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를 원문으로 읽을 만큼 일본어를 잘하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인데, 번역으로 읽고도 이렇게 좋으면 원래 문장은 어떨까 싶어서다.
『봄눈』에서는 좋아하는 여자를 자존심 때문에 밀어내던 남자가, 그녀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자 뒤늦게 사랑에 매달린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관계를 망치는 마음을 읽다 보면 답답한데, 계속 읽게 된다.
그렇게 놓친 듯한 사랑은 언제 돌아오려나...
나는 미시마의 이런 세심함이 좋다. 좋아한다는 말은 못 하면서 상대의 반응은 신경 쓰고, 사랑받고 싶으면서 상처 주는 말을 하는 마음. 그런 모순을 쓰는 표현들이 유난히 좋다. 『사랑의 갈증』에서 질투가 커져 가는 과정도 그렇다.
나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후보로 추천된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지만, 작품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일본어를 잘하게 되면 그가 왜 하필 그 단어를 골랐는지, 그 문장이 일본어로는 어떻게 읽히는지 알고 싶다. 줄거리를 따라갈 정도보다 훨씬 잘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원문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미시마유키오 #문학
조선의 왕궁에 들어가려면 일본공사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급습했다. 조선군 수백 명이 총을 들고 맞섰다. 당시 『도쿄아사히신문』은 조선군 사망 17명·부상 60여 명으로 보도했다.
일본은 경복궁과 그 주변의 조선군이 먼저 발포해 '어쩔 수 없이' 응전하고 왕궁에 진입했다며, 책임을 조선에 돌렸다.
궁 안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 전투 중지 명령을 받아냈다. 왕궁을 지키던 군인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싸움을 멈춰야 했다.
일본군은 경회루에 본부를 차리고 조선군을 무장해제했다. 궁궐 출입은 일본공사관이 발급한 ‘문표’로 통제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들어온 청군과 일본군은 전주화약 뒤에도 조선에 남아 있었다.
조선은 양국에 철병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압박했다. 조선이 청과 맺은 조약을 폐기하고 청군을 철수시키라는 요구도 이어졌다.
일본은 결국 왕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입궐시켜 민씨 중심의 권력 구도를 무너뜨렸다.
7월 25일,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청군 철수 문제를 위탁받았다. 같은 날 일본 해군은 풍도에서 청군을 공격했다.
‘조선의 독립’을 내세운 전쟁은 조선 국왕과 왕궁을 무력으로 장악한 뒤 시작됐다.
#한국사 #청일전쟁
“한인이 구라쓰쿠리(이루카)를 죽였다. 내 마음이 아프다.”
645년, 왜의 실권자 소가노 이루카가 궁궐에서 살해되자 후루히토노 오에 황자가 자기 궁으로 달려가 했다는 말이다. 『일본서기』에 나온다.
다만 이 말에는 “한의 정무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뜻”이라는 주석도 붙어 있다.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였다. 카마타리는 669년 후지와라라는 성을 받은 후지와라 가문의 시조다.
그런데 이 카마타리가 백제 왕자 부여풍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 역사작가 세키 유지는 『풍장—후지와라 카마타리의 정체』에서 두 사람의 행적을 겹쳐 보았다.
부여풍은 왜에 오래 머물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귀국해 부흥군의 왕이 됐다.
세키는 백제 부흥전쟁 무렵 카마타리의 행적이 기록에서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에게 ‘직관(織冠)’, 카마타리에게 ‘대직관(大織冠)’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부여풍의 이후 행적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는 663년 백강 전투 패배 뒤 고구려로 피신했다. 『자치통감』은 668년 그가 중국 남부 영남으로 유배됐다고 기록한다. 카마타리는 이듬해인 669년 왜에서 생을 마쳤다.
기록의 공백과 관위의 유사성만으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한인’이라는 발언도 카마타리의 출신을 직접 밝혀 주지는 않는다.
비록 동일인설의 입증은 아직이지만, 왜가 백제 왕자를 돌려보내고 군대까지 보내 부흥을 도왔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았다.
부여풍이 왕위를 되찾으려던 전쟁에서, 왜의 군대도 신라·당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백제 #일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