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허물며 다가와도 우리 사이엔 괘념치 못할 벽이 있는 걸 모르지 않을 거요. 잠시 건넨 이해와 지극정성으로 볕이 잘 드는 곳에 눕혀 내 목숨을 본인 것과 구별 없이 귀히 돌본 일로도 이미 감지덕지한 처사니, 예까지만 하시오. 언감생심, 처지도 모르고 온포溫飽에 물드는 건 곤란하잖소.
택하여 신을 모시는 자가 된 게 아니라며, 한 평생 가슴치고 사신 어머니는 과연 아실까. 아들 또한 내 어머니가 신의 제자이길 바란 적은 없었다고. 나를 잉태한 것이 죄가 되어, 신벌이라며 생을 앗아가는 일은 더욱이. ⋯⋯당신은, 아실까. 모르셔도 상관은 없지마는. 그렇지만은.
아시오? 불과 며칠 전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자기밖에 모르는 막돼먹은 자라 일컫더니 이젠 상관 않고 ��� 목숨만 지키라 간청하는 댁인 거. 참 말 바꾸기가 잦소. 그리해도 내 그것은, 약조할 수 없지. 지키지 못한 약조에 애가 타는 경험은 나 하나로도 족할 테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쪽 말이 맞았소. 반은 살고 반은 죽은 금수 같은 신세지. 하여,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한시도 잊으려 한 적은 없었소만, 계절의 빛깔과 짙어지는 향취에도 눈을 돌려보는 요즘이오. 거저 주어진 시간을 중히 여기게 됐다는 소리지. 어휴, 더워라. 거 냉수 한잔 드릴까?
고상高尙이야 아직 모르오. 식견도 그이만 못하지. 허나, 눈치 하나는 절밥 먹은 보람이 있더이다. 곁에 두고 보니 하나 배우게 되더군. 헤아림은 듣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것. 내 것을 뒤로 물려야 비로소 상대를 앞에 둘 수 있다는 것. 왕족은 다 같을 줄 알았건만 신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