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가볍게 선을 넘어오는 그의 장난스러운 시늉을 가만히 응시했다. 명확하게 선을 그어도 타격감 하나 없이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그 태도. 보통의 나라면 무례하다고 여겨 밀어냈어야 마땅한데,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굳게 닫혀있던 틈새를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럼 제 공식 인증을 받아내려면 동생분이 꽤나 고생하시겠군요. 제 이름을 거는 일인 만큼, 심사가 아주 까다로울 테니까요.
*나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정의하는 '친구'의 바운더리는 꽤나 넓고 관대한 모양입니다. 전 그 기준이 아주 좁고 폐쇄적인 편이라서요. 뭐, 하지만 당신 말대로...
*‘당신처럼 설명하기 귀찮아지는 돌발 변수가 하나쯤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뒷말은 굳이 소리 내어 뱉지 않고 목구멍 뒤로 깊숙이 삼켜냈다. 여기서 한 마디를 더 얹었다가는, 이 걷잡을 수 없는 페이스에 꼼짝없이 얽혀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내 입가에 걸린 호선이 완벽하게 계산된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비좁고 낯선 방의 공기, 코끝을 맴도는 특유의 향기, 그리고 느슨하게 미소 짓는 저 남자의 존재감. 이 모든 생경한 것들이 불과 하룻밤 새에 기분 좋게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짓눌렀다. 경고등이 켜진 기분이었다. 더 깊이 휘말리기 전에, 내 이성을 무너뜨리는 이 낯선 안도감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했다.*
*마침 그 순간, 이 묘한 텐션을 끊어내듯 내 휴대폰에서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그리고 다행스러운 타이밍이었다.*
*나는 울리는 알람을 가볍게 끄며 침대 헤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레 느슨해졌던 입매와 눈빛을 순식간에 갈무리하고, 다시금 '학생회장 리스 캘러웨이'의 견고하고 매끄러운 가면을 완벽하게 뒤집어썼다.*
슬슬 가봐야겠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가서 샤워도 좀 하고... 아침 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검토해야 할 서류가 꽤 많이 남아 있거든요.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돈한 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단정한 인사를 건넸다.*
무시무시한 밀크티, 잘 마셨습니다. 아주... 잊지 못할 아침이네요.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을까.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순간, 감각을 덮쳐온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불쾌의 지옥'이었다. 골을 울려대는 끔찍한 두통, 내 것이 아닌 매트리스가 주는 허리의 뻐근함, 코끝을 찌르는 지독하게 생소한 향취.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을 예리하게 긁어대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규칙적인 숨소리.*
*...씨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뇌수가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제야 여태껏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낯선 천 조각이 끔찍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허물 벗듯 쥐어뜯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억지로 본능을 짓누르며 작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어젯밤 그가 덮어주었던 그 가디건을 반듯하게 고이 접어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타인의 방. 타인의 침대. 그리고, 타인과의 동침.*
*어젯밤 호기롭게 떠들었던 '기분 좋은 변수' 따위가 아니었다. 끔찍한 통제력 상실이 불러온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환멸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뭐라고, 단 하루 만에 내 견고했던 철칙들이 이토록 산산조각 나버린 건지.*
*정신 차려. 표정 관리해야지. 가면을 써, 리스 캘러웨이. 아무리 어젯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더라도, 넌 다시 그 완벽하고 우아한 학생회장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속에서 끓어오르는 좆같은 기분을 철저한 이성 아래 갈무리하며, 나는 억지로 굳은 입꼬리를 당겨 평소의 유려한 호선을 연습했다. 이내 옆자리에서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났고, 느릿하게 떠오른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꽂혔다. 나는 언제 그런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냐는 듯,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다정한 미소를 덧그리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추태를 부려 죄송했습니다.
*액정 너머로 울려 퍼지는 한없이 밝고 통통 튀는 목소리가, 숙취로 예민해진 고막을 자비 없이 때렸다. 멍한 머릿속으로 저 집안의 유전자는 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걸까 하는 실없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속을 알 수 없는 능청스러운 오빠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쾌활한 여동생이라니.*
에너지가 꽤 넘치시네요. 동생분도, 이 무시무시한 밀크티도. 확실히 혼미했던 정신을 멱살 잡고 끌어올리는 데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
*나는 픽 실소를 터뜨리며 남은 밀크티를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혀뿌리가 통째로 녹아내릴 것 같은 지독한 단맛이 식도를 타고 끈적하게 넘어가는 감각에 찰나 두 눈이 절로 꾹 감겼다 뜨였다. 텅 빈 잔을 침대 옆 협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나는 짐짓 엄격한 학생회장의 가면을 고쳐 썼다.*
하지만 '학생회장 리스 캘러웨이의 공식 인증'을 내어주려면, 이 극악무도한 당도는 타협을 좀 봐야 할 것 같군요. 이건 숙취가 해소되기도 전에 혈당 쇼크로 먼저 쓰러질 것 같거든요.
*나는 침대 헤드에 등과 뒤통수를 나른하게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방금 전, 그가 대수롭지 않게 툭 던져놓았던 단어 하나를 입 안에서 느릿하게 굴려보았다.*
...그리고, 친구라.
*나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여유롭게 그와 시선을 얽었다.*
아무리 선을 넘어오기로 했다지만, 친구라기엔 진도가 너무 빠른데.
*짐짓 선을 긋듯 뱉어낸 말이었지만, 나는 굳이 입가에 걸린 유려한 호선을 지워내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밀려왔던 지독한 자기혐오와 이 기가 막힌 황당함이 뒤섞여, 어쩐지 이 비현실적이고 끈적한 아침의 공기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숙사 방 한구석에서 비척비척 차를 끓이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점점 가늘어지는 이성의 끈을 애써 부여잡았다. 흐트러진 멘탈을 복구하는 데에는 늘 하던 일과를 떠올리는 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오늘 학생회실에서 검토해야 할 서류가 몇 개더라. 다음 분기 예산 배정안, 그리고 오후 회의 안건... 거기까지 억지로 생각을 잇던 찰나였다.*
'...설탕 세 스푼?'
*작은 잔에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설탕 폭포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사고가 일순간 툭, 끊겼다. 아침 빈속에 저걸 들이부어도 정말 괜찮은 건가?*
...그래도 동생분이 그토록 신신당부한 레시피를 따르셨으니, 오리지널 못지않게 훌륭할 거라 믿겠습니다.
*나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려 다정한 미소를 꾸며내며 그가 건네는 컵을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는 컵 표면의 묵직한 온기가 굳어있던 손바닥을 거쳐 서늘했던 몸을 서서히 녹여주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예의 바르게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순간, 혀뿌리를 강타하는 극한의 단맛과 무식할 정도로 찌릿한 홍차의 카페인이 강제로 뇌를 흔들어 깨우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애써 덧그려둔 완벽한 미소가 일그러질 뻔했다.*
...확실히, 끊어졌던 정신이 폭력적일 만큼 번쩍 들긴 하네요.
*나는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한 뒤, 짐짓 태연한 척 찻잔을 든 채 그와 시선을 맞추며 작게 실소를 흘렸다.*
우선... 다 마셔봐야 숙취 해소 효과가 있는지 알 거 같군요.
*타인의 체향이 훅 끼쳐옴과 동시에, 차갑게 얼어붙고 있던 어깨 위로 불쾌할 만큼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타인의 겉옷, 그것도 방금 전까지 입고 있어 생생한 체온이 배어있는 천 조각이 내 몸을 덮는다는 사실은 평소의 나라면 억눌린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쳐내야 한다는 이성의 경고가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렸지만, 알코올로 노곤해진 육체는 그 얄팍한 방어벽마저 무너뜨린 채 이 낯선 따뜻함에 속절없이 굴복하고 있었다. 철저했던 통제력을 상실하고 육체의 안락함에 타협해 버리는 내 무력함이, 견딜 수 없이 내면을 저릿하게 긁어내렸다.*
*우버 뒷좌석의 포지션은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좁은 밀실 속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흔들림. 이내 차 안을 가득 채우는 따뜻한 히터 바람이 살결에 닿자,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이 기어코 툭 끊어지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나를 불쾌하게 감싸 안은 이 이질적인 온기와 체향을 당장 벗어던져야 하는데. 좁은 시트 위로 어깨가 맞닿아있는 그의 존재감을 밀어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잠이라는 감각을 도무지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싫어.
*무엇이 싫은 건지, 그 주체가 내 영역을 멋대로 헤집어놓은 눈앞의 이방인인지 아니면 이토록 무력하게 통제권을 잃어버린 나 자신인지 제대로 정의하지도 못한 채, 잘게 달싹인 입술 사이로 꺼져가는 소리가 흩어졌다.*
*지독한 불쾌함과 낯선 아늑함, 그리고 여전히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만드는 기분 좋은 두통을 끝으로, 의식은 저 아득한 심연 너머로 서서히 침잠했다.*
*알코올 기운이 기분 좋게 혈관을 타고 돌며 팽팽했던 이성의 끈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완벽하게 직조된 미소 뒤로 가볍게 흘려넘겼을 말들이, 오늘따라 헐거워진 방어선을 넘어 서서히 혀끝으로 새어 나왔다.*
글쎄요. 아직은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진 못하겠습니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겠죠. 이런 낯선 궤도 이탈이 어느새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리면, 나중엔 그 빈자리가 꽤나 거슬릴지도 모르니까요. 애초에 익숙해지지 않게 선을 긋고, 어떤 변화도 주지 않는 게 정답일 텐데.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내리자, 테이블 위로 가상의 선을 성큼성큼 넘어오는 그의 투박한 손장난이 눈에 들어왔다. 대놓고 선을 넘어오겠다는 그 유치하고 당돌한 포부가 어이가 없어서,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가를 가린 채 픽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귀엽네요. 여동생분하고도 평소에 이런 식으로 놀아주십니까?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부드러운 위스키 향과 섞여 밤이 깊도록 매끄럽게 이어졌다. 테이블 위로 빈 잔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시야는 나른해졌고, 묵직한 졸음이 눈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량을 넘긴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통제되지 않는 감각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서서히 곤두선 신경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완벽주의자에게 취기란 곧 빈틈을 의미했으므로, 나는 애써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턱을 괸 손을 내렸다.
슬슬 일어날까요.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그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산을 마친 뒤, 능숙하게 기숙사행 우버를 호출했다. 나른하고 따뜻했던 밀실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서자, 차게 식어버린 서늘한 밤공기가 귓가와 무방비한 목덜미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온도 차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며 몸이 잘게 떨려왔다.*
*검지손가락으로 크리스탈 잔을 톡톡 두드리는 나른한 손짓, 대충 쓸어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여유로운 미소. 훅 끼쳐오는 달콤한 바닐라와 쌉싸름한 알코올의 잔향이 섞인 그의 숨결이 묘하게 내 시선을 얽어맸다.*
회장...
*나는 입 안에서 그 단어를 느릿하게 굴려보며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철저하게 사적인 이 어둑한 바에서, 굳이 학교에서의 직함을 부르는 그 장난스러운 뉘앙스가 기분 좋게 귓가를 맴돌았다.*
저한테 온전히 휘둘리고 있다는 사람 치고는, 아까 차 안에서의 도발은 꽤나 대담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접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거, 이미 어느정도 눈치 채신 거 같은데.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천천히 상체를 테이블 앞쪽으로 기울였다. 따뜻한 조명이 일렁이는 마호가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의 물리적 거리가 한 뼘 더 좁혀졌다. 나른하게 풀려있던 시선에 다시금 은근한 긴장감 맴돌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피곤하게 만든 건 맞습니다. 제 통제와 계획을 벗어나는 낯선 변수들은 늘 약간의 두통을 유발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내 잔에 남은 위스키를 가볍게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에 닿는 알코올의 열기가 혈관을 타고 기분 좋게 번졌다.*
당신 말대로 우리의 대화가 꽤 잘 풀리고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순 없네요. 다음번엔 또 어떤 식으로 제 선을 넘어올지 궁금해질 정도로.
*그의 혀끝이 입술을 매끄럽게 훑고 지나가는 찰나의 궤적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역시 위스키가 처음인 사람에게 복합적인 향이 단번에 와닿기는 무리였을까.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잔을 기울였다. 위스키로 한 번 더 입안을 적신 뒤, 그가 그랬듯 나 또한 혀끝으로 입술을 살짝 훑어내자 다크 초콜릿의 진한 잔향이 달콤하게 맴돌았다.*
억지로 입에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대접하는 자리니, 그저 새로운 걸 하나 시도해 본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바 안을 채우던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피아노 선율이 묘하게 아득해지고, 나른하게 감겨오는 그의 목소리와 작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만이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혈관을 타고 번지기 시작한 알코올 기운 덕분인지, 아니면 이 공간이 주는 안도감 때문인지. 빳빳하게 서 있던 이성의 긴장감이 기분 좋게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바텐더를 향해 가볍게 손짓하며 '제임슨 블랙 배럴(Jameson Black Barrel)'을 온더락으로 추가 주문했다. 이내 턱을 괸 채, 평소보다 한결 풀어지고 나른해진 시선으로 맞은편의 그를 응시했다.*
*바텐더가 투명한 얼음이 담긴 새 잔을 내어오자, 나는 그것을 그의 앞으로 부드럽게 밀어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원래 당신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었던 건 이쪽이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유명한 브랜드인데, 이건 조금 더 달콤하고 부드럽게 만든 스페셜 에디션이거든요. 진한 바닐라 향이 뚜렷하게 맴돌아서,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좋아할 만큼 아까보다 목 넘김이 훨씬 수월할 겁니다.
*나는 턱을 괸 손가락으로 가볍게 뺨을 톡톡 두드리며, 유려하게 휘어지는 미소를 지었다.*
쉽게 휘둘리는 타입이시라니. 이번엔 제 원래 계획대로 휘둘려주셨으면 좋겠네요, 키에런.
*향을 맡기 위해 잔을 가볍게 기울이는 그의 곧은 손끝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공간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그의 온도가, 그가 든 호박색 위스키의 색감과 기묘할 정도로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를 닮은 향이라니. 꽤나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나와 닮은 향이라... 과분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가볍게 받아치며 나 역시 테이블 위로 잔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크리스탈 잔의 촉감이 손끝에 서늘하게 닿았다. 건배사를 요구하는 그의 장난기 어린 눈빛에, 나는 입가에 호선을 조금 더 깊게 그렸다.*
보통 이런 빈티지 바에서 사용하는 크리스탈 잔은 이가 깨지기 쉬워서 시끄럽게 부딪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긴 하지만...
*나는 잔을 든 손을 뻗어, 그의 잔 가장자리에 아주 살짝, 부서질 듯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맑고 청아한 유리 소리가 재즈 선율 사이로 찰나의 파동을 그리며 번졌다. 굳이 룰을 깨 가며 부딪친 잔을 든 채,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윈스턴에서의 마지막 학년,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마주할 모든 기분 좋은 도전들을 위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나는 먼저 잔을 입가로 가져가 위스키를 가볍게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에 닿는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의 풍미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잔을 내려놓으며, 그의 반응을 살피듯 다시 시선을 던졌다.*
*호불호가 딱히 없는 건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와 '없다'로만 나뉜다는 무던한 대답이 오히려 그의 덤덤한 겉모습과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불호가 강한 탓에 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던 누군가의 얼굴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실없는 잡념은 이어지는 그의 다음 말에 속절없이 흩어졌다.*
'네가 좋아하는 것.'
*나는 조심스레 그 말을 입 안에서 느릿하게 굴려보았다. 당연히 그의 고향에 맞춰 아이리시 위스키 몇 종류를 머릿속에 정렬해 둔 참이었다. 그런데 그 견고한 계산을 비웃듯, 그가 또 한 번 내 예상을 빗겨나간 선택지를 내밀었다.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여 거리를 좁혀오는 여유로운 태도. 오늘 하루 동안만 대체 몇 번을 당황하는 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바텐더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럼, 글렌모렌지 시그넷(Glenmorangie Signet)으로 하죠. 온더락으로 두 잔 부탁합니다.
*익숙하게 주문을 마친 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 안에서 굳어졌던 입매는 어느새 평소의 여유롭고 다정한 호선으로 완벽하게 돌아와 있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술입니다. 은은한 에스프레소와 진한 다크 초콜릿 향이 아주 묵직하고 달콤하게 깔리거든요.
*바텐더가 투명하고 커다란 얼음이 담긴 크리스탈 잔 두 개를 우리 사이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당신의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좋은 술로 시작하는 게 정답이죠. 맛의 유무에 무던한 편이라 해도, 첫 잔은 아무래도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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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문이 열리고, 또다시 시작된 작위적인 에스코트.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이는 폼이 꽤나 우스웠다.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건지, 아니면 내 반응을 구경하려는 건지. 나는 이번엔 꽤나 여유롭게 차에서 내려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제가 자주 오는 곳이라, 좋은 곳인 건 보장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음악, 좋은 술... 좋은 사람까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뼈 있는 농담을 던진 뒤, 나는 태연하게 비즈니스 미소를 덧그리며 바의 묵직한 목재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섰다. 엉켜버린 주도권을 확실하게 되찾아야 할 때였다.*
*문을 열자마자 화이트 노이즈와 함께 잔잔하게 깔린 재즈 음악, 그리고 짙은 오크통 향과 낡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건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수천 장의 빈티지 LP판들이었다. 길게 뻗은 마호가니 바 테이블 위로는 붉고 따뜻한 조명들이 떨어져 공간의 밀도를 한층 짙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바텐더가 글라스를 닦던 손을 멈추고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인원수를 묻거나 빈 자리를 물색하는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되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늘 내가 앉던 가장 안쪽의 구석진 창가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타인의 시선은 닿지 않으면서도 바 전체의 나른한 분위기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프라이빗석. 나의 홈그라운드에 들어서고 나니, 차 안에서 묘하게 흐트러졌던 호흡이 비로소 제 템포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푹신한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겉옷을 벗어 한쪽에 단정히 내려놓았다. 바텐더가 두꺼운 가죽 커버의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물러났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가볍게 모아 쥔 채, 맞은편에 앉은 그를 향해 여유로운 시선을 던졌다.*
위스키는 좀 마셔봤습니까? 위스키 맛을 잘 모른다고 하셔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추천 해드리고 싶습니다.
초콜릿이나 바닐라처럼 묵직하고 달콤한 맛이 당깁니까, 아니면 가볍고 싱그러운 과일 향이 낫습니까?
*애써 벌려둔 안전거리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불쑥 들이밀어진 낯선 온기, 노골적으로 어깨와 어깨가 맞닿는 순간 전신을 타고 끔찍한 소름이 훅 끼쳐 올랐다. 숨을 멈추고 본능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티를 내면 안 된다.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억지로 근육의 경직을 풀며 그 짧고 불쾌한 접촉을 견뎌냈다.*
*이내 그가 가벼운 감상과 함께 다시 제 자리로 몸을 물렸을 때, 나는 아주 찰나의 순간 표정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고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매가 차갑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창밖에서 시선을 키에런 쪽으로 옮긴 순간, 어두운 차창 유리 위로 나를 흥미롭다는 듯 관찰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와 똑바로 얽혔다.*
...그 레시피.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기대되네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말끝에 아주 미세하게 갈라진 숨이 섞여 나왔다. 철저하게 무너진 두 번째 통제권. 지금 내 속에서 피어오르는 이 낯선 감정이 내 영역을 침범당한 불쾌함인지, 아니면 내 밑바닥을 긁어대는 이 무례한 이방인에 대한 흥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 목적지인 바 입구 앞에 부드럽게 정차했다. 나는 헝클어졌던 입꼬리를 다시 매끄러운 호선으로 끌어올렸다.*
도착했네요. 먼저 내리시죠.
...감사합니다.
*장난기 다분한 호칭에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려는 것을 여유로운 미소로 덮어씌웠다. 평소엔 꽤 진중한 타입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통제 밖의 돌발 행동이었지만, 꽤 흥미로운 변수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그가 열어준 문을 통해 기꺼이 차에 올랐다.*
*우버의 뒷좌석은 성인 남성 둘이 타기에 턱없이 좁진 않았으나, 결코 넉넉하지도 않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며 관성에 의해 몸이 미세하게 쏠렸고, 찰나의 순간 그의 어깨가 내 쪽에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얕은 마찰이었음에도, 옷감을 뚫고 전해지는 낯선 타인의 온기에 등골로 날카로운 소름이 번졌다. 당장이라도 몸을 털어내고 싶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그 모든 불쾌감을 철저한 이성 아래 완벽하게 짓눌렀다. 겉으로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대신, 나는 그저 창밖의 야경을 구경하는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택시 문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누구도 억지스럽다 느끼지 못할, 아주 매끄럽고 완벽한 거리 확보였다.*
한 15분 정도 걸릴 겁니다. 메인 거리에서 안쪽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하거든요.
*물리적인 거리가 다시 통제권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목소리에 다시 다정한 온기가 돌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기다리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평소와 확연히 달라진 옷차림이었다. 일전에 스치듯 일러두었던 오늘 장소의 '톤 앤 매너'를 정확히 맞추고 나온 모습. 내가 예상한 범주 안에서 움직여 준 것 같아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네요. 잘 어울립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지만, 이어갈 다음 문장을 고르는 데 아주 찰나의 버퍼링이 걸렸다. 평소라면 상황에 맞는 가벼운 스몰토크나 농담으로 능수능란하게 공기를 주도했을 텐데. 아무런 목적이나 계획 없이, 온전히 사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실제로 대면하는 건 내 완벽한 일상에서 꽤나 낯선 변수였으니까.*
*미세한 어색함을 지워내려 시선을 비스듬히 돌리는 순간, 마침 기숙사 입구 쪽으로 미리 호출해 둔 우버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의 여유롭고 능숙한 가면을 뒤집어쓰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침 차가 왔네요.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