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S. 버로스는 언어를 우주에서 온 인간 신경계를 숙주 삼는 바이러스라고 했습니다. 버로스는 언어가 통제 메커니즘이라 생각했고, 이를 해킹하기 위해 컷-업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저는 언어가 외부에서 도래하여 의식과 하나가 되어버린, 일종의 미토콘드리아와 비슷한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요거 양조위는 원래 잘생겼어! 라는 인용이 많던데,
양조위 잘생긴 거 맞긴 한데, 갠적으로 홍콩 교환학생 하면서 어울렸던 홍콩 이십대 남자애들 다들 뭔가 양조위의 조각이 사혼의 구슬조각처럼 다들 있음. 어떤 광동적 뭔가, 중국 남부적인 뭔가 아닐까란 생각이 있음.
근데, 그 와중에 양조위는 단 한 명이고, 사실 양조위라는 온전한 구슬을 그 구슬조각들과 구분하는 건 그의 어떤 신체에 대한 이해, 태도, 특히 그것이 합쳐진 몸의 어떤 아우라 아닐까, 란 생각이 있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옛어른들이 하던 말이 있다. 외모는 3년 간다고.
예쁜 것도 잘생긴 것도 잠깐이니 얼굴 보고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 안 한다. 그 시대엔 맞았다.
농사짓던 시대를 생각해봐라.
하루 종일 밭에서 해를 정통으로 맞는다. 자외선 차단제 같은 건 없다. 겨울엔 찬바람에 트고 여름엔 타고.
물 길어 나르고 낫질하고 허리 굽히고. 피부가 버틸 수가 없는 환경이다.
그 조건에서 얼굴은 진짜로 3년이면 아작났다.
스무 살에 곱던 얼굴이 스물셋이면 볕에 익고 주름이 잡혔다. 넉넉잡아 3년. 어른들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근데 지금은 어떤가. 존나 오래간다.
실내에서 일하고, 선크림 바르고, 피부과 다니고, 시술까지 받는다.
마흔에 서른으로 보이는 사람이 널렸고, 쉰에도 관리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얼굴로 산다.
같은 문장인데 시대가 바뀌니까 틀린 말이 된 거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외모가 아니다.
어른들의 격언은 그 시대 환경에서 뽑은 통계라는 거다.
외모 3년은 농사 환경에서 맞는 통계였다. 환경이 바뀌면 통계도 바뀐다.
근데 격언은 환경 설명 없이 문장만 전해진다. 그래서 조건이 바뀐 줄 모르고 결론만 물려받는다.
이런 게 한둘이 아니다.
빚지면 큰일 난다는 말도 금리 20% 시대의 통계고, 회사에 뼈를 묻으라는 말도 평생직장 시대의 통계다.
그 시대엔 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조건에서도 맞는지는 다시 계산해야 한다.
격언을 버리라는 게 아니다. 검산하라는 거다.
문장을 물려받을 때 그 문장이 태어난 환경도 같이 봐야 한다.
환경이 그대로면 쓰고, 바뀌었으면 고쳐 쓰는 거다.
외모는 이제 3년이 아니라 30년 간다.
관리라는 변수가 생겼으니까. 옛말이 틀린 게 아니라 세상이 조건을 바꾼 거다.
축제라는 건 원래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장치 중 하나다. 평소에 금지된 몸을 허락하는 시간. 일 년 내내 허리 펴고 점잖게 걷던 사람들이 딱 며칠, 무릎을 굽히고 팔을 흔들고 바보가 되는 걸 공동체 전체가 승인한다.
오봉은 거기에 죽은 자까지 초대한다. 조상 영혼이 돌아오는 며칠 동안 산 자들이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 건, 죽음 앞에서 웃음으로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저 이상한 자세는 문명의 기능이다. 인간이 미치지 않고 살기 위해 설계한 감압 밸브.
그리고, 저 춤 안에 에로스는 있다.
오봉 춤은 역사적으로 만남의 장이었다. 마을 청년 남녀가 일 년에 한 번 밤에 모여서, 얼굴 반쯤 가리고, 몸을 흔드는 시간.
짝짓기가 실제로 거기서 일어났고, 다들 그걸 알았다. 메이지 정부가 풍기문란으로 금지한 적도 있다.
음란하다는 독해는 일본의 근대 국가가 먼저 했다.
그래, 에로스가 있고, 그게 바로 저 춤이 400년을 산 이유 중 하나다. 죽은 자를 맞는 밤에 산 자들이 가장 살아있는 몸으로 추는 춤. 애도와 생명력이 한 동작 안에 있는 것.
중국 트윗은 그걸 음탕이라고 부르지만, 넘침(淫)을 보긴 봤는데, 그게 어디서 어디로 넘치는 건지 (죽음에서 삶으로) 를 못 읽은 것이다.
근데 여자들이 젊을때 남자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버릇 나빠져서 몹쓸인간 되는 경우가 많거든. 그거랑 비슷하게, 교회에서 사역하며 20대 보낸 사람들도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된거다. 원래 인간관계는 내가 더 많이 주는 것 같고 아쉬운 게 정상인데 교회나 연애는 남이 주는데 중독되서.
오디세이 봤는데 리버럴의 종말론적 감각이 느껴지는 영화였음. 자유주의적 합의는 무너졌는데 우리는 이를 막지 못하고 방조했으며 심지어 우리의 탐욕은 그 원인이었음. 바다민족으로 그리스가 한 번 망한 것처럼 죄를 지은 우리는 망했지만 이를 인정하면 이후 세대에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