였다고 전해지는 아들을 추모하는 자선금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을 잃은 황제의 속죄금이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그 여정에 따라간 서기였던 코로베이니코프의 책이 성지 순례 가이드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가 거의 손에 넣었던 천하를 두고 부하들이 갈라졌다. 이듬해 시즈가타케 전투가 그 쟁탈전의 분수령이었다. 한쪽은 장차 일본을 통일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른 쪽은 노부나가의 수석 가신 시바타 카츠이에. 그리고 승부를 가른 것은 카츠이에 편에 붙었던 한 장수의 돌연한 이탈이었다.
1583년 4월, 전투 한복판에서 마에다 도시이에가 자기 부대를 이끌고 전선을 떠났다. 카츠이에 진영은 이 이탈을 도화선으로 무너졌고, 카츠이에는 사흘 뒤 자결했다. 이렇게 천하는 히데요시에게 넘어갔다. 이 장면을 보고 흔히들 도시이에가 히데요시와 내통해 상관을 배신했다고 이야기한다.
내통설의 근거는 히데요시와 도시이에의 긴 인연, 그리고 전투 후에 도시이에가 받게 된 보상이다. 히데요시는 도시이에가 노부나가에게 추방돼 힘들던 시절 곁을 지킨 30년 친구였고, 카츠이에는 위계 상의 상관일 뿐이었다. 배신의 대가일까? 전후 도시이에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다른 장수들보다 더 후한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반박하는 정황도 만만치 않다. 전장에서 이탈한 도시이에가 자기 거성으로 돌아갔을 때, 지나가던 히데요시군과 철포전이 벌어져 가신이 전사했다. 애초에 배신하기로 히데요시와 짜놓은 판이었다면 자기 성 앞에서 싸우다 부하를 잃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동시대 1차 사료 어디에도 사전에 도시이에와 히데요시 측이 배신하기로 연락했다는 흔적은 없다. 배신이라기 보다는 이미 전황이 기운 상황에서 본인의 부대를 보전하기 위한 후퇴, 즉 현실적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도시이에의 진심은 끝내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내통했는지, 아니면 전황을 보고 빠져나온 것인지.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보시는지.
한 해적 제독이 자기 손으로 왕을 세웠다. 그런데 그 왕조는 아홉 달도 가지 못했다.
바르바로스 형제의 부관에서 시작해 알제 총독까지 오른 오스만 제독 살리흐 레이스. 그의 전성기 임무는 뜻밖에도 바다가 아니라 모로코 내륙의 육상 정치였다. 1554년 1월, 그는 알제에서 군대를 몰아 옛 수도 페즈를 함락하고, 쫓겨난 와타스 왕조의 후예 아부 하순을 오스만의 속국 군주로 왕좌에 앉혔다. 사아디 왕조에 맞서 오스만의 영향력을 모로코 심장부까지 침투시킨 이 책략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야심 찬 한 수였다.
그러나 오스만 병력이 빠지자 이내 국방에 구멍이 생겼고, 새 왕은 아홉 달 만에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러자 페즈는 다시 적의 손으로 넘어갔다. 만회를 노렸을 살리흐 자신도 다음 원정이 출항하기 전에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보면 살리흐 레이스는 결정적인 한 발이 늘 아쉬운 인물이다.
스페인 공주로 태어난 한 여인이 프랑스로 시집가 왕비가 되어, 친정 스페인과의 전쟁을 지휘했다. 안 도트리슈다.
1615년, 열네 살의 그는 두 왕가가 공주를 맞바꾸는 이중 결혼으로 프랑스에 넘겨졌다. 오랜 적대 관계를 끊기 위해 양국이 택한 거래였다. 그러나 1635년 두 나라가 다시 전쟁을 시작하고, 안 도트리슈는 적국이 된 친정과 은밀히 편지를 주고받다 1637년 들통난다. 편지의 상대는 친정 남동생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였다. 별다른 국가기밀을 주고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권위는 떨어졌고,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남편 루이 13세가 사망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안은 어린 아들 루이 14세의 섭정이 됐고, 이번에는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로서 친정과의 전쟁을 끝까지 끌고 갔다. 전쟁은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마침내 끝이 났다.
다음 해 두 왕실이 꿩섬에서 만나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의 혼인을 매듭지을 때, 안은 45년 전 프랑스로 오며 작별했던 그 남동생 펠리페와 다시 마주 앉았다. 한쪽은 스페인 왕, 한쪽은 프랑스의 섭정의 신분이었다.
말라카로 원정을 떠난 아체 함대가 두용 강에 갇혀 전멸했을 때, 그 함대의 기함은 아체가 가장 아끼던 전함이었다. 이 전함의 이름은 차크라 도냐, 세계의 축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배와 맞선 포르투갈 군인들은 세계의 축이 아니라 세계의 공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길이 100미터에 대포 100문을 장착한 무시무시한 전함이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후대의 과장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배가 포르투갈 함대에 상당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치열한 전투 속에서 기함 차크라 도냐는 집중포화를 받아 불길에 휩싸였고, 결국 포르투갈에 노획됐다. 포르투갈은 이 배를 수리한 뒤 말라카와 고아에서 전리품으로 전시했다.
이렇게 아체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시도한 말라카 원정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629년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아체의 팽창은 끝이 났다.
오스만 제국이 전해준 청동 대포 기술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아체. 이제 숙원을 풀기 위해 큰 도박에 나선다. 1629년, 한 세기를 다툰 숙적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무너뜨리고, 그 해협을 넘어 인도양 무역의 길목을 쥐기 위해 아체는 모든 것을 걸었다. 학계는 이 원정 함대를 함선 약 236척에 병력 약 1만 9천 명으로 보고, 아체 쪽 사료는 그 규모를 그보다 많은 500척, 6만 명으로 기록한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당시 아체의 국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원정이었다.
총력을 기울였지만 전세는 아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해군력에서는 아체가 우위를 점했으나, 사령관이 포르투갈 함대를 무너뜨리기보다 육상 공격에 매달린 탓이었다. 누군가 지키는 요새를 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전황이 지지부진한 사이 전염병이 돌고 탈영병까지 생겨 아체 병력은 줄어만 갔다. 그러던 차에 말레이 반도의 토착 세력 조호르까지 포르투갈과 손을 잡았다. 아체가 말레이 반도로 세력을 넓혀 오는 것이 조호르에게도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조호르 함대가 뒤에서 퇴로를 끊어 아체 함대를 두용 강 안으로 밀어넣자, 포르투갈군은 강 어귀에 배 한 척을 일부러 침몰시켜 입구를 봉쇄했다.
결국 수백 척의 아체 함대는 두용 강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통발에 갇힌 물고기 신세가 됐다. 그 뒤 전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상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포르투갈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아체로 살아 돌아간 배도 사람도 없었다.
아체가 오스만에 청한 대함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오스만으로부터 받은 건 장인 몇 명과 대형 청동포 주조법뿐이었다. 그런데 이 기술 하나가, 한 세대 만에 수마트라 북단의 작은 술탄국 아체를 군사 강국으로 탈바꿈시킨다.
사실 아체에는 오래전부터 종과 각종 청동기를 빚어온 주조 전통이 있었고, 배에 싣는 작은 선회포 정도는 이미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초적인 주조 기술과 무기화 능력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스만이 전수해 준 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무너뜨린 바로 그런 대형 청동포를 주조하는 고급 기술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에 오스만의 지식이 더해져 아체의 무기고는 빠르게 채워졌다. 17세기 초 아체는 청동 대포 1,000문 이상에 수백 문의 선회포와 화승총까지 갖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기술은 한 세대로 끝나지 않았다. 1874년 네덜란드가 아체를 점령하고 노획한 대포 중에도 오스만식 청동포와 아체가 자체 제작한 화포가 섞여 있었다. 1560년대의 주조법이 그렇게 300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발전했던 것이다.
1566년, 수마트라섬의 아체가 8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스만에 보낸 원군 요청. 과연 받아들여졌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받아들여졌고, 오스만이 함대 22척을 보냈다는 얘기도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아체에 도착한 건 22척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오스만이 저 먼 곳까지 군사 지원을 보낸 이유는 단순하다. 아체와 오스만 모두 포르투갈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하고 향신료 무역을 틀어쥐자 기존의 무역로에 의지하던 지중해의 오스만과 인도양의 아체가 모두 곤란해진 것이다.
1567년 오스만의 셀림 2세는 완전 무장한 갈레선 15척에 공성포 30문, 대포 주조 장인까지 딸린 함대를 보내라 명했다. 명령서에는 모든 오스만 병사가 계급을 막론하고 아체 술탄의 명령에 따르라는 조항까지 있었다. 그런데 같은 해 예멘에서 반란이 터졌다. 원정의 전진 기지가 될 예멘이 무너지자 함대는 전부 반란 진압에 투입됐다.
아체에 도착한 것은 무역 임무를 겸해 따로 떨어져 있던 배 두 척뿐이었다. 기대했던 대함대 대신 받은 것은 소수의 기술자와 대포, 그리고 대포 만드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 대포 만드는 법이 의외로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데 이건 내일 글에서.
1566년, 수마트라 북단의 술탄국 아체가 8천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냈다. 우리를 당신들의 변방 속주로 받아달라는 청이었다. 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터키까지, 어떤 급박한 사연이 있었을까?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하고 인도양 향신료를 틀어쥐자 무역로가 막힌 아체는 그에 맞설 배와 대포가 절실했다. 그래서 이슬람 최강국 오스만에 손을 내민 것이다. 술탄 알라우딘 알카하르는 오스만 술탄을 이슬람의 칼리프로 떠받들며, 자신을 이집트나 예멘 총독과 같은 급의 지방 통치자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다만 여기에는 아체 술탄의 계산이 있었다. 오스만은 먼 거리 탓에 아체를 실제로 다스릴 수 없었다. 칼리프의 권위와 군사 지원은 빌려오되, 현지 통치는 계속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오스만은 아체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을까? 정말 대포와 배를 보내줬을까? 그 이야기는 오늘 저녁 6시, 다음 글에서.
1564년 6월, 수마트라 북단의 항구 아체를 떠난 배 스무 척이 홍해의 제다 항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후추만 80톤이 넘었고, 다른 향신료까지 한가득 실려 있었다. 이 배들은 포르투갈 거점을 단 한 곳도 거치지 않고 인도양을 건너왔다.
반세기 전 포르투갈은 동남아 무역의 길목 말라카를 점령하고, 항로를 틀어쥐어 인도양 향신료를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말라카에서 쫓겨난 무슬림 상인들은 포르투갈 함대를 피해 수마트라에서 곧장 홍해로 향하는 우회로를 열었다. 그 집결지가 아체였다. 자바와 말레이 반도의 후추, 멀리 말루쿠의 정향과 육두구가 이곳에 모였다가 인도양을 건넜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잠갔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바다를 아체의 배들이 버젓이 건너다니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