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몰랐다. 2030 여성의 지지 철회 이유를. 이들은 젊은 여성 고위공직자가 없어서 돌아선 게 아니다.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고 사회대개혁을 외쳤으나 ‘광장 이후’ 권리 주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직설이란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싶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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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악랄했던 고등 경찰, 고문기술자
▰ 친일의 얼굴들 ⑦ │ 하판락
[친일인명사전수록]
[국가 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일제강점기 가장 잔인한 일본 순사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인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았습니다.
피를 계속 뽑아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몸을 지지고, 전기를 흘려보내고, 물을 들이붓고, 사람을 매달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고문귀’라고 불렀습니다.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은 하판락입니다.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대 중반 일제 경찰에 들어갔습니다.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외사계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와 사상범,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을
색출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잡으라고 명령하면
그는 누구보다 충실하게 움직였습니다.
같은 조선인을 체포하고 고문한 대가로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했습니다.
일본 이름도 사용했습니다.
가와모토 한라쿠, 다시 가와모토 마사오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가 가장 악명을 떨친 것은
독립운동가들을 취조할 때였습니다.
1949년에 발간된 반민특위 관련 기록인
'반민자죄상기' 에는 하판락의 고문 방법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혈관에 주사기를 꽂아 피를 뽑아 정신을 잃게 하는 착혈고문.
몸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
입과 코에 물을 들이붓는 물고문.
두 팔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다는 비행기고문.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고문을 반복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하판락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도 검거해
고문했습니다.
일본 천황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죄였습니다.
1943년에는 항일 비밀결사 친우회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친우회는 부산과 울산 일대에서 항일전단을 배포하며 독립 의식을 일깨웠던 조직입니다.
이광우는 당시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하판락은 이광우와 동료들을 체포해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지지고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입니다.
고문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여경수가 순국했습니다.
이광우는 단기 1년, 장기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원한 청년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 청년을 고문한 조선인 경찰은 승진했습니다.
하판락의 이름은 경남 지역에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반민특위 기록은
그가 체포돼 부산에서 서울로 압송될 때
수많은 부산 시민이 부두로 몰려왔다고 전합니다.
시민들은 하판락을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에게 가족과 동료를 잃은 사람들의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1945년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고문귀 하판락은 감옥에 갔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미군정 아래에서 다시 경찰이 됐습니다.
경남 경찰의 수사과 차석으로 근무했습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일제 경찰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수사를 담당한 것입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하판락을 체포했습니다.
그를 고발한 사람은 고문으로 아들을 잃은 여경수의 어머니였습니다.
하판락은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반민특위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 증인들을 조사했습니다.
대질심문을 앞두고 하판락의 아버지가 피해자 이광우를 찾아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들이 하판락을 모른다고만 말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광우는 거절했습니다.
독립운동가는 고문을 견뎠고, 해방 후에는 증언을 회유하려는 시도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하판락은 재판에서 자신의 고문과 독립운동가 사망에 관한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던 1949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반민특위의 특별경찰대를 체포하고 무장해제하면서 친일청산 작업은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하판락은 네 차례 공판을 받은 뒤
같은 해 8월 병보석으로 석방됐습니다.
독립운동가는 불에 달군 쇠젓가락과 전기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고문 경찰은 병보석으로 감옥을 나왔습니다.
그에 대한 재판은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하판락은 1956년 고향에서 경남도의원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했습니다.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그의 삶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부산에서 목재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며 사업가로 살았습니다.
상호신용금고를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피를 뽑던 고문 경찰이 해방 후에는 금융업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 1월, 여든여덟 살이 된 하판락은 언론 인터뷰에서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
하지만 그 사과는 고문 피해자들이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뒤에야 나왔습니다.
그는 2003년 91세로 사망했습니다.
감옥도, 사형장도 아닌 자신의 삶을 모두 누린 뒤였습니다.
국가 진상규명위원회가 하판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결정한 것은 2009년이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지 6년 뒤였습니다.
하판락의 삶은 친일청산 실패가 무엇인지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독립운동가는 고문으로 죽거나 감옥에 갔습니다.
그들을 고문한 경찰은 해방 후에도 경찰이 됐고,
사업가가 됐으며, 91세까지 살았습니다.
나라를 되찾았지만 처벌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본 순사의 제복은 벗었지만, 그 손에 채워야 할 수갑은 끝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판락입니다.
일제강점기 가장 잔인했던 순사 가운데 한 명.
그리고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판락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료 확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권 18편 하판락 결정이유서
친일인명사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자죄상기》 하판락 편
국사편찬위원회 반민특위 조사 및 재판기록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공훈록 이광우 항목
대한매일 2000년 1월 17일 하판락 인터뷰
자료 정리해서 글 쓰다 보니 피꺼솟이네요.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