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런 경우가 있었음
만나면 너무 즐겁고 고마운점도 많은 친구들인데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함
처음엔 상대가 안하면 내가 먼저 하면 된다 생각했는데 이런 일방적인 관계는 한계가 있더라고.. 일단 내 안에 서운함이 쌓이고
늘 만나고 연락을 이어감에 있어 혼자 노력하려니 지침.
더 유지해봐야 의미도 없겠다고 느낌
그래서 아쉽지만 놔줬어요
쌍방으로 마음이 잘 맞는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겠죠! 만날 수 있길 바라며..
도깨비 10주년맞이
그동안 인용글과 찾아본거에 의하면
1.지은탁과 김신은 계약관계로 김신이 선택하여 다시 돌아온것임으로 은탁의 마지막생이 끝나면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고 한다.
2.캐나다로 수학여행을 올정도의 학교라면 은탁의 두번째삶은 첫번째삶보단 가난하지않은것같다고.다행😊
10년 넘는 우정 그거 별거 아니네 진짜....
그냥 그렇게 오래됐음에도 별거 아닌 사소한 일들이 조금씩 쌓여서 하루 이틀 연락텀 생기고 그게 점점 길어지고 안읽씹하고.. 이제는 나도 내가 굳이 먼저 연락하기싫고.....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나한테는 해당안됐으면 싶었는데 역시 인간관계는 다 시절인연이구나.....
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 끊긴 친구가 있음
중~ 고등학생때 6년 내내 서로 생일날 같이 놀 정도로 친한 친구였음
서로 부모님도 다 알고 고등학교 달랐는데도 매주 만나서 놀았어
근데 대학생이되고 상경하니까 자주 못보고 나도 바빠서 연락횟수가 줄다보니 뜸해지게됐는데
문득, 항상 내가 먼저 보자고 하고 선톡하는 거 같은거야 그래서 미친놈처럼 폰 5시간 붙잡고 6년간 카톡 대화기록 다 올려봤는데 이친구가 선톡하는 경우는 진짜 손에 꼽았고(10번 미만), 그 마저도 뭔가 이유가 있을 때였음
마침 상경하고 자취하니까 인간관계에 너무 회의감느끼고 힘들고 그런상태여서 더더더더 서운했던 거 같음…,
하튼 그래서 내가 일부러 연락을 안해봤다? 원래같았음 00야 머해!!!! 하고 보냈을텐데..참았음
그렇게 1년이 지나고 n년이 지나도 연락을 없었고 이제 7년이 지나서 친구가 아니게 됨
나 갑자기 문득
내가 연락을 안하면 아무도 나한테 연락을 안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그래서 웃기지만 카카오톡을 하나하나 다 열어서
6월에 연락했던 사람들을 확인했거든.
정말 단 한명밖에 없었더라
내가 연락안하면 사실은 아무 연락도 안 오는거였어
그거 확인하고 무슨 생각이 드냐면
이렇게 나 찾는 사람도 딱히 없는데
나는 뭐때문에 그렇게 카카오톡에 집착하고
내 할일을 못하고 살았나 싶더라고
나 7월은 정말 나한테 집중해서
나를 위해 살아보려고!
항암치료 중에도 봉미선은 녹음을 했다
짱구 엄마 봉미선 목소리, 고 강희선 성우님이었다.
그런데 이분이 항암치료 중에도 녹음을 해오셨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쉬는 대신 마이크 앞에 섰다. 이 얘기를 듣고 한참 생각했다. 저 선택 너머엔 뭐가 있었을까.
보통 사람은 반대로 한다.
시한부 판정 받으면 일부터 놓는다. 당연하다. 일이란 건 살기 위해 하는 거니까, 삶이 끝나간다면 일이 제일 먼저 버려진다. 그게 상식이다. 근데 이분은 그 상식을 뒤집었다. 몸이 무너지는 중에도 부스에 들어갔다.
여기서 함부로 미화하면 안 된다.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게 숭고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워커홀릭 예찬이고, 그런 결론이면 이 얘기는 하나도 안 아름답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이분에게 그 일은 의무가 아니었다는 거다. 생계 수단이었으면 진작 놨다. 놓을 수 없었다는 건, 그게 일이 아니라 존재 이유였다는 뜻이다.
수십 년을 한 목소리로 살면 그 목소리가 곧 나다.
봉미선은 배역이 아니라 그분 인생의 절반이었을 거다. 수많은 아이들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컸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마이크 앞에 서는 게 치료보다 힘들었을 텐데도 섰다는 건, 그 자리가 그분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는 거다. 쉬는 게 회복이 아니라, 일하는 게 회복이었던 거지.
자본주의 관찰자로서 이게 부러운 지점이다.
대부분은 일과 나를 분리하며 산다. 일은 돈 버는 수단이고 진짜 나는 퇴근 후에 있다고. 그래서 일이 힘들면 존재까지 흔들리진 않지만, 반대로 일에서 의미도 못 찾는다. 근데 아주 드물게, 일과 존재가 일치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까지 그 일을 놓지 않는다. 놓는 순간 자기가 사라지니까.
나한테 물어봤다. 나에게 그런 게 있나.
시한부라면 나는 뭘 계속할까. 매매? 글쓰기? 솔직히 바로 답이 안 나왔다. 답이 안 나온다는 건 아직 못 찾았다는 거다. 돈 되니까 하는 일과 나라서 하는 일은 다르다. 전자만 있는 인생은 은퇴하는 순간 텅 빈다. 후자가 있는 인생은 마지막 날까지 할 게 있다.
그 신념의 정체는 거창한 게 아니었을 거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도,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이들이 내 목소리를 기다린다, 그러니 간다. 그 단순함. 신념이란 게 원래 그렇다.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몸이 무너져도 반복되는 행동이다. 말로 하는 신념은 널렸고, 행동으로 남는 신념은 드물다.
봉미선 목소리는 이제 없다.
근데 항암치료 받으면서도 부스에 들어가던 그 뒷모습은 남았다. 짱구를 보고 자란 세대에게 목소리로 한 번, 삶으로 한 번, 두 번 가르쳐주고 가신 거다.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어떤 축복인지.
당신은 마지막 날까지 붙잡을 일이 있는가. 나는 오늘부터 그걸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