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ing gradual progress and enhancing ourselves daily fosters the development of a more refined self—characterized by a calm, steady demeanor and a deep sense of quiet confidence.
너무 우울한 얘기만 한 거 같아 종일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니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완연한 봄기운이 훅 하고 밀려 들어온다. 어느새 거리의 나무들은 잔뜩 웅크렸던 겨울의 허물을 벗고 연둣빛 새순을 눈부시게 터뜨리고 있다.
거창한 신앙고백이 없는 비신자일지라도, 이 찬란한 생동의 계절 한가운데 자리한 부활절의 맑은 종소리는 예사롭지 않은 위로로 다가오는 일요일의 오후다.
오늘 나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이 소란스럽고 캄캄한 시대에 가장 외롭고 척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바로 '상식과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 당신에게 작은 연대와 희망의 편지를 띄우려 한다.
지금 현실에서 묵묵히 룰을 말하고 또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뼈저린 고독을 견뎌내는 일이다.
광장과 소셜 미디어는 온통 달콤한 유혹들로 넘쳐난다. 땀 흘리지 않아도 국가가 삶을 책임져 주겠다는 약속, 나의 불행은 모두 썩어빠진 사회 구조 탓이니 체제를 엎어버리자는 선동, 그리고 진실의 눈을 가린 채 맹목적인 환호성만 지르는 팬덤의 광기까지. 진실보다 자극적인 거짓이 환호받고, 개인의 책임감을 말하는 자는 '냉혹하고 공감 능력 없는 사람'으로 조롱받는 이상한 시대다.
공짜와 남 탓이 흩날리는 그 요란한 축제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인기 없는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 남들이 달콤한 배급을 외칠 때 빚의 청구서를 걱정했고, 남들이 사회 탓을 할 때 개인의 성실한 땀방울과 헌신을 이야기했다. 그 무거운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무지한 삿대질을 견뎌야 했고 때로는 지독한 패배감에 휩싸여 고개를 떨구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과연 상식을 지키려는 이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깊은 밤, 홀로 한숨을 내쉬어본 적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테다.
하지만 완연한 봄볕 아래서, 2천 년 전 부활절의 서사를 다시 한번 가만히 복기해 보라.
금요일의 예루살렘은 완벽한 절망이었다. 광기의 군중은 진실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흉악범 바라바를 환호하며 맞이했다. 권력자는 비겁하게 손을 씻었고, 거짓이 승리한 듯 조롱을 퍼부었다. 진실의 육신은 차가운 동굴 속에 갇혔고, 그 입구는 절대 열리지 않을 거대한 돌문으로 굳게 봉쇄되었다. 정의는 영원히 패배한 것처럼 보였고, 남은 자들은 짙은 무력감 속에 숨죽여 울어야만 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긴 것 같고, 선동이 상식을 무덤 속에 가두어버린 것 같은 지금 우리의 절망적인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지 않은가.
그러나 역사는, 그리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자연의 섭리는 우리에게 서늘하고도 벅찬 진리를 속삭인다. 무덤을 막고 있던 그 거대하고 폭력적인 돌문은, 기어이 열리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거짓과 선동이 아무리 굳건한 빗장으로 상식을 가두려 해도, 시간은 결국 진실의 편이다. 화려한 혁명의 언어나 입에 발린 낭만은 한순간 광장을 불태우고 잿더미를 남기지만, 잿더미가 된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전진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며 묵묵히 밭을 가는 현실주의자들의 굽은 어깨였다.
지금 당장 저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집어삼킨 것 같아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꽁꽁 얼어붙은 언 땅을 뚫고 기어이 봄꽃이 만개하듯,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그 '책임과 자유, 법치와 헌신'이라는 숭고한 가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만원 지하철에 오르는 당신의 성실함.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내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려는 당신의 투박한 땀방울. 공짜를 거부하고, 룰을 지키며, 거짓 선동에 휩쓸리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당신의 그 조용하고 단단한 이성. 그것이 바로 거짓의 돌문을 서서히 밀어내고 있는 진짜 대한민국의 동력이며, 부패한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살아있는 진실이다.
그러니 고개 숙여 좌절하지 마시라. 당신은 결코 틀리지 않았고,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소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와 같은 심장으로 이 나라의 기둥을 묵묵히 받치고 있는 수천만의 '침묵하는 바위'들이 있다. 우리는 얄팍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아주 깊고 단단한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화려한 거짓의 계절은 생각보다 짧다. 책임이라는 십자가를 회피하고 얄팍한 꼼수로 연명하는 저들의 모래성은, 현실의 거친 파도가 한 번만 들이쳐도 흔적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때 폐허가 된 세상을 다시 재건해야 할 거룩한 책무는, 매서운 겨울의 고독을 묵묵히 견뎌낸 우리들의 단단한 어깨 위에 놓여 있다.
햇살이 눈부시다. 어느새 짙게 깔렸던 먹구름이 걷히고, 창밖으로는 완연한 봄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다. 차가운 절망의 동굴 속에서도 기어이 돌문을 밀어내고 빛을 향해 걸어 나오는 부활의 아침처럼, 우리의 외로운 걸음도 마침내 이 상식 밖의 야만을 끝내고 눈부신 상식의 봄에 가닿을 것이다.
자, 어깨를 펴시라. 그리고 서로의 온기를 믿으며, 다시 한번 묵묵히 신발 끈을 고쳐 매자. 길고 추웠던 겨울을 견뎌낸 당신이 몹시도 자랑스럽다. 묵직한 돌문은 반드시 열린다. 우리, 기꺼이 함께 가자.
이 글로 한쪽은 다시 분열 상황이다. 국회 법사위 출석에서 증인 선서에 거부하겠다며 서류로 작성한 장문의 글 한 대목이다. 검사 자신의 의견이라기보다 민주당이 몰아붙이는 조폭식 횡포에 대한 공소장 복붙에 가깝다. 현직 검사가 지배 권력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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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계로 100m 기록 재겠다는 ‘무식의 유희’ ]
피크타임에 쓰면 전기료를 더 받겠단다.
우리 집 계량기가 타임머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대다수 가정에 달린 건 그저 숫자만
꾸역꾸역 올라가는 구식 기계식 계량기다.
몇 시에 썼는지 알 길 없는 깡통 계량기를 앞에 두고
‘피크타임’을 논하는 건,
해시계 들고 올림픽 육상 기록을 재겠다는 격이다.
현장의 기술적 한계조차 모르는 무식함의 소치인가,
아니면 이참에 특정 업체(중국산?)의 스마트 계량기를
전국에 깔아주려는 원대한 ‘납품 대작전’인가.
입만 열면 서민을 위한다더니,
정작 내뱉는 대책은 서민들 에어컨 바람 한 번에
가슴 졸이게 만드는 싸구려 정책 뿐이다.
결국 계량기 교체 비용도,
오른 전기료도 고스란히 우리 주머니에서 나간다.
정책이 아니라 정치를 하고 싶다면
최소한 산수는 하고 나오길 바란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이 저렴한 통치술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이 황당한 '계량기 미스터리'가
나만 어이없는 건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공감한다면 RT로 응답해 주세요.
필리핀에서 60년형을 살던
마약왕 박왕열이 서울 땅을 밟았다.
"지구 끝까지 쫓겠다"는 서슬 퍼런
정의의 사자후에 국민들은 잠시 취했다.
그래, 저게 국가고 저게 권력이지.
그런데 취기가 가시기도 전에 입안이 써진다.
박왕열의 독이 퍼졌던 '버닝썬',
그 지옥도의 주역들을 대법원까지
살뜰히 보살피던 변호사 전치영이
지금 우리 공직자들의 기강을 잡는
비서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도둑놈을 잡아 오겠다며
포졸들을 풀었는데, 그 포졸들을 지휘하는
사또가 정작 도둑 패거리의 뒷배를 봐주던
변호사 출신인 꼴이다.
한쪽에선 마약왕을 압송하며 박수를 치고,
한쪽에선 그 생태계의 부역자를 변호한 인물을
'검증의 수장'으로 모신다.
이쯤 되면 우리 정부의 인사 기준은
'실력'이 아니라 '과거의 인연'이라는 신파극에 가깝다.
더 가관인 건 온라인의 풍경이다.
딴지 커뮤니티에선 '버닝썬'이 금지어가 됐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된 단어를 지워버리면
추악한 진실도 증발할 거라 믿는 모양이다.
눈을 가린다고 태양이 사라지나?
단어를 막는다고 피해자의 눈물과
가해자를 변호하며 승승장구한
권력의 위선이 세탁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박왕열을 데려온 손이 진정한 정의의 손인지,
아니면 인사 참사를 가리기 위한
화려한 마술사의 왼손인지 말이다.
진짜 공직기강은 금지어로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공분에 응답하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위선의 샴페인을 멈추고 보은 인사를 철회하라.
그것만이 이번 송환을 '쇼'가 아닌
'진심'으로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 기묘한 블랙코미디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침묵하지 말고 이 트윗을 공유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눈 감는 순간, 버닝썬의 불은 다시 켜질 테니까.
어떤 이의 프로필에서 마주한 기괴한 조합,
'노무현과 이재명을 동시에 지지한다'는 선언.
이것은 정치적 지향의 공유인가,
아니면 단순한 취향의 파편인가.
상식의 잣대로 볼 때,
노무현의 원칙과 이재명의 변칙은
결코 한 그릇에 담길 수 없는 물과 기름이다.
노무현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바보'라 불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민주주의의 가치였으나,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오직 생존과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거친 즉흥극뿐이다.
대중은 종종 철학의 깊이보다
서사의 강렬함에 취한다.
고졸 출신의 비주류가 기득권의 벽을
허무는 모습에서 느끼는 대리 만족,
그것은 노무현의 유산이 아니라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이미지만을 복제한 껍데기다.
노무현의 비극적 서사를 현재의 인물에게
무리하게 투사하는 행위는,
죽은 영웅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살아있는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가깝다.
투박함이 곧 진정성은 아니며,
거친 행보가 곧 개혁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철학의 시대'를 지나
'자극의 시대'를 살고 있다.
논리적인 정합성보다는 나를 흥분시키는
캐릭터에 열광하며, 정치적 동지가 아닌
팬덤의 일원이 되기를 자처한다.
진정으로 노무현을 존경한다면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반칙과 특권'이
지금 누구의 손에서 휘둘러지는지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거울 속의 괴물을 보지 못하고 타인의 괴물만을
탓하는 이 모순된 연대기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는가.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고,
정치인은 연예인이 아니다.
서사의 도취에서 깨어나 차가운 이성으로
본질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인가,
아니면 당신의 결핍을 채워줄
자극적인 영웅 서사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정치라는 이름의
가짜 약에 취해 있을 뿐이다.
이 지독한 모순의 끝에 남을 것은
허망한 환멸뿐임을 경고한다.
페이스북의 알 수 없는 접속 차단 조치로 댓글 창이 여전히 막혀 있다. 개인의 입을 틀어막으려 애쓰는 자들의 눈물겨운 사이버 투쟁 덕분에, 내 이전 글에 달린 어느 점잖은 비판에 부득이하게 새 글로 답을 대신한다.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이런 요지의 반박을 남겼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국풍 81과 민간 정부에서 열리는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동일시하는 건 지나친 왜곡이다. 넷플릭스가 독점 중계할 정도의 세계적인 민간 공연을 3S 정책으로 치부하는 건 K팝에 열광하는 전 세계 팬들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글쎄. 그 점잖고 고상한 논리가 내 눈엔 오히려 가장 소름 끼치는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보인다.
질문부터 하나 하자. 내가 방탄소년단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나. 아니면 수십만 서울 시민들이 그 기획사에 돈이라도 꾸어 쓴 적이 있나.
그들이 세계적인 스타고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한다는 사실은 알겠다. 그런데 그게 내 피곤한 출퇴근길을 33시간 동안 틀어막고 내 평범한 일상을 망가뜨려도 좋다는 무적의 프리패스라도 되는 건가. 넷플릭스가 생중계를 하든 빌보드 차트를 씹어먹든, 그건 철저하게 기획사와 주주들이 배불리 먹고 소화시키는 사기업의 영리 활동일 뿐이다. 그 거대한 돈벌이 잔치에 왜 시민들이 매연을 마셔가며 먼 길을 돌아가야 하고, 생업의 타격을 무급으로 징발당해야 하는가.
군사 정권이 아니라 민간 정부가 하는 일이니 3S가 아니라고. 진짜 코미디다. 군화발로 걷어차면서 강제로 길을 막으면 독재고, K팝 국위선양이라는 달콤한 배경음악 깔아주면서 길을 막으면 민주주의인가. 본질은 국가가 공공의 공간과 시민의 시간을 특정 이벤트의 성공을 위해 강제로 빼앗았다는 데 있다. 목적이 세련되고 주최측이 민간 정부라고 해서, 다수의 일상을 볼모로 잡는 그 행정 폭력의 본질이 지워지진 않는다.
나 역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방탄소년단이 이룬 문화적 성취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고, 그 자부심도 충분히 느낀다. 자랑스러운 건 자랑스러운 거다.
하지만 세계 어떤 선진국이 팝스타 컴백쇼 하나 하겠다고 수도의 심장부 메인 도로를 이틀 가까이 전면 봉쇄하고 수천 명의 경찰 행정력을 무급 용역처럼 갖다 바치나. 영국이 비틀즈를 위해 피카딜리 서커스를 33시간 틀어막았다는 소리도, 미국이 테일러 스위프트를 위해 타임스퀘어를 전면 통제했다는 뉴스도 본 적이 없다. 그 잘난 글로벌 스탠다드 어디에 특정 연예인의 상업 공연을 위해 국가의 심장부를 사유화하도록 상납하는 규정이 있던가.
가장 불쾌한 지점은 바로 이거다. 세계적인 스타면, 국위선양을 하는 애국자면, 나는 그들을 싫어하거나 보기 싫을 자유조차 없는 건가.
대중이 다 환호하니까, 나라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니까, 넌 그냥 입 다물고 그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라는 억압. 다수의 열광을 무기 삼아 소수의 불편한 목소리와 정당한 권리 주장을 중대한 모독이나 매국노의 투정으로 몰아붙이는 그 폭력적인 입틀막. 그게 파시즘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훌륭한 아티스트는 죄가 없다. 문제는 그들의 유명세를 방패 삼아 공공의 일상을 무참히 짓밟는 국가의 무식한 행정과, 그걸 비판하면 진영 논리나 안티팬으로 몰아가는 맹목적인 떼창 문화다. 나는 전 세계가 열광하는 그 화려한 무대보다, 내일 아침 제시간에 출근 버스에 타야 하는 내 팍팍한 일상이 백 번 더 소중하다. 그걸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아무리 화려한 K팝의 탈을 쓰고 있어도 폭력적일 뿐이다.
@CorruptWorldK 선무당이 사람잡는꼴이지요. 혐오와 억지가 기본이고 가짜뉴스 퍼나르는걸 정의의 전도사인양 착각하는 무리들 대부분 프로필에는 민주 정의 미래세대등 본인들의 사고나 행동거지와 전혀 무관한 단어들이 꼭 들어가 있더군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게 맞습니다.
@CorruptWorldK@lovelife690514 그때 그때 달라요. 동향으로 유재 부끄라 죽것쏘. 어떻게 보면 광주가 잴로 불쌍해라우. 특별하게 얻어묵지도 못하고 묵다남은 푸정거리 쪼까 얻어묵으면서 일편단심 민들레야 광주판 우리가 남이가가 판치는 동네로 아조 베레부럿지요.
15년의 세월,
3만 4천 명의 팔로워,
그리고 함께 호흡했던
거물급 정치인들과의 인연.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로그아웃'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를 미쳤다고 할까,
아니면 비장하다고 할까?
3.1절 아침, 나는 나의 본계정
'썩은세상'을 버리기로 했다.
1. 15년의 훈장, 혹은 족쇄
2010년 봄에 시작해 15년을 버텼다.
내 팔로워 목록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
이낙연 총리 등 대한민국 현대사를
써 내려간 이들이 가득하다.
그중엔 이미 별이 되어
떠난 분들도 계신다.
가끔은 생각한다.
작금의 대한민국 꼴을 보지 않고
떠나신 게 차라리 그분들에겐
축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지독한 역설을.
2. 피로 세운 나라, 알고리즘에 팔다
100여 년 전 오늘, 우리 선조들은
맨주먹으로 총칼에 맞섰다.
학도병은 펜 대신 총을 들었고,
선배들은 최루탄 가루를 마시며
민주주의를 뱉어냈다.
덕분에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산다.
5G 속도로 정보를 씹어 먹고,
손바닥 안의 태블릿으로 온 세상을 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술은 초고속인데 우리의 의식은
왜 '렉'이 걸린 것일까?
3. '좋아요'에 중독된 좀비들의 시대
우리는 지금 '쓰레기'의 홍수 속에 산다.
쓰레기 같은 기사,
확증편향에 가득 찬 유튜브,
본질을 흐리는 자극적인 가짜 뉴스들.
사람들은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자극에 취해 옆 사람이 죽어가는지도,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지도 모른 채
각자의 디지털 감옥에 고립되었다.
'정치 무관심'이 쿨한 것인 양
포장되는 사이,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유통기한은
빠르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
4. 0에서 다시 시작하는 '디지털 독립운동'
쉐도우밴이라는 보이지 않는
입마개에 순응하며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박차고 나갈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3만 명의 숫자가 주는 안온함을 버리고
팔로워 0명으로 돌아간다.
100년 전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았던 심정으로,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이 황무지에서 다시 이 나라의
위기를 외치려 한다.
5. 결론: 깨어나지 않으면 당신의 다음 화면은 'End'다
나의 이 무모한 도전이
언제까지 허용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이대로
스마트폰 속 쓰레기 더미에
코를 박고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마주할 미래는 '로딩 실패'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제 선택하자.
알고리즘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0에서부터
진짜 세상을 다시 써 내려갈 것인가.
나는 오늘, '썩은 세상'을 떠나
'새로운 숨'을 시작한다.
이 글이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었다면, 새로운 여정에 동행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