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을 추는것이다.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즉시현금 갱무시절 (卽時現今 更無時節)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ㅋㅋ 앞뒤가 안 맞는 건 정치인들 고전적 스킬이긴 하네.
우원식 의장이 실제로 2026년 4월에 차량 5부제 때문에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진과 영상을 SNS에 올리며 인증샷을 찍었어요. “국민들 동참해달라”는 메시지도 함께.
그런데 같은 사람이 의장 재임 기간 해외 출장으로 82억 8천만 원 (약 14회, 1회 평균 5.9억) 쓴 건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김민석 / 전 국무총리(지난 8일,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저거는 국회에서만 구할 수 있을 텐데."
[김어준 / 방송인(지난 8일,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네, 저희가 어렵게 구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ttps://t.co/PzMXR6NDo5
<리센느 저격한 일타강사는 누구?>
경남과학고 조기졸업 + 카이스트 조기졸업 + 석사 + 박사 수료 + 전문연 출신 강사임.
사실상 나라 세금으로 지원받고 공부해왔음.
과고+카이 조기졸업하고 군대도 전문연가서 커리어 단절 없이 혜택받아옴.
그럼에도 이공계 안 가고 돈 벌려고 '학원강사'가 된 것임.
그러면서 제자들한텐 '돈 밝히는 의사'되지 말라고 매번 강조(아래 첨부 캡쳐)하고 있음.
자기 수입은 의사수입이랑 자릿수가 다르다고 자랑하면서.
난 아무 잘못없는 스물두살 걸그룹 멤버 원이의 발언을 일베몰이한 이 사람이 몹시 역겨움.
안규백이 탈영한게 맞다면
인사검증 할 때 탈영한 걸 알고도
국방부장관에 임명한거임
안규백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이면 이재명 도 책임에서
벗어날수 없음
일단 사실이 확인 될 때 까지
직무정지 시키는게 맞다
감추려 하면 일이 더 커짐
이런 의혹이 있는 국방장관이
계속 직무수행하고 있으면
군의 사기는 나락이다
평양을 향해선 ‘프리패스’, 국민을 향해선 ‘입틀막’
"에이,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딨습니까? 우리 국민 수준이 얼마나 높은데 그런 거에 속겠어요."
좌파 진영이 국가 안보의 빗장을 풀어젖힐 때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이 해맑고 낭만적인 세계관이 마침내 통일부의 공식 정책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정부가 우리 국민이 친북 단체인 조총련 인사들을 접촉할 때 부과되던 사전 신고 의무를 아예 폐지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무단 접촉으로 과태료를 물렸던 사안을, 이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날 수 있게 족쇄를 풀어주겠단다. 북한의 노선을 추종하는 단체와의 교류마저 '국민의 자유'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보장해주겠다는 눈물겨운 톨레랑스다.
국가 안보를 무장해제하는 이들의 행보를 팩트로 병치해보면 가히 엽기적인 수준이다. 방위 출신에 탈영 의혹까지 꼬리표로 달린 인물을 국방부 장관석에 앉혀놓질 않나, 휴전선 철책이 쑥 밀려 내려와도 태평하질 않나. 이제는 적성국의 전위대 역할을 해온 조총련과의 만남마저 "자유로운 남북 교류"라는 포장지를 씌워 대문을 활짝 열어주려 한다.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종북'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 조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적 상식이건만, 이들은 아예 보란 듯이 안보의 빗장을 뜯어버리며 폭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참으로 기괴하고 서늘한 블랙코미디와 마주하게 된다. 조총련을 만나는 것조차 국민의 자유라며 한없이 관대한 이 '빛의 정부'가, 도대체 왜 자국 국민들의 일상적인 입과 귀 앞에서는 그토록 잔혹하고 옹졸한 사상 통제관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북한 공작 노선을 따르는 단체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국민 수준이 높아 안 속으니 괜찮단다. 그런데 십 대 소녀가 무심코 내뱉은 "무섭노"라는 사투리 한마디에는 체제가 전복될 듯 거품을 물며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고등학생들이 뱉어낸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응원 구호에는 5.18을 모독했다며 야구 생명을 인질로 잡고 묘역에 끌고 가 사상 개조를 강요한다. 힙합 래퍼의 가사가 고인을 비꼬았다는 이유로 음원 유통망을 긴급 차단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입틀막법을 동원해 온라인 게시글에 5배의 징벌적 배상을 매기겠다며 시민의 혀끝을 꿰매버린다.
도대체 이 정권이 바라보는 국민의 지적 수준은 어느 장단에 맞춰져 있는 것인가. 조총련의 주체사상 선동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위대하고 현명한 국민이, 래퍼의 랩 가사나 동네 카페의 커피 브랜드 호명, 십 대 소녀의 사투리 종결어미 앞에서는 뇌가 순백색으로 세탁되어 선동당하는 나약한 개돼지라도 된다는 말인가.
모순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적국을 이롭게 하는 세력과의 교류는 '개인의 자유'로 격상시키고, 자국민이 일상에서 내뱉는 자연스러운 언어와 문화는 '유해 매체'이자 '엄벌의 대상'으로 짓밟는다. 밖으로는 한없이 문을 열어젖히면서 안으로는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거대한 무균실을 만들겠다는 이 극단적인 조현병적 통치.
노동신문을 볼 자유는 세금까지 써서 허용하지만, 국민들의 의견은 서로 신고하라는 정부.
적의 이념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국민의 비판과 풍자 앞에서는 잔혹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권력. 우리는 지금 "빨갱이가 어딨냐"며 웃는 얼굴로 안보를 해체하면서, 당신의 이어폰 속 노래와 커뮤니티 게시물은 현미경으로 털어버리겠다는 기상천외한 사이버 수용소의 완성을 목도하고 있다. 평양을 향해서는 '프리패스'를 끊어주고 자국민에게는 '입틀막' 재갈을 물리는 이 찬란한 기만극을 비웃어주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조총련 인사를 만나는 것은 합법이고 사투리를 쓰는 것은 불법이 되는 완벽한 디스토피아에서 숨을 쉬어야 할 것이다.
광주 장윤기 사건이나 부산 돌려차기남 사건이나, 지금 검찰 보완수사권 박탈 시 문제가 되는 사건에 여성이 피해를 입는 강력사건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데..
민주당 분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균열을 확인한 20~30대 여성들 안에서 지지율이 완전히 박살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건가 궁금하다.
닳고 닳은 어른의 눈에 비친 초원의 집
어린 시절, 빛바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통해 만나던 '초원의 집'은 나에겐 마치 한국의 '전원일기'와 같은 온기의 상징이었다. 척박한 서부의 땅을 일구면서도 이웃과 빵을 나누고, 소박한 식탁 위에서 가족의 사랑과 이웃 간의 연대를 확인하던 그 투박한 풍경들은 국경과 시간을 넘어 마음 한구석을 다정하게 덥혀주었다.
최근 이 명작이 리메이크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재생해 봤다. 원작이 품었던 그 뭉클한 인간애를 과연 현대의 문법으로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기대와는 다르게 한편으로, 내 안에서 뜻밖의 씁쓸한 이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백인 개척자 가족이 인디언 원주민이나 흑인 이웃과 아무런 편견 없이 동등하게 어울려 웃음 짓고 식사를 나누는 장면. 어린 시절에는 그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인류애의 모습으로 가슴 벅차게 받아들였던 그 풍경이, 이제는 왠지 현실성 없는 억지스러운 판타지나 강박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피부색과 출신이 달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 어울려 사는 그 순수한 풍경을 보며 감동하기는커녕, 작위적인 의도나 이념적 메시지부터 의심하려 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웃과 조건 없이 연대하는 아름다운 서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내 마음은 언제부터 이토록 닳고 닳아버린 것일까.
아마도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분법적 갈등과 혐오에 찌들어 살아왔다. 특히 스스로를 도덕적 파수꾼이라 여기는 정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세상을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으로 쪼개고 분열시키는 데 익숙해져 왔다. 남자와 여자, 세대와 세대, 이젠 심지어 사투리나 일상적인 농담 하나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낙인을 찍고 갈라치는 시대. 이질적인 존재들이 서로의 다름을 품어주며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낭만은 그저 동화같은 판타지가 되버렸다.
매일같이 뉴스에서 누군가를 혐오하고, 좌표를 찍어 매장하고, 이견을 인정하지 못해 징벌적 법안으로 입을 틀어막으려는 살벌한 광장. 갈등을 조장해야만 권력의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정치꾼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동안,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평등한 어울림은 이젠 낯설다.
내가 '초원의 집' 속 평화로운 공존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고 판타지란 생각에 휩싸이게 된 것은, 나 스스로가 다름을 포용할 능력을 철저히 거세당했기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마음이 가난해진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더 이상 그 이면의 순수함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종과 이념을 넘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뜯는 그 평범한 온기가 우리에게 이토록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다가온다면,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이 사회의 토양은 대체 얼마나 메마르고 피폐해진 것인가.
어릴 적 낡은 텔레비전 앞에서 느꼈던 그 다정한 인간애를 영영 잃어버린 채 날 선 의심과 편견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얄팍한 정치적 계산과 혐오의 렌즈를 벗어던지고 서로를 그저 한 명의 이웃으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너른 초원을, 우리는 아니, 나는 다시 마음속에 일구어낼 수 있을지 무겁게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