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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절벽의 신자들』, 조예은
❝ 서로를 끊임없이 좇으면서도 끝내 완전히 포개어지지 못하는 진실과 믿음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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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작품의 주요 스포일러와 주관적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께는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 본 도서는 「읽는 사람」을 통해 무료로 제공 받았으며, 한줄평 외 별도의 리뷰 작성 의무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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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믿음은 서로를 지향하면서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개념이다. 믿음은 진실을 전제로 형성될 수 있지만, 믿음의 대상이 반드시 진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꽤나 기만적인 속성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녹색 절벽의 신자들』은 이처럼 서로를 끊임없이 좇으면서도 끝내 완전히 포개어지지 못하는 진실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믿음과 불신은 언뜻 완전한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옳다는 믿음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은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 믿음을 바탕으로 진실이라는 허상을 빚어내며 살아가는 셈이다. 이때 믿음은 단순히 어떤 사실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믿고자 하는 감정적 필요까지 개입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고자 애써도 주관적인 인식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녹색 절벽의 신자들』은 이처럼 믿음과 불신의 이면에 자리한 감정적 필요를 매개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의 불완전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1부와 4부는 각각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 순서가 뒤바뀌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2부부터 4부까지의 사건을 모두 거친 뒤에야 비로소 1부에 대한 본격적인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단순히 시간의 순서를 뒤섞는 서술상의 장치를 넘어, 독자가 이야기의 실체를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만든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틀어 놓은 시간선 앞에서 독자는 어느 세계를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
이야기의 구조상 1부와 3~4부는 다른 세계선에 놓여 있다. 여기에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두 세계는 완전히 독립된 평행우주라기보다 현실과 꿈이라는 경계로 나뉜 세계에 가까워 보였다. 특히 1부는 4부에서 벌어진 교통사고 이후를 기점으로 펼쳐지는 꿈속 세계처럼 읽혔다. 흥미로운 점은 오연과 제언이 동일한 꿈을 공유하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서 서로 다른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 두 사람이 믿었던 것과 목격했던 것이 달랐기에, 꿈속에서도 각자가 진실이라고 받아들인 기억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종말의 날, 의식을 되찾은 오연은 마지막으로 어떤 물을 마셨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오연은 제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목격한 참상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식한다. 어쩌면 그가 마신 물에는 의식을 잃게 하는 성분뿐 아니라 환각을 유발하는 성분까지 섞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연에게서 도망치던 도중 넘어진 오연은 통증을 느끼고 피 냄새를 맡으며, 잠시 제언이 목격한 현실에 가깝게 다가선다.
✎𓂃 "보지 마. 볼 필요 없어. 네가 무엇을 보든 그건 전부 가짜야. 네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야. 그러니 주의 깊게 보지 마. 차라리 그냥 눈을 감아."
하지만 이어진 제언의 다그침에 영향을 받으면서 다시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장면은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왜곡이 더해진 믿음 또한 진실이라 칭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얼마나 확고한 것일까?
이러한 맥락에서 1부의 세계는 오연이 바랐던 삶과 종말의 날 그가 믿게 된 ‘왜곡된 진실’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구체화된 공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1부의 제목이 「제언」인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오연의 바람에 의해 구현된 세상이라면 「오연」이 제목이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 3부의 초입을 다시 읽었다. ‘제언과 자신은 이웃사촌이자 친구이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1부의 세계는 온전한 오연의 바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처음 읽었을 때는 완전히 놓친 부분이었는데, 이 바람이 언급된 시점이 꿈(1부 속 세계)에서 깨어난 직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오연의 경우 꿈이 현실 속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1부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누구일까?
현실에서 그러했듯, 꿈에서도 오연만은 진실을 알기를 바라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1부의 세계에서도 4부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 어쩌면 1부의 세계를 창조한 사람은 제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해석하면 1부의 오연은 제언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가는 주인공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세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제언이라 하더라도, 그 세계를 직접 살아가는 것은 오연이었으니까. 오연이 현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차량 번호를 마주한 순간부터 안면 인식 장애가 기묘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언은 세계를 창조했지만, 그 세계를 움직이는 열쇠만큼은 오연에게 쥐어준 셈이다. 두 사람의 의식이 공존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때문에 작중 믿음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졌던 녹색 절벽도 1부에서만큼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적어도 1부의 녹색 절벽은 꿈과 현실을 가르는 경계처럼 보인다. 절벽 아래로의 추락이 곧 현실로의 복귀를 상징하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제언이 먼저 절벽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오연의 꿈은 끝나지 않는다. 오연 역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제언을 끌어안은 뒤에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다. 두 사람이 같은 세계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함께 경계를 넘어야 했던 게 아닐까? 더 나아가 두 사람이 이와 같은 꿈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꾸었을 가능성도 떠올랐다. 세계의 창조자가 제언이라면, 그는 오연과 함께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 몇 번이고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4부의 끝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안전한 우주로 건너가는 방법’은 지금 속한 우주에서의 삶을 먼저 끝내는 것, 즉 죽음이다. 현실이 하나의 세계라면 꿈 또한 하나의 세계가 되지 못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믿는 것이 곧 진실이라면 꿈 또한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허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1부를 비롯한 수많은 꿈의 세계에서 반복되었을 제언의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처럼 느껴진다. 제언은 오연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 끊임없이 경계를 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때문에 마지막에 이르러 병실을 찬란하게 물들인 초록빛은 그 여정의 종착지를 암시하는 증표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마침내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건너갔다는,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암시 말이다.
정환영의 관점을 비추는 듯한 에필로그 역시 상상에 힘을 보탠다. 에필로그에 붙은 숫자가 무(無)를 연상시키는 ‘0’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 만약 죽음이 한 세계에서의 소멸이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라면, 정환영 역시 죽음을 통해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구원의 세계로 건너간 것은 아닐까.
믿음에 따라 서로 다른 현실을 인식하는 모습은 『라이프 오브 파이』와 게임 『BOKURA』를 떠올리게 한다. 사이비 종교와 집단 변사 사건 같은 소재 역시 현실 속 여러 비극을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소재 자체가 전례 없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녹색 절벽의 신자들』은 뒤얽힌 시간선과 서로 다른 인식의 세계를 정교하게 교차시키며 독자를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우리가 보았을 세계, 혹은 보았다고 믿었을 뿐인 세계 속으로.
✎𓂃 우리는 각자가 보는 걸 믿을 수밖에 없는데, 증거가 있어? 무엇이 진짜인지 어떻게 구별해?
『녹색 절벽의 신자들』은 믿음이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때로는 진실에서 가장 멀어지는 길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진실이라고 여겼던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인간은 다시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어쩌면 희망찰지도 모를 메세지를 드러낸다. 결국 믿음이란 무엇이고, 진실이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