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의 정치 관련 글들을 평소 꽤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모처럼 축구 이야기가 올라와 반가웠습니다. 저 역시 축구에 대해서라면 할 말도, 생각도 많은 사람이라 이번 글만큼은 정중하게, 그러나 조금 강하게 반론을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전제를 분명히 하자면 작가님이 글 후반부에서 말씀하신 시장주의와 작은 정부의 철학에는 저 역시 거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바라보는 관점에도 동의합니다. 국민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우매한 존재처럼 취급하면서 온갖 규제를 만들어 삶에 개입하려 드는 좌파 정권에도 저 역시 환멸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번 글에서 홍명보와 축구를 그 논지를 설명하기 위한 analogy로 사용하신 것은 상당한 무리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월드컵 전후 홍명보가 당한 것이 정상적인 비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판을 넘어 비난과 조롱, 인신공격이 난무했고,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온 국민이 작두를 타고 굿이라도 하듯 대표팀이 망하기를 기다리는 기괴한 광기가 있었습니다.
그 광기의 시작이었던 대한축구협회의 감독 선임 과정부터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몽규 회장과 협회 측 논리의 핵심은 전력강화위원회가 감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결기구가 아니라 자문기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성 위원장이 사퇴한 이후 후속 작업을 이임생 위원에게 위임했고, 전강위 위원들의 동의도 있었다는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그 설명이 협회의 모든 행정적 미숙함을 면책해 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행정적 불찰과 불공정, 그리고 ‘부정’은 엄연히 다른 말입니다. 홍명보 선임 과정이 정말 부정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다툼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히딩크를 선임하던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전강위 시스템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후 감독 선임��� 기술 행정을 조금이라도 더 체계적이��� 공정하게 해보려고 이런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더 잘해보려고 만든 시스템이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협회장의 권한과 재량이 작동했다고 해서 갑자기 “대한축구협회는 수십 년 동안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썩어빠진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결론으로 점프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서사를 먼저 정해놓고 사실을 끼워 맞추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백번 양보해서 선임 과정이 잘못됐다고 칩시다.
그게 왜 홍명보의 죄입니까?
홍명보는 감독직을 제안받은 사람입니다. 후보자가 대한축구협회의 내부 행정 절차를 감사하고 적법성과 공정성을 판정한 뒤 “이 선임은 정의로우므로 수락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임 절차가 잘못됐다면 그 절차를 운영한 사람들이 책임질 일이지, 제안을 받아들��� 감독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시 여론은 정확히 그렇���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광기의 불을 지피는 데 박주호의 역할이 상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전강위원으로 참여했던 사람이 자신이 제안했던 후보들이 다른 위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튜브에 나와 내부 과정을 폭로했고, 그것이 순식간에 “역시 축구협회는 썩었다”는 대중의 확신을 만들어내는 재료로 소비됐습니다. 저는 당시 그의 태도가 공익을 위한 내부고발이라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지 않자 밖에 나와 징징대는 모습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박문성이 나섰습니다.
이재명을 공개 지지한 박문성을 저는 전형적인 ‘우덜식 좌파’라고 봅니다. 기득권이라는 단어 하나 붙여놓으면 사실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는 중요하지 않고, 일단 악으로 규정한 뒤 대중의 분노를 정의로 포장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류 말입니다.
정몽규와 홍명보를 한국 축구를 망치는 기득권 카르텔의 상징처럼 만들어놓고, 축구팬들에게 끊임없이 “당신들이 분노하는 것이 정의”라는 확신을 심어준 당시의 모습은 제 눈에는 비평이라기보다 가스라이팅에 가까웠습니다.
페노를 비롯한 일부 축구 인플루언서들도 그 흐름에 올라탔습니다. ‘정몽규와 홍명보가 물러나야 한국 축구가 산다’는 단순한 선악구도가 만들어졌고, 2014년 홍명보 체제에서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한 뒤 국가대표 커리어가 끊겼던 김영광까지 비판 대열에 가세했습니다. 여기에 한국 축구의 발전이나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보다 이미 만들어진 분노에 올라타 조회수 빨아먹기에 바빠 보이는 유튜버들이 떼로 달라붙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바로 이 광경에서 작가님이 평소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시던 좌파 정치의 전형을 봤습니다.
‘기득권’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복잡한 사실관계를 선과 악으로 단순화한다. 대중에게 분노할 대상을 하나 던져준다. 그 분노를 ��의감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군중이 한 사람을 끌어내릴 때까지 계속 장작을 넣는다.
이보다 더 좌파적인 정치문법이 어디 있습니까.
���난 30년의 대한축구협회 역사가 현대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가라는 이유만으로 ‘기득권’, 기득권이라는 이유로 ‘적폐’, 적폐니까 ‘타도’해야 한다는 삼단논법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봐온 좌파식 세계관 아닙니까.
정부와 축구협회의 관계 역시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스포츠토토 수익금의 일부가 체육계에 흘러간다는 이유로 “정부 돈을 받으니 정부가 협회를 주무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에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축구는 동시에 스포츠토토의 막대한 매출을 만들어내는 핵심 종목입니다. 정부가 축구에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관계가 아닌데, 지원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정부가 축구 행정에 칼을 들이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작은 정부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한번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홍명보 개인의 감독 자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당시 오히려 국내 감독 선임이 반가웠습니다. 외국인 감독을 계속 데려와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외국인 감독에 대한 fatigue가 오던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여론을 보면 홍명보는 무슨 동네 조기축구 감독이 낙하산으로 국가대표팀을 맡은 것처럼 취급됐습니다.
적어도 국내 감독 가운데 홍명보의 자격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K 리그에서 두차례 우승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감독이고, 2014년 월드컵 실패 이후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선수는 10년 동안 성장할 수 있는데 감독은 10년 전의 실패에 영원히 박제되어 있어야 합니까?
실리콘밸리에서는 한 번 실패한 창업가에게 그 실패의 경험 때문에 다시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실패해 본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시장에서 다시 검증받게 하는 것. 저는 오히려 그게 작가님이 이야기하시는 세계관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유럽 감독이라고 해서 우리가 전술��으로 무조건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축구 정보와 분석 방법론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공유되는 시대입니다. 감독마다 철학과 시스템, 경험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유럽 감독=선진 전술, 한국 감독=후진 전술’이라는 사고는 이제 너무 촌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님의 본래 주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축구를 국가 경제와 같은 철학으로 설명하기에는 둘의 시스템이 너무 다릅니다.
국가 경제와 비교하면 축구는 압도적으로 작은 시스템이고, 무엇이 constant이고 무엇이 variable인지도 상대적으로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시스템 안에서 들여다보면, 축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결과를 좌우하는 variable이 constant보다 훨씬 많은 종목인 것도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변수가 만들어낸 경기 결과를 사후적으로 바라본 뒤, 감독의 선택 하나만 떼어내 그것을 ‘통제욕’과 ‘오만’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저는 상당히 게으르고 오만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선발 11명을 결정할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변수가 도대체 몇 개겠습니까.
한 명만 바뀌어도 나머지 열 명�� 역할과 chemistry가 달라집니다. 당일 컨디션, 누적 피로, 훈련장에서의 퍼포먼스, 상대와의 상성, 앞선 경기에서의 활약, 부상 위험, 상대 감독의 예상 전술, 선수들 사이의 조합, 우리가 볼 수 없는 각종 데이터까지 수백 가지 factor가 존재합니다.
현대 축구에서는 경기 중에도 비디오 분석 스태프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코칭스태프가 이를 감독의 판단에 반영합니다.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한 뒤 마지막에는 결국 감독이 직관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그게 감독이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손흥민을 선발에서 제외한 것을 두고 ‘세계적인 선수를 통제하려는 감독의 오만’이라고 규정한다면 저는 정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손흥민 대신 들어간 선수는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오현규 역시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에 간 훌륭한 선수입니다. 김민재 대신 들어간 박진섭도 마찬가지입니다. 손흥민이라는 이름의 크기가 아무리 크더라도 다른 선수를 선택하는 순간 그것이 감독의 통제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이징 커브에 접어든 손흥민이 앞선 ��기에서 확실한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코칭스태프가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오현규의 움직임과 에너지, 훈련장에서의 컨디션이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예상대로 내려앉아 역습을 노렸다는 것도 고려 대상이었을 겁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상대가 깊게 내려앉아 뒷공간을 주지 않는 경기에서는 손흥민의 가장 파괴적인 장점이 제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밖에도 홍명보와 코칭스태프가 판단한 factor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제가 그 판단이 옳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작가님도 모릅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가진 정보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봅니다. 그런데 그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손흥민을 통제하려는 오만 때문에 뺐다”고 타인의 동기까지 단정한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전문가가 가진 정보와 판단을 무시하고 자신의 제한된 관찰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오만 아닐까요.
스포츠는 잔인할 정도로 결과론적입니다.
홍명보가 준비한 팀과 전술이 체코전에서는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다른 경기에서는 골키퍼의 실수 하나, 공격수의 헤딩 몇 센티미터가 경기 결과와 감독에 대한 역사적 평가까지 뒤집습니다.
김승규의 실수가 없었다면, 조규성의 헤딩이 골로 연결됐다면, 그래서 멕시코전에서 비겼다면 이후의 대진과 결과, 그리고 지금 우리가 홍명보를 이야기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승규의 팬이고 그 실수를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축구가 그만큼 사소한 사건 하나에 모든 평가가 뒤집히는 스포츠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 감독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면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까지도 프로 스포츠의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기 결과에 책임지는 것과 한 인간의 인격이 짓밟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월드컵 준비 과정부터 대회 중간까지 온갖 인신모독을 당하고, 대회가 끝난 뒤에도 무슨 범죄자가 망명이라도 다니는 것처럼 어디에 나타날 때마다 ‘홍명보 출몰’ 같은 표현으로 조롱받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 역할은 굿판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응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손흥민 대신 오현규가 뛰었고 김민재 대신 박진섭이 뛰었습니다. 그들 역시 대한민��을 대표해서 월드컵에 나간 선수들입니다. 감독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가지고 결정을 내렸고 선수들은 그 결정 아래 최선을 다했습니다.
끝나고 실패했다면 냉정하게 평가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하기도 전에 감독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실패하기만 기다렸습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전국민적 광기를 만드는 데 박문성 같은 이재명 공개 지지자가 선봉에 서고, ���주호의 폭로가 불을 붙이고, 페노를 비롯한 사람들이 ‘기득권 축구협회 타도’라는 프레임을 확대하고, 홍명보 체제에서 대표팀 경력이 끊겼던 김영광 같은 전직 선수들의 비판과 조회수 빨기에 혈안이 된 유튜버들이 그 위에 올라탔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광경에서 자유주의를 본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이라는 이유로 악마화하고, 복잡한 시스템의 문제를 한두 사람에게 투사하고, 대중의 분노를 정의로 둔갑시키고, 끊임없이 같은 메시지를 주입해서 다른 의견을 말하기조차 어렵게 만드는 전형적인 우덜식 좌파의 가스라이팅과 군중정치를 봤습니다.
그래서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이 글 후반부에서 비판하신 좌파의 통제와 오만에는 저 역시 동의합니다. 개인의 자율성을 믿고, 시장을 믿고, 정부가 인간의 삶을 ���계할 수 있다는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오신 홍명보라는 사례에서는, 정작 작가님께서 평소 비판하시던 바로 그 좌파적 프레임에 너무 쉽게 올라타신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축구 감독이 손흥민을 선발에서 제외하는 것과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방임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수들의 자유와 창의성을 살리되 11명을 하나의 팀으로 조직하고, 때로는 스타를 빼고 다른 선수를 ��으며,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에 책임지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판단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틀렸다면 비판하면 됩니다.
그러나 실패한 판단과 오만한 판단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한된 정보만 가진 군중이 전문가의 실패한 결정을 근거로 그의 동기와 인격까지 재단하고, 선동가들이 거기에 장작을 넣어 한 사람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 뒤 집단적으로 돌을 던지는 것.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작가님이 그토록 혐오하시는 좌파적 세계관의 완벽한 축소판에 더 가까웠습니다.
@TheLaurenChen No, this doesn't mean he was being a gentleman. It could've been he just wasn't sexually attracted to her and yet was exploiting her time for companionship. Happens all the time lol.
@BenHerreid @BookJunkieVal car serves transportation. good far outweighs bad. hence banning or structly regulating it is not in discussion. the main purpose of gun is to kill. contrary to your beilief bad outweighs good(protection). so false equival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