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4월의 한국통감부문서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문서에서 한국과의 장래 관계에 '합병'을 포함할 것을 이미 권고했으며, 외무성 정무국장을 역임한 구라치 데쓰기치(倉知鉄吉)의 회고록 《한국병합의 경위(韓國倂合ノ經緯)》에 따르면 1909년 4월에 한국 병합에 찬성하는 뜻을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桂太郞)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 (小村壽太郎)에게 전달함.
회고록에 따르면 가쓰라와 고무라는 이토가 반대할 것을 예상했지만 이토의 찬성에 놀랐다는 소감을 남겼음. 가쓰라 내각은 7월에 한국 병합 각의를 의결, 이토 역시 8월에 찬성을 재확인함.
이토가 10월에 저격당해 사망했지만 애초에 이토가 하얼빈에 갔던 것 자체가 합병 과정에서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의견 조율을 위한 목적이었으며, 이토의 사망이 합병을 가속했다는 근거는 찾기 어려움. 이미 합병 절차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 또한 이토 저격 사건 아후 가쓰라 총리는 주일영국대사 클로드 맥도날드 (Claude MacDonald)에게 이토 저격 사건이 일본의 한국 정책에 변화를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였으며, 맥도날드 대사 역시 이를 신뢰하면서 이토가 합병 절차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고는 판단해도 합병 자체를 막고 있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음.
일본의 한국 합병을 막고 있던 유일한 것은 열강의 반대에 대한 우려였음. 일본은 1895년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했던 바 있기에 이를 15년 만에 뒤집는 것에 서양 열강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할 수 없었고, 실제로 이 당시 영국의 동아시아 외교관들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장차 일본이 "극동의 독일"이 되어 영국의 이권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음. 당시 일본은 개항 직후 서양 열강들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들을 청산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서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 내각은 1909년 7월에 합병을 결의해 놓고도 1910년 2월까지 한국 정책에 대한 새로운 각의를 의결하지 못했음. 하지만 이때쯤 일본은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 미국의 만주 진출을 저지했고, 외교적 자신감을 얻어 2월에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内正毅)를 임명해 본격적인 합병 절차에 돌입함. 이때가 돼서야 즉각 합병을 주장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계열 육군 파벌이 한국 정책에 대한 확실한 주도권을 잡았으며, 4월에 러시아가, 5월에 영국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승인하며 최종적으로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게 됨.
당시 한국 정책에 대해 일본 정부를 "합병파"와 "자치파"로 나누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면서 사실관계에서 벗어난 틀린 분석임. 이들은 확고하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과정과 속도에 대한 의견 충돌은 있었을지언정 한국 식민지화라는 최종 목적지를 공유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