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이 말하는 '글 잘쓰는 법'
영화나 드라마 보다 보면 명백한 악당인데도 이상하게 그 심리가 납득될 때가 있습니다. <왓치맨> 만든 앨런 무어가 한 강연을 보니까 이게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기술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핵심은 시점인데, 겉으로는 "그녀가 걸었다"처럼 평범한 3인칭으로 쓰면서 그 안에 인물의 거친 생각이나 욕설 같은 밑바닥 언어를 그대로 섞어버리는 방식입니다.
"영희는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건너편 가로등 아래 짭새 두 마리가 위아래로 꼴아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또 시작이네."
이렇게 쓰면 독자는 그 인간의 내면 밑바닥을 강제로 같이 훔쳐보게 됩니다. 마음으로 편을 들어주는 '공감'이 아니라, "이 새끼가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머리로 납득해 버리는 '이해'의 영역으로 끌려가는 거죠.
여기에 공포와 웃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톤 조절이나, 안전거리를 깨부수는 현재 시제 같은 장치들이 얹어지고요.
결국 몰입감이라는 건 단순히 스토리가 재밌어서라기보다, 독자의 시선을 어디에 세워둘지까지 고민해야하는 거죠..
크로키가 아니라 만화를 그려야 만력이 늘어<<아는데 못하겠는 분들...은 너무 장편의 기획(ex상업만화)을 생각해서 그런걸수도있음
그냥 본인 일상을 그려보세요
아니면 2차창작이나..<<(이게젤좋은듯, 편하고 재밋고.. 아무튼 나는 재밋엇다)
일단 차근차근 시작하는게 제일 중요합니다..~^^
모두 화이팅🥹🌷
아이디어를 원고로 옮기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만 있을 때는 누구나 생각한다.
‘이거 그리기만 하면 엄청 재밌을 텐데!‘
‘분명 반응이 좋을 텐데!‘
그런데 막상 그려보면 ‘어? 이게 아닌데?’ 싶어진다. 그때부터 머릿속의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한 진짜 작업이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자기 작품을 실제로 많이 그려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감이 넘치는 경우가 있다.
머릿속의 아이디어와 실제 원고 사이의 간극은 생각만으로 좁힐 수 없다.
‘이게 아닌데’를 ‘이거다!’로 바꾸는 건 결국 수없는 반복이다.
생각만 하지 말고, 자기 작품의 원고를 많이 그리자.
그림으로 먹고살고 싶다면, 기초를 익힌 다음에는 ‘내 그림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감동, 웃음, 벅참, 존경, 배움 등 그림을 통해 감상자에게 어떤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시장 가치를 갖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관심을 끌어내는 가장 가까운 표현은 ‘놀라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보고 감동하거나 웃거나,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는가. 기초적인 묘사력을 갖추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그림으로 감상자에게 어떤 놀라움을 선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비로소 ‘작가’에 가까워집니다.
티베트 속담과 의학서에는 “몸의 ‘라(생명력)’가 새어 나가면 집안의 ‘양(재물운)’도 함께 흩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자네), 사기, 구설수, 혹은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인한 큰 손실(트레이딩에서의 틸트와 대형 손절·청산 등)은 모두 에너지장에 구멍이 뚫려 복록이 새어 나가는 현상입니다.
티베트인들의 전통적인 경제·영적 관념에서는 재물이 모이는 에너지를 ‘양(gYang, 행운과 번영의 자기장)’이라고 부르며, 이는 인체의 생명 보호막인 ‘라(Bla)’와 한 몸처럼 움직인다고 봅니다.
티베트 전통 우주론과 밀교(탄트라) 경제학에서 ‘양(gYang, གཡང་)’은 단순히 은행 계좌에 찍힌 숫자나 화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양은 ‘재물과 행운, 기회가 저절로 모여들고 머물게 만드는 고밀도의 자기장(Magnetic Field of Prosperity)’이자, 물질에 깃든 ‘풍요의 생기(Essence of Wealth)’입니다.
티베트 무속(뵌교)과 밀교에서 ‘양(gYang)’은 매우 예민하고 유동적인 에너지로 묘사됩니다. 마치 수증기나 맑은 이슬처럼 ‘그릇(용기)이 온전하고 밀폐되어 있을 때만’ 고여 있습니다.
‘양구르(gYang-'gugs, 초복의례·招福儀禮)’는 문자 그대로 ‘흩어진 양(복록)을 갈고리로 걸어 당겨와 단단히 가둔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나 가문에서는 두 가지 상징 도구와 하나의 호흡·신체 용기를 결합하여 이 에너지를 포획합니다.
일상과 매매 현장에서 이를 즉각 구현하는 신체 동작이 바로 ‘엄지로 약지 뿌리(세 번째 마디)를 누르고 네 손가락으로 감싸 쥐는 금강권’입니다.
들숨으로 시장의 기회와 청정한 판단력을 아랫배(보배병)로 끌어당긴 뒤, 금강권을 쥐어 약지의 문을 닫는 것 자체가 내 안의 ‘라(생명력)’와 ‘양(자산·복록)’을 동시에 가두는 초소형 양구르 의례가 됩니다.
이렇게 수인을 맺고 페마 샤와리 여신의 가피를 청합니다.
페마 샤와리의 네 가지 화현 빛깔 중 ‘찬란한 황금색(Yellow/Golden)’으로 나타나는 형태는 티베트 밀교의 네 가지 성취법(식재·증익·경애·조복) 중 ‘증익(Gye-pa, 增長 — 수명, 복덕, 재물, 에너지를 불리고 확장함)’을 전담합니다.
페마 샤와리와 바즈라 갑옷 진언(옴 페마 샤와리 펫!)의 일차적인 재물 가피는 ‘예기치 못한 재산의 유실과 파산을 막아주는 완벽한 방어벽(Hedging)’에 있습니다. 번 돈을 지키는 것이 곧 돈을 버는 것이라는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무리 잠발라의 가피로 큰 수익(유동성)이 들어와도, 수련자 자신의 신경계(백맥)가 불안정하고 ‘라(생명 보호막)’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한 번의 급격한 시장 변동성(라훌라의 출현) 앞에서 흥분하거나 공포에 질려 그동안 모은 ‘양(복록)’을 단숨에 시장에 반납하게 됩니다.
티베트의 스승들은 노란 잠발라나 다문천왕의 재물 수련을 하기 전에 반드시 ‘바즈라 갑옷(페마 샤와리)’이나 보호 결계를 먼저 완성할 것을 강조합니다.
You can be right and still be ruled by your ego.
In Sufism, the struggle with the nafs is the struggle against the part of yourself that craves approval, resents criticism and needs the last word.
Imagine someone insulting you in public. You know exactly how to expose their mistakes. Before responding, ask yourself why you want to. Are you correcting a lie, defending someone or trying to humiliate the person who embarrassed you? Even the truth can become a weapon when pride dictates how you use it.
Sufi teachings place great importance on intention. This does not mean staying silent in the face of injustice. Sometimes, speaking up is necessary. The challenge is knowing when your words serve a purpose and when you simply cannot bear to lose an argument.
We often explain ourselves repeatedly because we want to control how others see us. But you can be honest about your intentions and still be misunderstood. You cannot force someone to see you fairly.
Silence alone does not mean you have overcome your ego. You can say nothing while mentally rehearsing the argument you could have won. The conversation ends, but your need to prove yourself remains.
The real work is letting go of that need. If nobody knew you were right, would you still need to prov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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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in Dervish and the Sufi” (1595), Basawan. Source: Wikimedia Commons. Version checked: 9 March 2012. License checked: 14 October 2026 - Public Domain (PD-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