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죄, 그리고 항소포기로 범죄에 ‘도게자(土下座) 박는’ 검찰>
이화영 국민참여재판 중, 이재명 선거캠프에서 수천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 후원을 받은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쪼개기 정치자금 후원‘ 혐의는, 배심원단 무죄 평결 및 무죄 선고가 되었습니다. 검찰은 항소포기하여 무죄로 확정되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해 무죄 평결과 무죄 선고가 있었는데, 검찰은 항소포기했습니다. 고등법원 판사의 판단을 받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 내지 거부한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항소했어야 할 사안에 대해 항소를 포기한 것으로, 정치자금법위반 재판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극히 이례적인 조치입니다.
심지어 재판부도 “유죄의 의심이 가나 배심원의 의견을 존중한다”라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으니 법리상 문제점은 말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이 스스로 기소가 잘못되었음을 자인하고는 항소포기 했습니다. 요즘 속어로 ’도게자(土下座)를 박은 것‘ 입니다. 수천만원 불법 정치자금도 특정 선거캠프가 받은 것은 면죄부입니다. 이 사건이 무죄면 이 범죄 조항 자체를 비범죄화 해야할 것입니다. 축구로 치면 아예 상대가 손으로 던져 골을 넣었다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어필도 없이 골과 패배를 인정하고 범죄에 ‘도게자까지 박은 것’입니다. 솔직히 이번 남아공전보다도 저는 이게 더 충격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 결과에는 원인분석과 그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그 작업을 아무도 안하니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무죄가 선고되면 검찰 내부 보고서에는 과오를 적는 란이 있습니다.
1) 수사검사 과오, 2) 공판검사 과오, 3) 법원과의 견해 차이.
그런데 수원지검의 문자 메시지 어디에도 누구의 책임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과오였을까요?
1) 저는 저 사건 관련 진술을 처음 받은 검사입니다. 주요 수사검사 중 한명이지요. 수사가 잘못되었으면 아마도 저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들은바 없습니다. 그럼 수사검사 과오는 아니라는 거네요.
2) 수사검사 과오가 아니면 공판검사에게 과오를 물어야겠죠. 근데 그럼 수사는 잘 된 것인데 공판이 잘못돼 무죄가 난 것이니 항소를 해야 합니다. 항소포기는 안되죠. 그럼 공판검사 과오도 아니란 걸까요?
3) 항소를 못했으니 법원과의 견해차이만 남는데, 그럼 당연히 항소를 해야합니다. 심지어는 법원은 “유죄의 의심이 간다”라고 했으니 견해 차이도 없었던 셈입니다.
결국 저 1)~3) 어느 쪽이든 항소를 해야 맞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에도 항소를 포기했으니......그 누구의 과오인지 아무도 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오를 밝히다보면 항소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테니까요.
처음부터 이 건은 국민참여재판에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수사검사 공판관여를 배제시켰습니다. 원칙적으로 국민참여재판에 수사검사가 공판관여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침까지 바꾸면서 못하게 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던 수사검사는 수개월간 공판검사들에게 사건을 설명하고 논의하였습니다. 그러자 ‘기피신청’을 했다는 이유로 수사검사 및 공판검사들을 모두 감찰하고 공판에서 또 배제해버렸습니다(심지어는 그 감찰은 대검에서 무혐의가 되자 법무부에 옮겨서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공소유지를 한 공판검사들은 사건도 모르는데, 또 수사검사나 수사팀과의 논의를 하는 것을 아예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애초에 손흥민, 이강인 못 뛰게 만들고, 출전 선수들과 1군 선수들은 아예 얘기도 못하게 하면서, 한번도 해당 대회의 경기를 뛰어보지 않은 선수들만 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경기에 졌습니다. 그럼 누구 탓을 할 수 있을까요? 선수들 못 뛰게 한 사람 잘못 아닙니까?
이번 남아공전에 1:0 지고 있는데에도 계속 수비를 하는 전술에 답답하셨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무죄를 받고 싶어 안달하는 검찰을 보셨는지요? 그러고도 “범죄에 도게자 박는 검찰!” 그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검찰이 등장하였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선수와 검사들이 있어도 그 운영이 공정하지 않으면 참담한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그 피해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집니다.
아무런 전략도 없는 졸전 축구를 볼 때의 열패감 그리고 낭비된 혈세.
“범죄에 도게자 박는 검찰”에 의한 범죄피해 그리고 낭비된 혈세.
그 책임과 피해는 모두, 국민이 결국 우리가 집니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날 것이고,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할 것입니다.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졸전과 범죄피해는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우리 선수들과 검사들이 다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축구나_검찰만_망하는게_아닙니다_나라가_망합니다.
[ 선진국 문턱에서 만난 ‘애들 잡는’ 어른들의 졸렬한 잔혹극 ]
배재고 야구부원들의 정제되지 못한 응원 실수는 명백한 잘못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부과된 ‘6개월 출전 금지’는 징계를 빙자한 잔혹한 ‘선수 생명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미성숙한 청소년의 실수를 품어 안고 교정하기는커녕, 진영 논리에 눈먼 어른들이 떼로 몰려들어 사형 번호판을 찍어 누르는 형국이다.
반성과 심기일전의 기회조차 박탈하는 우리 사회 어른들의 얄팍한 수준이 오히려 참담하다.
세계가 인정하는 초일류 문화국가이자 글로벌 반도체 선진국이라는 화려한 간판 뒤에, 정작 청소년의 미래를 제물 삼아 감정을 배설하는 철부지 어른들의 자해 행위가 도를 넘었다.
학생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며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한 어른들에게 묻는다. 회초리를 든 당신들의 그 천박한 잔혹성은 과연 누가 중징계할 것인가.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정변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국가 체제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 기원이자, 굶주림과 제국의 압제에 억눌려 있던 민중이 스스로 피를 흘려 얻어낸 숭고한 해방의 상징이었으며, 국가가 숭배하는 완벽한 성역이었다. 광장에 붉은 깃발이 나부낄 때면, 모든 인민은 조국의 토대를 닦은 붉은 군대의 희생 앞에 경건하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혁명은 곧 종교였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도덕률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거룩한 신화는 모스크바 뒷골목 청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도대체 무엇이 그 무거운 역사의 엄숙함을 무너뜨렸을까.
답은 권력을 독점한 특권 관료층, 이른바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의 지독한 위선에 있었다. 혁명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당 간부들은 인민의 평등을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특권층 전용 상점에서 서구의 사치품을 소비하며 공포와 독재를 일삼았다. 인민들은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구하기 위해 반나절씩 배급 줄을 서야 하는데, 단상 위로 배가 나온 간부들이 올라와 "혁명의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라"며 훈계를 늘어놓는 기막힌 모순이 일상이 되었다.
바로 이 압도적인 기만 앞에서 대중은 폭동 대신 '희화화'를 택했다. 권력이 몽둥이를 들고 엄숙주의를 강요할수록, 청년들은 그 성역을 짓밟는 뼈 있는 정치 풍자, 즉 '아넥도트(Anekdot)'를 만들어 유통했다. 숭고했던 10월 혁명은 간부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알리바이로 타락했고, 그 위선을 꿰뚫어 본 대중에게 혁명의 역사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닌 통쾌한 코미디의 소재로 소비되었다. 아무리 거룩한 희생이라도, 그것이 권력자들의 사익을 위한 '정치 비즈니스'로 전락할 때 대중의 조소라는 가혹한 형벌을 결코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 묵직한 인과율이다.
이제 이 낡은 소련의 역사적 궤적을 2026년 대한민국으로 가져와 보자.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얄팍한 구호 하나가 사회적 공분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고교야구 대회 중 배재고 학생들이 상대 팀인 광주제일고를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라며 외친 사건이다. 특정 프랜차이즈의 마케팅을 빗대어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했다며 학교는 고개를 숙였고, 어른들은 분노하며 아이들을 징계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역사의 상흔을 유희거리로 소비한 십 대들의 가벼움은 분명 교정되어야 할 영역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향해 엄벌의 회초리를 들기 전에, 우리는 이 초현실적인 현상의 기원을 찾아 아주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린 학생들의 눈에 그 거룩했던 광주의 5월이 어쩌다 이토록 납작한 아넥도트(조롱)로 전락해 버렸는가. 그들의 입술에 메마른 냉소를 얹어준 한국의 노멘클라투라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번 촌극을 촉발한 이른바 '스타벅스 텀블러 논란'의 뼈대부터 이성의 메스로 절개해 보자. 스타벅스가 광주를 비하했다는 주장. 허나 '탱크'는 본래부터 존재하던 텀블러의 이름일 뿐이었고, 그 행사 자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실제했는지 증명할 방법은 애초에 없다.
그러나 5·18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맹목적 집단은 단어 하나에 억지 프레임을 씌워 이를 전국적 분노로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론 지선이 끝나고는 그 흔적도 찾기 어려워진게 사실이다.
텀블러 이름에는 국가적 재난라도 난 듯 핏대를 세웠지만, 정작 그 5월의 광장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가장 엄숙해야 할 전야제와 추모의 공간을 보라.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는 '매불쇼'나 김어준 같은 좌파 진영의 스피커들을 찬양하고, 희생의 의미를 성찰하기보다 야당을 악마화하고 낄낄거리는 배설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불의에 항거했던 시민들의 피눈물은 어느새 이재명이라는 특정 정치인을 구국의 메시아로 칭송하고, 진영의 낡은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어른들이 역사를 이권의 도구로 삼아 진영의 전유물로 독점하는 위선을 똑똑히 지켜본 어린 학생들이다. 권력의 찌든 관료들이 장사판으로 전락시킨 제단 앞에서, 아이들이 예의 바른 추모객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뻔뻔한 억지다.
이제 지긋지긋한 남 탓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 철없는 고등학생들의 춤사위를 탓하며 징계의 칼춤을 추기 전에, 광주의 숭고한 자산을 정치적 땔감으로 탕진하여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린 자신들의 일그러진 궤적부터 뼈아프게 '돌아보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 상처받을 자격을 반납해 버린 자들의 분노는 결코 역사의 무게를 지켜내지 못한다. 추모의 본질을 과연 누가 먼저 훼손한 건가?
위선을 스스로 멈추고 깨고 나오지 않는 한, 광장을 맴도는 청년들의 차가운 아넥도트는 더욱 은밀해지고 쉬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